나란히 자라는 농사

오늘부터 그린㊸ 농사로 배우는 공존의 감각

지난여름이 무색한 까까머리 밭에는, 그곳의 생명들과 어린 농부들이 나란히 성장했던 시간이 촘촘히 박혀있다. 지난봄, 아이들과 이 밭에 마주 섰을 때 우리의 첫 질문은 ‘무엇을 얼마나 심을까?’가 아니었다. 우리는 맨발로 흙 온도를 재며 물었다. “지금 땅은 우리를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우리의 농사는 밭의 생산성이 아니라, 그곳에 깃든 수만 가지의 관계성을 향해 있었다.
관찰자를 넘어, 머무는 주체로
‘초록놀이터’라는 이름을 달고부터, 우리는 줄곧 ‘자연을 어떻게 예술교육 안으로 가져올 것인가’를 연구해왔다. 그러나 자연에 시선을 멈추게 하고 숲을 일상에 들이는 다디단 작업은 씁쓸한 뒷맛을 남기곤 했다. ‘자연의 파편을 빌려와 예술이라는 폴더에 수집하는 데 매몰된 건 아닐까?’ 이 오랜 물음 끝에, 7회에 걸쳐 치열하게 이어간 자체 ‘기획자학교’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자연을 마주 보는 관찰자에서 자연 안에 ‘머무는’ 주체로, 시선을 옮겨보기로 한 것이다. 그 실천의 중심에 ‘농사’라는 정직한 삶의 양식이 놓였다. 농사는 인간이 자연의 순환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가장 적극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 농사의 목적은 키우고 거둬들이는 결과가 아니었다. 씨앗이 터지고 줄기가 뻗으며 벌레에게 잎을 내어주기도 하는 비예측적이고 비결정적인 과정 자체가 목적이 될 때, 비로소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회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생명과 공존하는 태도, 세상을 감각하는 방법. 이것을 체득하는 우리의 농사가 가장 근본적인 형태의 생태교육이자 예술교육이라 갈무리하며, 농부예술학교는 시작되었다.
생명들과 나란히 걷는 법
맨발의 어린 농부들이 밭에 들어서며 땅의 기분을 생각해보던 첫날은,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밭의 생명들과 나란히 서게 된 시작이었다. 가벼운 비가 내리던 날엔 비옷을 입는 대신, 밭에 누워 그를 온전히 맞이했다. “흙이 목말랐나 봐. 마시는 소리가 들려.” 아이들은 빗방울이 흙에 부딪혀 내는 소리와 그로 인해 피어오르는 흙 내음을 오감으로 기록했다. 들쭉날쭉 갉아 먹힌 채소도 농사의 실패로 보지 않았다. 아이들이 벌레가 남긴 불규칙한 흔적에 선을 이어 그리며 독특한 무늬를 완성하고, 스스로 ‘애벌레랑 내가 같이 그린 그림’이라 명명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애벌레의 식욕과 인간의 창작욕이 교차하는 순간’이라 부르기로 했다. 이처럼 서로의 생존과 표현이 맞닿는 지점에서 비로소 살아있는 예술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시선의 변화는 흔히 잡초라 불리는 풀들에도 닿았다. 무참히 버려지던 이들을 어린 농부들이 조심스레 파내어 따로 마련한 구역에 옮겨 심자, 그들은 더 이상 ‘잡초’가 아니라 본연의 색을 뽐내는 고유한 생명으로 자라났다. 농사를 통해 길러진 관찰과 발견의 근육은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생명을 고유한 세계로 존중하게 했다. 고대하던 첫 열매를 따던 날, 첫입을 베어 문 아이가 말했다. “토마토 안에서 햇빛 맛이 나요. 어제 내가 먹인 물맛도요.” 그 작은 열매 속에 하늘이 내린 햇살과 내가 건넨 물이 담겨있음을 깨닫는 순간, 어린 농부들이 자연을 돌보고 그 자연이 다시 그들을 돌보는 다정한 고리가 연결되었다.
경계를 허무는 순환
우리의 변화는 밭의 뒷면을 대하는 태도도 바꾸어 놓았다. 어린 농부들이 직접 목공 작업으로 틀을 짜고, 밭에서 찾아낸 지렁이들을 옮겨 담아 퇴비 상자를 만들었다. 이후, 수시로 나오는 마른 줄기와 시든 잎들을 쓰레기 자루에 담는 대신, 퇴비 상자에 쌓아 올렸다. 비와 흙과 지렁이가 묵묵히 이들을 삼키고, 다시 기름진 흙으로 되돌려놓는 느린 순환을 지켜보며, 밭의 생명들은 버려져도 다른 얼굴로 되살아난다는 것을 확인했다. 생명이 죽어 다시 생명을 살리는 흙의 이치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보이지 않는 연결의 마디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지막 수확의 날, 탐스럽고 매끈한 열매는 별로 없었지만 아이들은 실망하는 기색 없이 그날을 축제처럼 즐겼다. 함께 땀 흘리며 흙 위에서 보낸 시간을 자축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곤충과 새들을 위한 몫을 기꺼이 남겨두기로 했다. 수확이란, 대지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과 조화롭게 나누는 행위임을, 보물찾기처럼 군데군데 남겨둔 몇 알의 열매로 증명했다. 그것은 인간 중심의 시선을 거두고 생태계의 일원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정한 약속이었다. 우리의 농사는 결국 ‘나’라는 존재의 경계를 허무는 과정이었다. 경계가 허물어진 그 자리에는 고립된 개인이 아닌, 생태계의 한 마디로서의 우리가 남았다. 우리는 그저 서로 기운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동등한 조각들일 뿐이었다.
새봄의 문턱을 넘어서
두 해의 농사를 통해 우리는 확신했다. 예술교육의 본질은 계획된 작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깊이 연결되는 자신만의 시각을 갖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농사가 끝난 후에도 우린 겨울 아지트에 모인다. 밭이 내어준 고구마의 노란 속살을 먹으며, 지난 농사에 대한 추억과 새 농사에 대한 모의를 나눈다. 어떤 씨앗을 새로 뿌릴지, 내년에는 또 어떤 벌레들이 찾아올지, 수확은 누구와 나눌지. 이렇게 우리의 농사는 어린 농부들의 일상과 공동체의 서사로 이어지고 있다.
눈 덮인 밭은 고요하지만, 그 아래에서는 이미 내년 봄을 향한 준비가 한창일 것이다. 기획자로서 나의 설렘과 고민은 이 겨울의 땅을 닮았다. 내년의 농사는 또 어떤 예측 불허한 풍경을 선사할까. 우리는 또 어떻게 서로의 경계를 허물며 한 마디 더 자라날까. 차가운 흙 아래 뜨겁게 요동치는 생동을 느끼며, 우리의 농사는 이미 겨울을 지나 새봄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
김민
김민
자연이 지닌 예술성과 가치를 발견하고 표현하는 활동을 벌이고자 단체를 만든 지, 9년째다. 글, 교육, 프로젝트 등을 통해 지속 가능한 문화예술을 퍼트리며, 정원과 숲, 마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초록놀이터를 소유하게 되길 꿈꾸고 있다.
chorocnori@gmail.com
사진제공_김민 초록놀이터 대표
4 Comments
  • author avatar
    텃밭지기 2026년 02월 03일 at 11:11 AM

    글을 읽으면서 어릴 적 생각이 났어요. 비 온 뒤 땅으로 올라온 지렁이를 보고 징그러워하자 엄마가 말씀하셨어요. “지렁이가 있어야 땅이 숨을 쉴 수 있어” 아마 그때부터 지렁이가 보이면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가로 옮겨줬던 것 같아요. 어릴 적 경험이 지금도 남아서 같은 행동을 하고 있죠. 어릴 적 경험,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은 오래 가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땅과 그 안의 모든 생명에 대해 잘 알게 되고, 각자 의미를 새기는 시간을 만들어주신 것 같아 즐겁게 읽었습니다. ~

  • author avatar
    김양남 2026년 02월 11일 at 11:35 AM

    나란히 자라는 농사
    오늘부터 그린㊸ 농사로 배우는 공존의 감각
    잘 보고 갑니다

  • author avatar
    안기현 2026년 02월 11일 at 12:17 PM

    나란히 자라는 농사
    오늘부터 그린㊸ 농사로 배우는 공존의 감각
    기대만점입니다

  • author avatar
    이정훈 2026년 02월 15일 at 11:09 PM

    우리 곁의 소중한 생명들과 어떻게 발맞춰 걸어가야 할지 깊이 생각해보게 되네요.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Leave a Reply to 텃밭지기 Cancel reply

4 Comments
  • author avatar
    텃밭지기 2026년 02월 03일 at 11:11 AM

    글을 읽으면서 어릴 적 생각이 났어요. 비 온 뒤 땅으로 올라온 지렁이를 보고 징그러워하자 엄마가 말씀하셨어요. “지렁이가 있어야 땅이 숨을 쉴 수 있어” 아마 그때부터 지렁이가 보이면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가로 옮겨줬던 것 같아요. 어릴 적 경험이 지금도 남아서 같은 행동을 하고 있죠. 어릴 적 경험,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은 오래 가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땅과 그 안의 모든 생명에 대해 잘 알게 되고, 각자 의미를 새기는 시간을 만들어주신 것 같아 즐겁게 읽었습니다. ~

  • author avatar
    김양남 2026년 02월 11일 at 11:35 AM

    나란히 자라는 농사
    오늘부터 그린㊸ 농사로 배우는 공존의 감각
    잘 보고 갑니다

  • author avatar
    안기현 2026년 02월 11일 at 12:17 PM

    나란히 자라는 농사
    오늘부터 그린㊸ 농사로 배우는 공존의 감각
    기대만점입니다

  • author avatar
    이정훈 2026년 02월 15일 at 11:09 PM

    우리 곁의 소중한 생명들과 어떻게 발맞춰 걸어가야 할지 깊이 생각해보게 되네요.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Leave a Reply to 텃밭지기 Cancel reply

비밀번호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