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생산적이지 않다’는 그 마음에 예술이 건넨 손

2025 도시숲 예술치유 영국 로열발레 전문가 프로그램

“실컷 춤추고 싶다. 아무 생각 없이.”
64세 김애경 씨는 43년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지난 2월 말 퇴직했다.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나만 생산적이지 않다”는 불안과 공허 속에서 오래전 적어둔 메모 한 줄을 떠올렸다. 그것이 도시숲 예술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계기였다. 이 한 문장에는 생애전환기를 맞이한 중장년의 감정과 욕구가 진하게 담겨 있다. ‘쉼’과 ‘표현’을 동시에 갈망하는 이 시기의 정서적 복잡함은 김애경 씨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직면한 구조적 현실이기도 하다.
생애전환기는 개인의 삶에서 주요 역할, 정체성, 가치, 생활방식 등의 변화를 경험하는 시기이다. 특히 현재 한국 사회의 만50세~64세 중장년은 은퇴, 자녀의 독립, 노년의 부모 부양이라는 중첩된 전환 속에서 삶의 방향을 다시 설정해야 하는 시기를 맞이한다. 사회적 역할 변화는 소속감과 자기효능감을 저하시킨다. 여기에 경제적 부담까지 더해져 우울감과 고립감을 경험하게 된다. 2022년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중장년 남성의 30% 이상이 ‘친구가 없다’고 답했으며, 일상 속 사회적 관계 단절이 우울감의 주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이런 변화는 감정적 불안정뿐 아니라 사회적 연결 약화와 생산성 단절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지며 지원체계 부재 시 심각한 사회문제로 확산될 수 있다.
도시숲에서 시작된 예술치유
‘2025 도시숲 예술치유 영국 로열발레 전문가 프로그램’은 예술을 통해 중장년의 전환기를 치유하고 재연결하는 시도를 담고 있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주도로 영국 로열발레, LG아트센터 서울, 서울식물원이 협력하여 무용교육 경험이 없는 중장년층을 위한 공공 예술치유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도시 자연 속에서 몸으로 감정을 탐색하고 표현하며 자신을 위한 치유와 회복을 찾는 프로그램이다.
로열발레 교육참여부 크리에이티브 어소시에이트 데이비드 피커링(David Pickering), 로열발레스쿨 강사 엘리자베스 포스터(Elizabeth Foster)는 단순히 발레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한 자아 표현과 몰입’을 유도하는 참여형 예술교육을 전개했다. 많은 로열발레의 안무 레퍼토리 중에서도 이번 LG아트센터 서울 시즌 공연 <더 퍼스트 갈라>(The First Gala in Seoul)에 포함된 ‘에프터 더 레인’(After the Rain)을 선정했다. 예술 ‘교육’에서 예술 ‘참여’로 이어지는 로열발레 교육참여부의 노하우가 반영되었다.
‘에프터 더 레인’은 현대 안무가 크리스토퍼 휠던(Christopher Wheeldon)이 은퇴 무용수에게 바치는 헌사로 안무한 작품으로 2005년 1월 뉴욕시티발레에서 초연되었다. 내면적 정화와 관계의 회복을 주제로 한 듀엣 작품인데, 당시 무용수로 참여한 웬디 윌란(Wendy Whelan)과 조크 소토(Jock Soto)의 은퇴를 앞둔 무대라는 개인적 맥락이 감성적으로 깊이를 더했다.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의 음악 <거울 속의 거울>(Spiegel im Spiegel)은 영적이면서도 감각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관객들에게 관계와 내면, 상실과 회복, 헤어짐과 연결이라는 삶의 통과의례를 예술로 치환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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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적 예술교육의 힘
이 작품이 단순히 공연을 위한 작품을 넘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포용적 발레 교육에 활용되고 있다. 특별히 이번 도시숲 예술치유 사업과 협력에서는 무용 접근성이 낮은 대상으로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반영하여 몸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 참여자들은 서울식물원 주제정원을 탐색하며, 식물과 바람, 향기, 공간의 온도 등에서 받은 영감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이고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로열발레의 두 무용수는 정원을 탐색하며 가장 인상 깊은 두 가지를 기억하고 메모할 것을 당부하였고, 황미화 서울식물원 전문 해설사는 ‘치유의 정원’과 ‘사색의 정원’을 중심으로 해설을 진행했다.
약용식물 중심으로 조성된 치유의 정원에는 수련꽃과 수국이 만개해 있었고, 사색의 정원에서는 정자 안마루 위에 둘러앉아 차경문화(借景文化)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차경’은 ‘풍경을 빌려온다’라는 의미로, 자연이나 주변 경관을 공간 안으로 끌어들여 조화시키는 동양 정원문화의 미학이다. 이는 인간과 자연, 공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영감을 주기 위해 우리의 레퍼토리와 발레,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곳 서울식물원에서 자연을 활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멋진 투어를 떠났고 자연과 연결되었습니다. 주변의 환경, 형태, 향기, 질감들. 그것을 춤의 공간으로 가져왔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춤추고 치유하는 과정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 데이비드 피커링 로열발레 교육참여부 크리에이티브 어소시에이트
참여자들이 춤을 출 때 정말 몰입도가 높았어요. 정원으로부터 영감을 얻으며 우리의 작업 방식과 연결할 수 있어 기쁘고 정말로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 엘리자베스 포스터 로열발레스쿨 강사
식물을 보면서 그 느낌을 또 이렇게 몸으로 표현하니까 자연스럽게 어떤 스토리를 만들고, 몸이 움직여져서 우리도 놀랐어요. 너무 놀랐어요. – 김애경 참여자
로열발레의 포용적 발레 교육은 발레를 특정 소수의 숙련자만을 위한 것이 아닌, 누구나 자기 몸과 감정을 매개로 예술에 참여할 수 있는 열린 방식으로 전환하는 교육철학이다. 참여자의 성별과 나이, 기타 제약사항에 따른 교수법(Pedagogy)이 다르지 않고 동일하다. 예술 형식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예술 그 자체의 감정 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로열발레의 스타일에 스며들게 한다. 기본적인 발레 원리를 활용하여 몸과 관계의 움직임을 탐구하는데 이 중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는 것은 2~3명씩 짝을 이루어 균형을 맞추고 중심을 잡는 과정을 통해 서로의 신뢰를 쌓는다.
열린 발레 활동은 건강과 웰빙, 치유적 예술의 연관성을 탐색하게 하며, 특히 ‘협력’을 핵심 가치로 삼는다. 이는 예술이 지닌 유희성과 포용성을 공동체 감각과 연결해 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참여한 사람들이 함께 움직이는 것은 외로움에 대한 해결책이며 그룹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참여자는 스스로 성장하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고령사회, 치유형 예술교육의 의미
치유와 휴식이 필요한 모든 사람을 위한 도시숲 예술치유 프로그램은 단순한 치유형 예술교육의 경험을 넘어 사회적 연결의 힘을 갖는다. 외로움과 고립감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다뤄지고 있다. 전 생애에 걸쳐 인간의 외로움과 고립감은 그림자처럼 존재하지만, 여가 시간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중장년을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시의 숲이라는 물리적 공간과 치유형 예술이라는 심리적 자원의 결합은 정서적 건강을 지키는 공공의 전략이 될 수 있다. 건강하고 의미 있는 여가를 설계할 기회를 얻지 못한 세대에게 예술교육은 자기표현의 언어로 사회적 무대에서 퇴장한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재등장할 수 있는 힘을 중장년에게 건넨다.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한 열다섯 명 중 다섯 명이 이번을 계기로 댄스클럽을 결성하기로 했다고 한다. 일상 속에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기회와 계기가 부족했던 중장년 세대를 위해 치유형 예술교육이 더 자주, 가깝게 제공되어야 한다.
허은희
허은희
미술을 전공하고 문화예술교육 기획과 행정을 병행하고 있다. 사회적 요구와 수요를 고려하여 보다 의미 있는 현장을 일구고 확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heo@art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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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남 2025년 07월 15일 at 1:02 PM

    ‘나만 생산적이지 않다’는 그 마음에 예술이 건넨 손
    2025 도시숲 예술치유 영국 로열발레 전문가 프로그램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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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현 2025년 07월 15일 at 2:26 PM

    ‘나만 생산적이지 않다’는 그 마음에 예술이 건넨 손
    2025 도시숲 예술치유 영국 로열발레 전문가 프로그램
    기대만점으로 다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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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은순 2025년 07월 15일 at 4:53 PM

    외로움과 고립감이 사회적 과제라는 인식에 깊이 공감하며,
    감정을 탐색하고 회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중장년층에게도
    보다 가까워질 것이라는 희망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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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양숙 2025년 07월 16일 at 8:57 AM

    도시숲 예술치유 프로그램 참가자 입니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나무처럼 고립된 느낌이었는데 프로그램으로 인해서 처음 만난 동년배들과 호흡을 고르고 동작을 나누었습니다. 그 자체가 숲처럼 사람들과 하나가 됨을 느낀 체험이었습니다. 정말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도시숲은 바로 시니어들이 맞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보았고 연결의 의미를 되새기며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훌륭한 프로그램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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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훈 2025년 07월 17일 at 9:13 AM

    도시숲 예술치유 프로그램이 단순한 치유를 넘어, 사회적 연결과 자기표현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 기억에 남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중장년층이 이런 예술 경험을 통해 삶의 활력과 소속감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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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리 2025년 07월 17일 at 6:08 PM

    예술치유라는 수준 높은 컨텐츠를 공공의 사회적 복지로 엮어낸 아르떼 사업 ! 멋져요! 앞으로도 좋은 기획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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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남 2025년 07월 15일 at 1:02 PM

    ‘나만 생산적이지 않다’는 그 마음에 예술이 건넨 손
    2025 도시숲 예술치유 영국 로열발레 전문가 프로그램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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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현 2025년 07월 15일 at 2:26 PM

    ‘나만 생산적이지 않다’는 그 마음에 예술이 건넨 손
    2025 도시숲 예술치유 영국 로열발레 전문가 프로그램
    기대만점으로 다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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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은순 2025년 07월 15일 at 4:53 PM

    외로움과 고립감이 사회적 과제라는 인식에 깊이 공감하며,
    감정을 탐색하고 회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중장년층에게도
    보다 가까워질 것이라는 희망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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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양숙 2025년 07월 16일 at 8:57 AM

    도시숲 예술치유 프로그램 참가자 입니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나무처럼 고립된 느낌이었는데 프로그램으로 인해서 처음 만난 동년배들과 호흡을 고르고 동작을 나누었습니다. 그 자체가 숲처럼 사람들과 하나가 됨을 느낀 체험이었습니다. 정말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도시숲은 바로 시니어들이 맞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보았고 연결의 의미를 되새기며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훌륭한 프로그램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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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훈 2025년 07월 17일 at 9:13 AM

    도시숲 예술치유 프로그램이 단순한 치유를 넘어, 사회적 연결과 자기표현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 기억에 남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중장년층이 이런 예술 경험을 통해 삶의 활력과 소속감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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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리 2025년 07월 17일 at 6:08 PM

    예술치유라는 수준 높은 컨텐츠를 공공의 사회적 복지로 엮어낸 아르떼 사업 ! 멋져요! 앞으로도 좋은 기획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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