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로서 다학제적 접근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과 교류하고 성과를 공유하는 활동에 많은 관심을 두고 계시다. 최근에는 어떤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지 소개 부탁드린다.
작년부터 고등과학원에 설치된 초학제 독립연구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느린 과학, 낮은 기술, 거꾸로 선 예술’이라는 이름의 연구단이 꾸려져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연구자들과 세미나를 열고, 그 결과를 정리해서 작년 12월 퍼포먼스 형태로 공유했다. 완전히 다른 분야에 계신 분들과 ‘목소리성’에 대해 토론하며 흥미로운 작업을 이어가는 중이고 올해 7월 즈음 발표를 앞두고 있다. 고등과학원은 기초과학을 기반으로 기존 제도와 연구방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창의적인 연구 환경을 조성하고자 2012년부터 초학제 연구프로그램을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인문, 사회, 과학, 예술 등 여러 분야 종사자가 모여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그중 대략 20% 정도만 이해하고 있다. 서로 다 그렇지 않을까 짐작된다. (웃음)
융합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대한 특정 탐구 주제를 다루는지, 구체적인 내용을 좀 더 듣고 싶다.
구체적인 주제나 목표보다는 기존 서구 패러다임에서 정상과학의 변화 주기가 수용되는 큰 흐름을 살피고, 비판적 성찰을 위해 동양철학 혹은 조선시대 과학사 등 서구적 사유 방식을 점검하는 시도를 한다. 모든 시기마다 그 시대를 추동하는 축들이 있을 텐데, 종교나 신의 시대가 있었다면 현재는 과학을 신뢰하는 시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어떤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있는지, 그 태도를 점검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겠다. 예컨대 괴테의 색채학이 뉴턴의 광학 이론과 다른 접근방식을 보여준 것처럼, 엄밀하지 않아 신뢰받지 못하는 주관적 관점이라 하더라도 색상에 대한 위계적 방식이 아닌 또 다른 분류 방식으로 이미 익숙해진 관점을 다르게 볼 수 있게 한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언급 중 흥미로운 예시가 있는데, 모로코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맨땅의자(souk tool)’라는 다리 4개의 길이가 조금씩 다른 야외용 의자에 대한 비유이다. 수평이 맞지 않아 평평한 실내에서는 불편하지만, 길거리나 바닷가 등 땅에 맞추어 이리저리 돌리다 보면 어떤 곳에서도 편안하게 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땅과 의자가 수평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기술을 너무 효율성 위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느린 과학, 낮은 기술 그리고 예술의 가능성을 유연하게 탐구하자는 의미가 담길 수 있을 것 같다.
2019년부터 ‘슬릿스코프’라는 팀을 결성해 활동 중이다. 미디어 아티스트-연출가와 인공지능 연구자의 협업을 이어오고 있는데, 예술가와 공학자가 함께 창작하면서 발견하고자 한 지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2018년 우란문화재단에서 1년간 긴 호흡으로 협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해 말 공연과 전시 발표를 마치고 이듬해 초 팀을 결성해 작업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즈음 인공지능 작업을 하면서 딥러닝이라는 기술이 인간의 지능을 대체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기술 자체가 가진 강점이 있고 흥미롭다고 생각해서 협업 제안을 하게 되었다. 양자역학의 이중슬릿 실험에서 관측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듯 미지의 슬릿 사이를 들여다보는 작업을 해보자는 취지로 ‘슬릿스코프’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작업하면서 서로의 영역이 너무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고 처음에는 매우 힘들었다. 대체로 창작 작업에서 예상하는 과정은 기술개발을 하고 작품에 반영하며 만들게 되지만 개발자와 협업하는 과정은 작품제작 방식과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의도하는 작품에 필요한 기술을 요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하고 싶은 것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만들어 가기 위해 개발자의 기술적 의미를 함께 고려해야 했다. 예컨대 인공지능 모델을 만들 때 빨리 진행될 수 있는 최신의 수월한 방법이 있더라도 개발자가 오래된 기술을 선택한다면 그 의미를 함께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협업하면서 예술과 기술이 서로 이해하지 못해 답답해지는 지점이 있을 텐데, 개인적으로는 기술 영역에 있는 분들이 예술에 대해 넓은 이해심과 아량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면서 작업을 해왔다. 몇 년간 작업을 지속하다 보니, 마치 무신론자와 유신론자가 오래도록 토론하다 보면 서로의 입장이 뒤바뀌게 되는 것처럼, 어느 순간 내가 더 기술에 천착하고 상대가 예술적으로 표현하려고 하는 경험도 하게 되었다.
시 쓰는 인공지능 ‘시아’과 함께 한 퍼포먼스 <시작하는 아이>를 비롯해 시아의 시를 바탕으로 만든 연극 <파포스>를 발표했고, 이후 인공지능 최초 시집 『시를 쓰는 이유』를 발간했다. 그 사이 챗GPT 3.5가 공개되며 AI 기술이 전 세계적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동안 작업의 변천 과정도 있을 것 같다.
<파포스1.0>을 하면서 공동 창작을 한다는 개념으로 소박하게나마 작가 난에 인공지능의 이름을 꼭 넣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시아가 생성한 시를 손대지 않고 그대로 발표해 보자는 생각으로 공연을 올렸다. 그전에는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관심 갖지 않았는데 크레딧에 올린 후 주변에서 AI를 공동 창작자로 보는 태도에 관심을 보이더라. 공연을 보러오는 현장의 관객도 중요하지만, 공연을 직접 보지 않아도 그것을 알고 이야기할 수 있는 관객을 만나게 되는 것 역시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이 기술철학을 통해 제시했던 것처럼 인간과 기계적 대상의 관계가 상생적 공진화할 때 미래의 문이 열릴 것이라는 말을 낙관적으로 공감하게 되었다. 그 이후 공동 창작자라는 관점과 태도 외에 방법론에 집중해 보고자 다음 단계로 AI라고 하는 대상 자체의 촉각을 전달해 주고 싶었다. <파포스2.0>에서 중요하게 가지고 갔던 부분을 ‘촉각 극장’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시아가 배우를 통해 직접 찾아온다는 설정을 통해 촉지적 감각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동안 작업을 하면서 일종의 담론과 메시지를 담는 것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왔는데, 지금은 메시지나 담론 자체가 예술의 역할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파포스 1.0과 2.0을 거치면서 출발의 의도와 다르게 피드백이 형성되는 걸 보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인공지능 관련한 자리에 가면 뭔가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 사실상 솔루션은 하나도 없다. 예술 작업 자체에 열정을 가지고 집중하는 시간이 쌓여 작품이 나오는 것이고 그 이후 작품을 통해 이야기되는 것이지 미리 계산하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음에는 또 뭘 보여줘야 하는지에 대한 압박에서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이후 지속된 작업에서 인공지능이라는 비인간 대상과 예술창작의 관계에서 발견한 가능성과 의미에 대한 의견도 궁금하다.
예술을 추동하는 힘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고 그것이 무엇일지 스스로 질문하고 있는데, 요즘 나에게 볼드체의 문장은 ‘무뎌진 감각에 균열을 내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메시지를 담아 계몽하기보다 이 시대가 무디게 만들어 놓은 감각들에 자극을 주거나 익숙한 것에 낯선 것을 제시하는 것이 예술가들이 아닐까 싶다. 결국 담론이나 의미는 그것을 고민하는 또 다른 연구자들의 몫이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예술창작은 호기심과 유희의 측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업 후 의미가 너무 거창해지긴 했지만 메시지를 주겠다는 의도보다는 순수한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했다. 인공지능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바둑을 좋아해서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국을 본방 사수한 후 너무 재미있어서 반복해서 보곤 했다. 인공지능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작업을 계속하게 되었고 시 쓰는 인공지능 작업을 하고 나서야 다다르게 된 질문은 결국 ‘시는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의미론이다. 국립현대무용단과 춤추는 인공지능 <마디(MADI)> 작업에서는 ‘춤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공간생성 인공지능 <루덴스토피아(Ludenstopia)>의 경우에는 ‘공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연극작업을 했을 때는 연극을 통해 인간을 고민하게 되었는데 완전히 다른 접근으로 예상했던 인공지능과 작업을 하고 나니 예술에 대한 더 본질적인 질문이 남게 되었다.
창작자로서 느끼게 된 지점이 관객이나 참여자와 관계 맺는 방식의 확장으로 어떻게 이어졌을지도 궁금하다.
수용미학의 관점에서 창작자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 안에서 감상자나 관객과 어떤 의미를 창출해 낼 것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고민이 저마다 있을 것이다. 재미있었던 것은 시아의 시집을 출판했을 때 한 대학원생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시아와 시 배틀을 붙어보고 싶다며 자신이 이길 수 있을 것을 확신하는 내용이었다. 초등학생에게도 메일을 받았는데 인공지능을 이용해 시 공모전에 출품해서 상을 받아도 되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결국 관객도 자신의 선택에 달린 문제가 아닐까.
100여 년 전 쓰인 카렐 차페크(Karel Čapek)의 SF 희곡 「R.U.R」에서 로봇에 대한 세 가지 유형의 관점을 볼 수 있다.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전문 기능을 갖춘 로봇이 하나이고, 또 다른 한편 로봇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결국 인류를 멸망시킨다. 주목할 만한 것은 세 번째 관점으로 인류로서 유일한 생존자인 한 남성이 목격하는 장면을 통해 보여진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의 로봇들이 마음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는 대목이다. 그는 로봇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이제야 눈물의 의미를 알겠다고 말한다. 마치 2세대 알파고의 바둑대국을 연상하게 한다. 그때 사람들은 이제 기원이 모두 사라질 것으로 전망했지만, 오히려 그 이후 바둑 기사들의 기력이 엄청나게 상승했다. 반면 바둑은 손으로 나누는 대화라고 해서 ‘수담(手談)’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단순히 이기고 지는 게임이 되어버린 측면도 있다. 위 희곡의 마지막 로봇들이 나누는 사랑을 보며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처럼 저 역시 이런 관점에서 작업하는 것 같다.
많은 분야에서 다시 마음의 영역이 강조되고 있는 흐름과도 맞닿아있는 것 같다. 인공지능 시대 예술창작에 대한 전망이랄까, 예술 분야에서 인공지능의 역할과 의미를 되짚어 본다면?
최근 인공지능에 대해 도시 지반 아래 깔린 배수로 같은 역할을 한다는 표현에 공감이 간다. 환경이 변하겠지만, 개인적으로 기존 예술의 영토가 확장되는 정도이지 크게 달라질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때 네트워크 기술과 연결되어 대중화되며 공연에 활용되는 범위가 점점 확대되면서 예술에 녹아들고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겠으나, 그것으로 인해 예술 자체가 사라지거나 크게 변형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AI 기술 자체에서 나온 새로운 형태의 장르가 나올 수는 있을 거라 짐작된다. 사진이나 영화처럼 새로운 기술이 나왔을 때 기존의 장르, 예컨대 연극을 영화로 만들거나 사진을 그림처럼 찍었던 것처럼 올드미디어를 모방하는 형태로 발현되다가 기술 자체가 형식을 찾고 그것을 즐기는 관객이 만들어질 때 하나의 장르로 자리를 잡아 가듯 AI가 구축한 장르가 형성될 수도 있을 것이라 예상해 볼 수 있다. 기존 예술과 잘 버무려져서 더 넓게 확장되는 형태로 나가지 않을까.
제가 2009년 무렵 공연영상 수업을 처음 했을 때는 학생들이 격앙된 태도로 영상을 무대 언어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수업을 시작하고 거의 3주가량 설득하는 작업이 필요했고, 연극 현장에서 역시 무대 위 진실이 아닌 이미지가 투사되는 것에 불쾌한 내색을 숨기지 않는 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들이 모두 무색해졌고, 십여 년 넘는 시간 동안 감각이 모두 바뀌었다. AI 역시 과도기에 있다는 생각이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예전에 이런 논의를 했었지’라고 되돌아보는 시기가 곧 오지 않을까.
예술교육 현장에서 시대적 변화를 체감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팬데믹 이후 가장 먼저 진행된 대면 수업이 연극학과 수업이었고 가장 늦게 복귀한 수업이 디지털 아트 관련 수업이었다. 역설적으로 연극학과가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학과일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다. 교육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지식 제공이나 기술 기반의 교육은 학교가 아니더라도 온라인 교육 시스템 등으로 대체할 수 있다. 하지만 교육의 본령에 근접하여 남게 되는 것은 가장 본질적인 것을 다루는 학과들이 아닐까.
한편으로는 팬데믹이 라이브니스(liveness), 현존성을 다시 한번 조명해주면서 공연예술이 가진 동일한 장소에서 관객과 배우가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감각을 되살렸다고 생각한다. 공연 온라인 송출이나 화상 회의에 급속도로 익숙해졌고 아이러니하게도 ‘대면’이라는 용어가 생겼다. 그래서 앞서 말한 일종의 촉각성이 가진 힘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최근 예술과 기술뿐 아니라 많은 분야에서 융합을 강조하는 흐름이 강하게 보인다. 여전히 분과주의에 의존하는 근대적 교육 시스템에 대한 한계와 점검에 대한 요청이 이어지는데, 예술교육자로서 지향하는 바가 있다면 말씀 부탁한다.
예술은 씨앗을 뿌리지 않고 무엇이 나오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혁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시도들이 필요할 것 같은데 일방적으로 기성의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 안에서는 쉽지 않아 보인다. 언젠가 학생과 면담할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종종 학생의 말을 끊고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이 습관이 상대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고 예측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반성하게 되었다. 그때 떠올랐던 것은 학생 한명 한명을 우주로 보고 그 세계를 들여다보자는 것이었다. 학생을 우주선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운전해라, 저리로 가야 한다’라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의 관계 속에서 가능성에 집중해 보게 되었다. 예측하지 않고 무한히 열린 가능성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슬릿스코프

- 홍은지
- 전환의 계기로 작동하는 예술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며 다양한 창작방식을 고안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 공연예술 연출가.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신촌문화발전소 등에서 일했고, 얼라이브아츠 코모(alivearts como)에서 여러 분야의 아티스트와 함께 〈팰름시스트〉 〈벙어리시인〉 〈카페더로스트〉 등을 연출했다.
eufy6542@hanmail.net - 인터뷰 사진_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작품사진 제공_슬릿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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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 유연한 관측자로 존재하기
김제민 연출가·슬릿스코프
잘 보고 갑니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 유연한 관측자로 존재하기
김제민 연출가·슬릿스코프
기대만점입니다
제게 AI는 아직 도구라는 인식이 강해서 AI를 공동 창작자로 바라보는 시선이 독특하게 느껴지네요. 포토샵이나 카메라 같은 전문 프로그램과 장비들에게는 그런 감정을 느끼거나 생각하신 적이 없으셨을 거 같다고 감히 생각하는데 어떤 차이에서 AI는 공동 창작자라고 느끼게 되는 걸까요? 재밌는 고민거리가 생긴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