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지성에 주목하라

구조적 한계 속에 머물지 않기 위하여

올해로 문화예술교육 정책이 수립된 지 20년이라고 한다. 「문화예술교육 지원법」을 제정한 이래 정부는 예술교육과 관련하여 다수의 전향적인 선언문을 선보였다. 정부는 2011년 제36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서울 어젠다’를 선언했다. 또한 2024년 서울문화재단과 서울시 교육청은 ‘ESG 공동선언’을 발표한 바 있다. 이러한 정책 선언들은 예술교육이 예술적 지식과 기예의 교육에 국한되지 않음을 천명한다. 즉 예술교육은 시민적 권리를 증진하고, 삶의 질을 향상하며, 나아가 지구적 차원에서 제기되는 제반 도전에 대처하는 주요 방안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흐름은 예술 분야에서 확산해 온 문화 민주주의적 의제들과 궤를 같이 한다. 최근의 ‘포용 예술’ 트렌드는 예술계에서 배제돼 온 다양한 소수자들이 예술 향유와 생산의 주체로 거듭나야 함을 강조한다. 이때 소수자들에게 창의적 자아 표현의 훈련과 경험을 제공하는 예술교육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예술 분야에서 제기돼 온 정책 담론의 수준은 선진국 못지않은 혁신성과 개방성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외 전문가들이 국공립 예술기관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예술의 공공성과 사회적 개입과 관련한 최신의 쟁점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광경은 이제 매우 흔해졌다. 물론 이들의 이야기에서 예술교육은 가장 많이 언급되는 주제 중 하나이다.
이처럼 한국 정부와 공공기관은 예술교육을 현대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변화와 도전에 창의적으로 응전하는데 긴요한 자원과 전략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이 같은 선진적 정책 태도는 예술강사에 대한 처우와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요컨대 정책 담론과 정책 현실의 괴리가 두드러진다는 뜻이다.
지난해 예술교육 현장에서 가장 첨예한 쟁점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예술강사 예산 삭감이었다. 2년 연속 예산이 삭감되면서 예술강사들은 시수가 줄어들어 직업 활동뿐만 아니라 생계에 타격을 입게 됐다. 하지만 예술강사야말로 예술교육의 한 축을 이루는 주요한 참여자 아닌가? 예술강사 없이는 예술을 통한 사회적 혁신과 진보는 불가능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토록 세련된 정책 담론과 그토록 비루한 예술강사의 현실은 어찌하다 이토록 모순적으로 서로 부딪히게 됐는가?
이 모순은 다양하게 표현된다. 현대미술의 ‘교육학적 전회’(pedagogical turn)를 적극 수용하여 창작에 교육적 요소를 적극 도입하는 예술가 vs. 작가로서의 커리어와 작업 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강사 일을 하지만 종종 강사 일이 창작 일을 압도하는 예술가; 예술교육에 대한 최신 담론을 주도하는 연구자나 기획자들 사이에 자주 언급되는 ‘가르치는 예술가’(Teaching Artist) vs. 오래된 제도적 틀 안에서 예술교육 ‘일’을 수행해 온 ‘예술 강사’(Art Teacher) 혁신적이고 모범적인 사회문화예술교육 vs. 관행적이고 획일적인 학교문화예술교육.
이러한 이분법은 예술계의 중심과 주변의 위계를 따라 구성된 강력한 현실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라 인정하는 순간, 그 인정은 우리가 현실을 파악하는 관점에도 다시금 영향을 미친다. 정부의 예산 삭감이 직접적이고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학교예술교육 분야의 예술강사들에게 직업과 생계의 문제는 절대적일 것이다. 하지만 직업과 생계가 최우선인 학교문화예술교육과 거기 종사하는 예술강사들에게 학계와 성공한 예술가와 기획자들이 이야기하는 최신의 예술교육 의제들은 단지 ‘고담준론’(高談峻論)에 불과한 것일까? ‘고상한 가치’를 추구하는 집단과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는 집단 사이의 분리는 ‘확고불변’(確固不變)한 것인가?
나는 작년 한국문화사회학회 가을국제학술대회(2024.9.28. 이화여자대학교 ECC)에서 이러한 선입견을 뒤흔들만큼 흥미롭고 참신한 발표를 접했다. 인천연학초등학교 이신애 교사의 ‘예술-인공지능 융복합 교육 프로그램 개발 및 운영사례 연구’라는 제목의 발표였다. 이신애 교사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진행한 2023 주제중심 학교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예술로 탐구생활’의 지원을 받아 예술가들과 함께 수업을 기획하고 실행하였다. 다소 길지만 주요 부분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국 사회에서 젠더 문제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학교 외부에서 교사들에게 악성 민원이 제기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 이로 인해 교사들은 인권이나 성평등과 관련된 수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 외부의 압박을 크게 느끼고 있다. … 이와 대조적으로, ‘인공지능’이라는 주제는 다소 다른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을 경험하며 수업의 구조를 고민하게 된다. 인공지능 수업을 선택하게 된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인공지능을 전문가의 영역으로 인식하면서 교사의 발언에 더 큰 신뢰와 존중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 인공지능 데이터의 편향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성과 포용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의는, 인공지능 기술의 문제로 받아들여져 논란 없이 다룰 수 있었다. 이는 동일한 인권적 주제를 다루더라도 ‘인공지능’이라는 틀을 통해 안전하게 논의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이신애, 예술-인공지능 융복합 교육 프로그램 개발 및 운영사례 연구, (서울: 한국문화사회학회 2024 가을국제학술대회 발표자료, 2024), 180p.
이 수업에서 학생들은 아름다움을 정의하는 생성형 AI와 아름다움을 비춰주는 ‘백설공주의 거울’에 대해 토론하고 실습하는 과정을 통해 인권과 성평등을 다루는 기회를 가졌다. 그런데 이 사례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성공적이어서만은 아니다. 예술교육 현장의 구조적 한계 속에서 교사와 예술가들은 집요하게 예술적/사회적 가치를 고민한다. 학교문화예술교육은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담론을 권장하는 전문예술기관에 비하면 자율성을 보장받기 어렵다. 학교문화예술교육에서 인권이라는 담론은 다루기 까다로운 주제이다. 그러나 학교문화예술교육은 이러한 제약에 종속된 채, 관행과 타성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제약이 교사와 예술가로 하여금 예술교육과 시민교육을 접목시키는 혁신적인 전략을 창안케 한다.
비관적 전망이겠으나 앞으로도 정책과 현장 사이의 괴리는 더 벌어질 것이며 더 많은 외부적 힘과 조건이 예술강사의 활동에 제약을 가할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그 자체로 냉철히 분석되고 비판되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그러한 제약 속에서도 예술적/사회적 가치를 성찰하고 실현하는 창의적 전략에 주목해야 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거봐라. 예산 삭감이나 민원을 핑계 삼지 마라. 할 사람은 어떻게든 다 한다.”라는 식의, 비판을 잠재우는 명분이 될 수 없다. 명심해야 한다. 정책과 현장 사이의 괴리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지성은 그러한 괴리 속에서도 상상력과 실천적 역량을 발휘하는 지성과 결국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심보선
심보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예술사회학과 문화매개를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예술가와 교류하고 대화하며 배움과 경험을 쌓아간다. 쓰고 만들고 즐기는 삶의 가치를 늘 고민한다.
bosobored@yonsei.ac.kr
3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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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남 2025년 02월 04일 at 1:23 PM

    현장의 지성에 주목하라
    구조적 한계 속에 머물지 않기 위하여
    공감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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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현 2025년 02월 04일 at 3:28 PM

    현장의 지성에 주목하라
    구조적 한계 속에 머물지 않기 위하여
    기대만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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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엠마 2025년 10월 21일 at 11:13 AM

    글이 마음에 남아서, 뭐라도 남기도 싶어 댓글을 씁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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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남 2025년 02월 04일 at 1:23 PM

    현장의 지성에 주목하라
    구조적 한계 속에 머물지 않기 위하여
    공감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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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현 2025년 02월 04일 at 3:28 PM

    현장의 지성에 주목하라
    구조적 한계 속에 머물지 않기 위하여
    기대만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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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엠마 2025년 10월 21일 at 11:13 AM

    글이 마음에 남아서, 뭐라도 남기도 싶어 댓글을 씁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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