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문화예술교육 지원법」을 통해 국가 단위의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문화예술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독일, 스웨덴, 영국, 프랑스, 핀란드 등 문화예술교육을 오래전부터 교육과정에 편성해 시행하고 있는 나라들조차 우리처럼 구체적인 국가법으로 명문화한 사례는 없다. 우리나라는 문화예술교육을 국민의 기본권리로 인식하고 관련 정책 수립과 시행에 대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장의 의무와 책임, 문화예술교육사의 신분과 처우 등을 법조문으로 명시함으로써 해외 관련 정책 입안자나 연구자, 문화예술교육 종사자들도 주목한다. 물론 제도화되었다는 것이 좋다는 뜻은 아니다. 제도에 의해 계획되고 관리 된다는 건 공공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고, 공공성은 투명성과 공평성, 안정성에 기댄 행정을 통해 펼쳐지는데, 이 과정에서는 소란스러움, 빈둥거림, 우연성, 불온함 등 문화예술교육의 기본원칙인 ‘창조력 함양’을 위한 예측 불가능한 전제들이 계획단계에서부터 제거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2000년을 얼마 앞두고 OECD 가입과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기대로 들떠있던 우리나라는 느닷없는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는 처지로 전락하면서 사회 전체가 암울해 있었다. 당시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임을 천명하면서 문화예산 1%를 확보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청소년들의 창의적 성장을 견인할 대안 교육자와 그간 주목받지 못하던 언더그라운드와 인디씬 창작자, 그리고 PC와 온라인 프로그램 개발자 및 디자이너들을 법‧제도의 영역으로 포함하면서 그들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요청했다. 이어진 노무현 정부는 문화예술 현장 기반 연구자, 기획자, 창작자들의 힘을 빌려 그로부터 20년 이상의 문화정책 지표가 될 만한 「창의한국」, 「새예술정책」을 펴냈다. 그리고 현장의 총의를 모아 2005년 「문화예술교육 지원법」이 제정되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설립된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설립으로부터 지난 20년간 학교와 사회, 유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문화예술교육은 우리 사회 다양한 분야와 전 연령에 걸쳐 전면적으로 시행되었으며, 그 성과는 실로 괄목할 만하다. 청소년 학습이라는 공동의 목적으로 음악, 문학, 미술, 전통, 디지털 등 장르와 시대를 넘나드는 융복합 활동이 활발해지고 콘텐츠 생산이 확대되었고, 암기식 교육 중심의 제도교육 또한 다양한 문화예술교육을 학습 방법으로 차용하면서 청소년들의 학습 선택지를 대폭 확장하였다. 높기만 하던 학교 담장은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마을로 열리고, 교실은 학교 밖 지역사회의 다양한 학습의 장소, 학습의 주체로 연결되었다. K팝, K클래식, K푸드, K패션, K뷰티, K드라마, K무비에 이어 문학 분야까지 한류의 열풍이 지속될 수 있는 주요한 이유 중에도 국가 수준의 체계적인 문화예술교육 지원 정책이 있다. 학교를 비롯해 지역과 사회 곳곳에서 음악, 무용, 연기 등 보편적 문화예술교육을 접하며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의 감각을 익힌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한류를 이끄는 아티스트와 창작자로 성장했고, 그들의 성장을 돕던 당시의 문화예술계 비주류 제작자와 창작자, IT 전문가들은 기획자나 디렉터, 프로듀서 또는 문화콘텐츠 기업의 수장으로 문화산업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예술교육의 성과에 가려져 있는 지난 20년간 묵은 수많은 과제도 있다.
“벼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문화예술교육의 성과를 누리는 만큼이나 그 성과를 일궈낸 이들이 앞으로도 노력을 아끼지 않을 수 있도록 예술강사 등 문화예술교육 관련 종사자들의 직업과 생활의 안정성을 최우선으로 보장해야 한다. 또한 “농부는 콩을 심을 때 세 알을 심는다”는 말도 있다. 땅속의 벌레, 지상의 동물, 그리고 인간이 함께 나눠 먹는 건강한 생태계에서 좋은 콩이 자란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문화예술교육이 활성화될 수 있는 건강한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협력적이고 실제적인 거버넌스 운영, 상호 신뢰 기반의 행정 회계 시스템 마련, 더 체계화된 지역사회 학습자원의 개발과 주체 발굴 및 연결,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접근성 향상과 생명 안전망으로서의 역할 확대, 기후위기 대응과 지능형 자동화 기술에 대한 감각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안정적인 예산의 확보와 제도 개선 및 확충이 있다. 물론 문화예술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를 비롯해 철학적 토대를 튼튼히 하고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문화예술교육 기반 공교육 대개혁과 사회 혁신 프로젝트가 가동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60만 명 이상의 직간접적 문화예술교육 종사자들을 그 변화의 주체로 초대하면서 말이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때는 뒤쪽을 바라보는 것이 도움이 되네.”
멕시코 라칸돈의 밀림에서 방향을 잃어버린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지도, 고도계, 나침반 등 자신이 아는 지식과 기술을 활용해 마을로 가는 길을 찾으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막다른 절벽 앞에 이르게 되었을 때, 함께 길을 나선 원주민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그에게 건넨 말이다.(『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 이후 앞장선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다시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던 마르코스가 길을 알고 있었으면서 왜 처음부터 앞장서 알려 주지 않았냐며 투정하자 할아버지는 말한다. “나 또한 어디에 길이 있는지 알지 못했네.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우리가 함께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뿐이었지.”
그동안 문화예술교육을 잘 알고 있고, 스스로 이끌어 왔다고 생각하는 정책 담당자들이나 관계부서, 기관이 있다면 뒤쪽을 바라보길 바란다. 그러면 함께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걸 알기에 그동안 묵묵히 문화예술교육 정책의 뒤를 지키며 따라온 문화예술교사, 대안교육활동가, 문화기획자, 기초단위 문화재단 담당자 등이 보일 것이다. 그들을 믿고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문화예술교육 정책을 수립한다면 현재의 과제를 분명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해봤고, 알고 있고, 하면 된다는 생각을 멈추고 그동안 뒤에 서 있던 이들의 뒤를 따르며, 「창의한국」이 20년의 문화정책 지침서가 되었듯, 몇 년이 걸리더라도 새로운 20년의 지침서-특히 상상력과 창조력을 방해하는 모든 행정 시스템의 개선을 담은-를 함께 써야 할 시간이다.
“우리가 지금 앓고 있는 슬픔 말고도 이런 것을 불러오는 거야, 산초.”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혁명가로서의 자신과 상상 속 자신의 대화를 담은 소설 형식의 에세이 『딱정벌레 기사 돈 두리토』에서 돈 두리토의 입을 빌려 하는 말이다. 돈 두리토는 ‘록 음악과 축제 그리고 인생’을 비유해 젊은이들이 서로 다르지만, 더 살 만한 세상에 살고 싶다는 열망으로 함께 모여 평화를 노래하는 록과 축제처럼 우리의 혁명에는, 뜨거운 사랑과 훌륭한 음악, 그리고 멋들어진 삶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새로운 20년의 문화예술교육 정책에도 이런 게 필요하다. 지원사업으로 시행되지만, 실상은 정부 주도의 안정적 정책 실행을 위한 용역사업에 불과한 수많은 공모사업에서는 다양성과 창의성은 말할 것 없고 감동과 삶의 벅참도 기대하기 어렵다. 이미 우리 현장의 감각은 소란스러워 보이지만 남녀노소 여러 세대가 어울려 모양도 빛깔도 다른 응원봉을 들고 〈임을 위한 행진곡〉과 〈다시 만난 세계〉를 한 자리에서 노래하고 스스로 춤추며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 있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단지 현장의 뒤를 따라 불확실성을 견디며 함께 길을 만들어 갈 용기를 가진 정부와 그 행정뿐이다.
- 강원재
- 서로 다르지만, 이웃으로 더불어 사는 것에 거리낌 없는 다양한 문화예술 주체들이 자유롭게 창작하고 향유하고 협력하는 건강한 문화예술 생태계가 갖춰진 문화도시 조성에 힘쓰고 있다. 하자센터, 경기문화재단, 땡땡은대학연구소, 영등포문화재단을 거쳐 현재는 노원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ganguya@nowonart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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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설립 계기와 과정에 대해 설명해 주신 글이 흥미롭고 인상적이네요. 위기인 상황임에도 선견지명국문화예술진흥원의 설립 계기와 과정에 대해 설명해 주신 글이 흥미롭고 인상적이네요. 위기인 상황임에도 선견지명을 발휘해서 현재의 예술 문화가 정착할 수 있도록 열심히 자신의 소명을 다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입니다. ^^
불확실성을 견디며 함께 길을 만들어 갈 용기! 이게 꼭 행정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만, 우선은 통찰력 있는 글이 주는 용기가 고마운 연초입니다.
강간 사건이 성폭력, 성추행이란 단어로 희석되고
이것이 정보 범죄로 새로이 재창작되는 것도
‘불확실성을 견디며 함께 길을 만들어 갈 용기’인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