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소유하지 않고 연구하기

오늘부터 그린㉚ 생태적 자연 관찰과 연구

매일 숲에 간다. 며칠 전부터 꽃피운 석산에 다가가 사진을 찍고 스케치를 한다. 꽃봉오리를 발견한 늦여름부터 늘 그래왔다. 오늘은 어제보다 꽃잎 색이 옅어졌고, 떨어진 수술도 있다. 나는 식물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식물세밀화가다. 매일 식물을 관찰하고 그림 그리는 것이 나의 일이다. 식물세밀화는 식물종의 형태적 특징, 특히 분류키를 드러내야 하는 그림이다. 식물의 형태에서 가장 중요한 부위는 생식기관이다. 꽃과 열매 그리고 씨앗. 나는 식물의 꽃이 피고 열매 맺은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그러나 요즘 내게 한 가지 어려움이 있으니, 기후변화로 인해 식물의 개화, 결실 시기가 자꾸만 예상에서 어긋나간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식물의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시기가 날짜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난 통계를 보아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보편적인 계절, 시기가 있다. 나는 이 시기의 2주 정도 전부터 식물을 보러 간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시기를 유추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흔한 칡만 해도 예년 같으면 경기 북부 우리 동네에서 8월 말에 꽃이 만발하는 걸 볼 수 있었는데, 올해는 9월이 다 지나도록 꽃이 드문드문 피어 있다. 꽃이 늦게 핀다는 것은 결실에도 차질이 있고, 수분을 돕는 작은 동물의 계획에도 차질이 생긴다는 뜻이다.
개화와 결실 시기를 유추하기 어려우니 개화, 결실의 순간을 놓치는 일도 생긴다. 그럴 때 나는 내년을 기약해야 한다. 식물을 기록하는 일은 내가 원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식물세밀화가의 계획이란 건 부질없다. 그래서 나는 올해 무엇을 그릴지 계획하기보다, 내가 죽기 전까지 어떤 종들을 그리고 싶다 희미하게 소망할 뿐이다. 물론 이 계획이 가능할지 불가능할지조차 식물에 달렸다.
  • 작가가 관찰한 식물들
    (왼쪽부터) 석산, 칡꽃, 제주상사화
식물 표본관
식물을 그리기 위해선 식물의 생체를 관찰해야 한다. 숲에서 살아 있는 모습으로 관찰을 다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해부도를 그리려면 어쩔 수 없이 식물을 채집해 가져와 현미경으로 관찰해야 한다. 나와 같은 식물세밀화가뿐만 아니라 식물을 연구하는 모든 연구자, 연구기관은 식물이 존재했다는 기록인 식물 표본을 만들기 위해 생체를 채집한다. 표본은 식물 생체를 오래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식물세밀화와는 별개 기록물이다.
내 첫 직장은 국립수목원의 표본관이었다. 표본관에는 식물뿐만 아니라 버섯, 새, 곤충 등의 생물 표본과 식물세밀화를 포함한 자연사 일러스트, 생물 관련 문헌 등 숲에 관한 모든 데이터가 소장되어 있다. 이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기록물은 표본이다.
얼마나 많은 표본을 소장하고 있는가는 세계 모든 표본관의 평가, 홍보 요소다. 다른 표본관보다 많은 표본을 갖고 있으면 ‘최대’ 표본관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대단한 성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표본이 많다는 건 연구 대상인 재료가 많다는 이야기인 동시에 그만큼 훼손한 식물이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많은 표본을 갖고 있다는 건 자랑하고 뿌듯해할 일이 아니라, 그만한 양과의 질의 연구를 해야 한다는 책무이자, 그만큼 자연을 훼손한 죄책감으로 이어져야 한다.
  • 인공완충녹지에서 자생하는 풀들의 표본과 세밀화
자연을 소유하지 않고 연구하기
생체와 표본 재료가 많을수록 식물세밀화도 더 정확하게 그릴 확률이 높아진다. 그리고 이 논리라면 좋은 기록을 만들기 위해 식물을 더 많이 채집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식물을 기록하는 것은 내 눈앞의 식물, 더 나아가 이 숲의 모든 생물이 오랫동안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므로, 내 기록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식물을 채집하는 일을 최소화해야 한다. 그렇게 나는 눈앞에 꽃 핀 제주상사화를 지나쳐야 한다.
얼마 전 동료 식물학자가 본인은 신종을 그다지 발견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새로운 종을 발견해 학명에 자신의 이름을 넣는 것이 식물학자들의 기쁨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이어 말했다.
“그냥 존재하는 그대로 두고 싶어요. 지나칠 거예요. 이름이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그곳에서 신종이 발견됐다고 하면 모두가 그곳에 찾아갈 거고, 채집해 갈 거고. 누가 논문을 발표할 건지 서로 눈치 보는 것도 보고 싶지 않고. 그냥 그런 식으로 식물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아요.”
오늘도 생각한다. 내가 하는 이 기록이 절대적이고 대단한 게 아니라는 것. 나는 완벽히 식물의 편이 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 그렇게 내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해지는 것만이 이 일의 전부인 것 같기도 하다.
이소영
이소영
식물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식물세밀화가이자 원예학 연구자. 국내외 식물학자, 식물연구기관과 협업해 식물세밀화를 그리며,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미래문화유산대학원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네이버 오디오클립 <이소영의 식물라디오>를 진행하며, 서울신문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광주일보 <우리 지역, 우리 식물>을 연재한다. 지은 책으로 『식물에 관한 오해』 『식물의 책』 『식물과 나』 『식물 산책』이 있다.
인스타그램 @soyoungli
사진제공_이소영 작가
6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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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연필 김여진 2024년 10월 08일 at 9:42 AM

    안녕하세요?
    10년 전부터 계속 아르떼365 뉴스레터를 받아오던 1인입니다.
    꼼꼼히 읽어야지- 늘 생각은 하지만, 바쁜 일상에 제목만 훑고 넘겼기 일쑤였어요.

    하지만 오늘 아침에 도착한 레터를 보고 깜짝!
    제가 너무 애정하는 이소영 작가님의 칼럼이 실린 걸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소영 작가님의 글 중에 동료 식물학자의 뼈아픈 고백이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그냥 존재하는 대로 두고 싶어요. 지나칠 거예요. (중략) 그곳에서 신종이 발견됐다고 하면 모두가 그곳에 찾아갈 거고, 채집해 갈 거고. (후략)”

    꽃을 비롯한 식물을 촬영하는 사진작가들이 아주 희귀한 식물을 어렵사리 찾아 촬영하고 나면,
    다른 사진작가가 절대로 찾지 못하도록 꺾어버린다는 얘기를 들었었어요.
    이소영 작가 및 동료작가의 그런 다짐은 저토록 저열한 식물 사진작가들과는 대척점에 있다고 느껴졌어요.

    식물을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하겠다는 사명감과, 기록을 위한 채집을 최소화하고 싶다는 두 가지 마음이 충돌하고
    그 괴로움 속에서도 지속해 나가야 한다는 것. 참 아름답다고 여깁니다.

    좋은 글을 보고 마음이 초록으로 물들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김여진 올림

    ps .이소영 작가님 글 연재로 볼 수는 없을까요? 🙂 강력하게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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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팅팅 2024년 10월 09일 at 5:31 AM

    글 잘 읽었습니다
    언젠가 (반려?)동물을 괴롭히는 사람은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들뿐이다라는 요지의 문장을 본 적이 있어요
    늘 어떻게 하면 나의 좋아하는 마음이 그들에게 이로울 수 있을지 고민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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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남 2024년 10월 10일 at 12:00 PM

    자연을 소유하지 않고 연구하기
    오늘부터 그린㉚ 생태적 자연 관찰과 연구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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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현 2024년 10월 10일 at 12:25 PM

    자연을 소유하지 않고 연구하기
    오늘부터 그린㉚ 생태적 자연 관찰과 연구
    기대만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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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훈 2024년 10월 10일 at 12:47 PM

    자연을 소유하지 않고 연구하기
    타이틀이 너무 와닿는거 같아요~
    여지껏 자연을 소유하려고만 했지, 자연이 가져다주는 장점을 몰랐던거 같아요~
    자연을 소중히하고, 기억할 수 있는 작업도 필요한거 같아요~

  • author avatar
    김희진 2024년 10월 14일 at 3:07 PM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꽃은 눈으로만 충분히 감상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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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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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연필 김여진 2024년 10월 08일 at 9:42 AM

    안녕하세요?
    10년 전부터 계속 아르떼365 뉴스레터를 받아오던 1인입니다.
    꼼꼼히 읽어야지- 늘 생각은 하지만, 바쁜 일상에 제목만 훑고 넘겼기 일쑤였어요.

    하지만 오늘 아침에 도착한 레터를 보고 깜짝!
    제가 너무 애정하는 이소영 작가님의 칼럼이 실린 걸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소영 작가님의 글 중에 동료 식물학자의 뼈아픈 고백이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그냥 존재하는 대로 두고 싶어요. 지나칠 거예요. (중략) 그곳에서 신종이 발견됐다고 하면 모두가 그곳에 찾아갈 거고, 채집해 갈 거고. (후략)”

    꽃을 비롯한 식물을 촬영하는 사진작가들이 아주 희귀한 식물을 어렵사리 찾아 촬영하고 나면,
    다른 사진작가가 절대로 찾지 못하도록 꺾어버린다는 얘기를 들었었어요.
    이소영 작가 및 동료작가의 그런 다짐은 저토록 저열한 식물 사진작가들과는 대척점에 있다고 느껴졌어요.

    식물을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하겠다는 사명감과, 기록을 위한 채집을 최소화하고 싶다는 두 가지 마음이 충돌하고
    그 괴로움 속에서도 지속해 나가야 한다는 것. 참 아름답다고 여깁니다.

    좋은 글을 보고 마음이 초록으로 물들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김여진 올림

    ps .이소영 작가님 글 연재로 볼 수는 없을까요? 🙂 강력하게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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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팅팅 2024년 10월 09일 at 5:31 AM

    글 잘 읽었습니다
    언젠가 (반려?)동물을 괴롭히는 사람은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들뿐이다라는 요지의 문장을 본 적이 있어요
    늘 어떻게 하면 나의 좋아하는 마음이 그들에게 이로울 수 있을지 고민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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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남 2024년 10월 10일 at 12:00 PM

    자연을 소유하지 않고 연구하기
    오늘부터 그린㉚ 생태적 자연 관찰과 연구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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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현 2024년 10월 10일 at 12:25 PM

    자연을 소유하지 않고 연구하기
    오늘부터 그린㉚ 생태적 자연 관찰과 연구
    기대만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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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훈 2024년 10월 10일 at 12:47 PM

    자연을 소유하지 않고 연구하기
    타이틀이 너무 와닿는거 같아요~
    여지껏 자연을 소유하려고만 했지, 자연이 가져다주는 장점을 몰랐던거 같아요~
    자연을 소중히하고, 기억할 수 있는 작업도 필요한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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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진 2024년 10월 14일 at 3:07 PM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꽃은 눈으로만 충분히 감상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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