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하고 쉴 거라고 다짐하던 그런 날이 왔음에도 이상하게 시험 기간만 되면 책상 정리를 하듯 갑자기 비워내고 정리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그러다 「2018년 아르떼365 기사모음집」을 발견했다. ‘6년이나 버티다니…’ 휘리릭 책장을 넘기니 40대 중반의 내가 어색한 미소로 인터뷰한 사진과 글이 담겨있다.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나는, 그리고 문화예술교육 현장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짝사랑에 지치고 세상에 휩쓸려도
6년 전 상기된 얼굴로 애정하는 문화예술교육을 소개하던 나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지원기관의 제재(처럼 느껴지는)에 대한 불만, 지원사업의 틀 안에서 단체 간의 네트워크 없는 경쟁 구도, 고인물로 더는 기웃거리기에 민망한 지역의 좁은 문화예술교육 신(scene) 등 여러 이유로 짝사랑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외부적인 요인보다 급변하는 시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우리가 발 딛고 만나온 현장이라는 공간, 장소성이 온라인으로 확장되고 많은 것이 가능해짐과 동시에 그간의 정서적 교류를 어떻게 연장할지 어렵고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엔데믹 이후 다시 돌아간 일상은 이전의 삶과는 달랐다. 완전히 달라진 세상에 휩쓸리고는 있으나 겨우 지푸라기를 잡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에서도 그 두려움을 헤쳐나갈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 기존의 나열식 프로그램을 답습하고, 참여자의 다양한 욕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문화예술교육은 새로운 참여자를 끌어들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기존의 충성 고객을 겨우 유지하며 근근이 버티는 모양새였다. 급변화하는 시대에 준비되지 못한 나는 “라떼는 말이야”를 외치며 꼰대가 돼가고 있었다.
다행히도 두려움과 부족함을 인정하니 가능성이 열렸다. 견고했던 벽에 금이 가는 순간 조금씩 흘러들어오는 맑은 물이 고인물을 희석해준 것이다. 오랜 현장경험은 ‘노하우’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시도를 주저했고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적 존재로 바라보기보다는 ‘대체로 그러하더라’라며 재단했다. 예술의 속성을 발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장르 중심의 표현 방식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았는지도 돌아봐야 할 시점이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삶에 관한 관심 이전에 내 삶에 대한 사유가 충분했는지도 스스로에 물었다. 마지막으로 그 길에 함께 있는 혹은 있었던 동료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그렇게 두려움을 세상 탓, 제도와 구조 탓으로 돌리기에 급급했던 나는 겨우 그 이전에 나와 문화예술 생태계는 안녕한지 묻게 된 것이다.
비단 나에게만 해당하진 않을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많은 이웃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고인물을 희석할 맑은 물을 찾아 나섰다. 낯선 물음과 만남을 토대로 한 지원사업, 시대 변화에 따른 가족구조를 만난 기회가 된 연구 프로젝트,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으로 만난 예술가들과의 협업 그리고 열권째 쓰고 있는 드로잉 에세이 까지 지난 6년의 세월은 두려움을 통해 발견한 가능성으로 다시 애정하는 마음을 찾아가는 기회가 되었다. 그간의 경험을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나와 우리에게 공유해본다. 두려움을 숨기지 않기(15년 이상 해온 일이 여전히 어렵다고 인정할 수 있는 용기), 낯선 이들과 협업하며 유연성을 잃지 않기, 세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도록 나의 세계관 구축하기, 마지막으로 자연 속에서 모든 생명과 함께 감응하기(자연보다 우리를 충만하고 창조적으로 이끌어줄 것이 있을까). 나와 우리의 성장이 곧 문화예술교육 생태계의 뿌리를 건강하게 하는 일이기에 함께 실천해 보기를 제안한다.
서로 의지하고 어우러질 때
뿌리만 튼튼하다고 모든 생명이 건강하게 자랄 수는 없다. 바람과 햇빛, 적당한 습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런 외부적인 환경요인으로 문화예술교육 생태계의 한 축을 이루는 지원기관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사업을 심사하고 선정한 뒤 보조금을 교부하고 정산 서류를 검토하는 역할 외에 한두 차례의 현장 방문, 성과 공유회 때 잠시 만남 정도의 교류가 전부인 것은 아니었나 싶다. 우리는 서로 적은 예산으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지 혹은 각각의 예산을 줄여서라도 기존의 사업들을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눈 적이 없다. 지원기관이 결정하면 예술단체는 따를 수밖에 없는 위치다. 언제쯤 수평적 논의구조 안에서 함께 생태계를 조성하고 만들어 간다는 연대 의식이 생길까? 지원하는 예술단체의 수준과 장르와 체험 중심의 프로그램, 모집이 어렵다는 단체의 하소연, 참여자들의 외면을 언제까지 단체의 역량 문제로만 지켜볼 것인가?
서로에 대한 신뢰 속에서 적극적이며 우호적인 개입과 논의구조가 필요하다. 기존의 사업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판(장)을 만들고 사람을 연결하고 새로운 상상과 실험을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적절한 보상과 동기부여, 단계설정이 필요하다. 여러 개의 레이어가 쌓여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처럼 지원기관과 예술단체가 함께 어우러져야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적당한 햇빛과 물, 바람 같은 외부 자극이 있어야 비로소 튼튼한 뿌리를 기반으로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근래 비인간 생명을 기록하는 일을 하던 중 사람들이 지정한 보호수들을 유심히 볼 기회가 있었다. 울타리에 둘러싸여 홀로 유유히 자라는 나무는 어느새 너무 거대해져 인공적인 지지대에 의지해서 겨우 버티고 있는 것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왜 그럴까? 서로를 의지하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공생하는 자연이 아닌 도심 한복판에서 홀로 자라고 있기 때문은 아닐지 짐작해 보곤 했다. 문화예술교육의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어린나무와 장성한 나무가 어우러져 건강한 숲을 이룰 때 다양한 생명이 찾아 드는 것처럼 동반성장을 통한 균일한 수준과 다양성이 확보되어야 더 많은 이들이 문화예술교육을 찾게 되지 않을까? 문화예술교육 1세대가 개인의 역량으로 생태계의 기초를 다졌다면, 이제는 함께 머리를 맞대고 견고히 할 시점이다. 그러기 위해 더 자주 만나 서로의 마음을 연결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촘촘해져야 하고 그곳으로 분주한 발걸음들이 모여들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작년에 지역에서 오래 활동한 문화예술교육단체들이 광주문화재단과 함께 네트워크 워크숍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뜨끈한 목욕탕의 정서를 담아 제목도 <다정한 목욕탕>. 처음이라 서로 손발 척척은 아니었지만, 물꼬를 튼 것에 의미가 있다.
  • 창의랩 ‘다른 생명체의 시선으로 도시보기’
일상 곳곳에서 더 생생하게
문턱이 높다, 어렵다, 예술은 ‘원래 그렇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유아기 가장 먼저 손에 쥔 무언가로 낙서하며 즐거움을 맛보게 했던 것이 예술이라면 문화예술교육은 그 첫 마음을 다시 일어나게 하는 방법을 고민하자는 것이다. 낮은 문턱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문화예술교육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특별한 공감 능력, 세상에 없는 창의적이고 기발한 생각은 없었다. 애정의 깊이와 비례한 시간과 노력이 있어야 나와 우리의 삶의 전환을 끌어낼 수 있다. 전환의 시대 갈 길을 잃은 사람들과 함께 길을 모색하고 더 나은 각자 삶의 자리를 찾아가도록 안내할 수 있어야 다시 생태계는 생생해질 수 있을 것이다.
보릿고개다. 우리는 늘 이 시기를 그렇게 불렀다. 다음 주에는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특별히 예전보다 살림이 나아져서가 아니라 마음이 달라져서다. 보릿고개지만 우리에겐 시간이라는 곳간이 채워져 있지 않은가. 멀리 떠나지 않더라도 일상 곳곳에 숨겨진 보물들을 찾아내고 감응하며 인간, 비인간 이웃들의 삶을 깊게 바라봐야 한다. 우리가 문화예술교육으로 함께 할 가장 소중한 것들은 아주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김옥진
김옥진
마을에서 예술로 평상을 만들고 예술의 언어로 세상을 만나고 기록하는 일을 한다. 최근에는 생태 리서치 전시기획을 하며 비인간의 세상에 다가가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중이다.
ojlovely123@hanmail.net
사진제공_김옥진 마음놀이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