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곧 노래요, 문화예술이 곧 일상이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벨 칸토(bel canto) 창법의 대가이자 서울시립오페라단 초대 단장, 전 세종문화회관 대표이사 사장, 전 영남대학교 음악대학장을 역임한 김신환 회장은 한국 오페라 발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국가대표급 성악가다. 최근 자신의 이름을 건 ‘김신환 국제성악콩쿠르’ 조직위원회를 설립한 김신환 회장은 내년 10월 출범을 목표로 분주한 날을 보내고 있다.

김신환 회장은 원래 생물학도였다. 문교부(현 교육인적자원부) 차관, 홍익대학교 총장, 건국대학교 축산대학장을 지낸 아버지 김호직 박사는 김 회장이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랐다. 이에 김 회장은 서울대 문리대 생물학과에 입학했고, 파리 소르본느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과학도도 문화적 감성을 가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교육관에 따라 해방이 되던 14살 때부터 파리에 오기 전까지 성악 개인교습을 받았다. 음악학도도 아닌 김 회장은 경기고등학교 시절에도, 서울대학교를 다닐 때도 독창회 무대에 올랐고, 군대시절 역시 육군군악학교에서 육군교향악단 생활을 하며 음악과 함께 했다.

 

파리 음악계를 놀라게 한 한국의 생물학도, 김신환

 

 평생을 언제 어디서나 음악과 함께였던 김 회장은 파리에서 생물학을 공부하면서도 성악 레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던 1957년, 스승인 파리국립고등음악원 샤르 판제라 교수의 제안으로 전공자도 아닌, 생물학도가 파리예술콩쿠르에 참가해 1등을 차지했다. 한국인 최초의 유럽국제 콩쿠르 입상이었다. 그 이후로 UFAM 국제음악콩쿠르 성악부 1등, 프랑스예술가곡해석 국제콩쿠르 2위 등 대여섯 개의 국제 콩쿠르를 석권했다. 결국, 1958년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 입학하면서 온전한 음악인의 길로 들어섰다.

 

프랑스에서 10년, 이탈리아에서 20년 동안 성악가로 살면서 김 회장은 이탈리아 아르깐제로 꼬렐리 금상, 안제로 마리아니 금상, 이탈리아 베르디 금상 수상 등 성악가로서의 영예를 한껏 누렸다. 이후로도 이탈리아 마스까니 금상을 비롯해 금년의 온정상, 빤빠니니 문화상 등을 수상하며 전세계를 아우르는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김신환’이라는 이름 앞에는 한국인 최초의 유럽 국제 콩쿠르 수상자, 전세계 성악가들의 꿈의 무대인 라 스칼라 극장 사상 최초의 동양인 솔리스트, 이탈리아 벨 칸토(bel canto, 18세기에 확립된 이탈리아의 가창기법. 최대한 아름답게 소리를 정화시켜 노래) 창법의 대가라는 수식어들이 따라붙었다.

 

첫 스승을 모시던 1945년부터 78세가 된 2009년 현재까지 열정적이고 아름답게 노래하는 김신환 회장에게 이어령 전 장관은 “시간의 흐름도 그의 아름다운 노래를 빼앗지 못했다. 공간의 벽도 그의 사랑을 막지 못했다. 그는 분명 시간과 공간을 정복한 승리자”라고 찬양했고 음악평론가 탁계석 씨는 “예술을 노래하는 영원한 현역”이라고 극찬했다.

 

“제가 지금 지치지 않고 노래할 수 있는 건 이탈리아 유학시절, 시를 읊고 노래하는 시 음악을 위해 생리학적인 호흡과 근육 사용법 등을 익혔기 때문이에요. 원래의 전공인 생물학이 음악을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셈이죠. 어떤 공부를 하든, 어떤 일을 하든 예술적 감성을 지니도록 노력하고 훈련해야하는 이유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 예술적 감성을 지녀야

 

30년 동안 유럽에서 노래하고 추앙받던 김 회장이 조국인 한국행을 결심한 이유는 생활 속의 예술교육을 정착시키고 아름다운 한국의 가곡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다.한국의 교육, 문화, 사회를 겪으며 김 회장이 느낀 것은 바로 교육제도의 문제점이었다. 대학 입시만을 위한 한국의 교육제도는 아이들에게 문화와 예술을 접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김 회장이 교수로 재직했던 영남대학교에서 느낀 음악교육의 현실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였다. 1학년의 실기수업은 일주일에 30분, 2, 3학년은 40분, 4학년도 50분에 불과해 음악대학이라고 칭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유럽은 교육의 중심에 문화예술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문화예술을 접하고 체험하면서 일상 그 자체가 되죠. 파리국립고등음악원은 일주일에 실기 12시간, 음악이론 12시간을 훈련합니다.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오직 음악뿐이죠. 이같은 사회 분위기와 피나는 훈련 속에서 알프레도 코르토, 로베르 카사드쉬, 마리아 칼라스 등의 세계적인 음악가가 탄생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한 김 회장은 이제부터라도 아이들이 쉽게 문화예술을 접할 수 있는 교육 및 지원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것이 글로벌 시대에 국가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예술가곡세계화 운동본부 총재, 한국예술가곡진흥위원회 공동대표, 한국 오페라진흥회 회장, 국제민속예술연맹 한국본부 총재 등을 겸임하고 있는 김 회장은 지난 6월30일, 자신의 이름을 건 ‘김신환 국제성악콩쿠르’ 조직위원회를 발족했다. 30년 동안,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이탈리아 베르디 콩쿠르, 멜리니 국제 콩쿠르 등 수많은 심사를 해왔지만 자신이 평가받는 콩쿠르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성악 콩쿠르를 만드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김신환’이라는 이름을 내거는 것은 제 원칙에서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할 일이 끝났거나 세상을 떠난 후에야 사람들이 신임과 평가를 담아 콩쿠르를 발족하는 게 옳다고 믿었으니까요. 저는 아직도 할 일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그의 이름 석 자를 내거는 것을 극구 사양하던 그를 설득한 것은 “한국의 노래와 오페라를 국제화하기 위한 일”이라는 말이었다. 국제적으로 콩쿠르를 알리기 위해 세계에 잘 알려진 상징적인 사람이 필요하다는 조직위원들의 말에 자신의 원칙을 접은 것이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의 가곡은 많은 연구가 이뤄졌지만 한국 가곡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피시 합니다. 1차 서류 심사 후 치러질 심사부터는 한국 가곡을 지정과제로 주고, 그 곡에 대한 스스로의 해석과 감성을 담아 노래한 것을 심사할 예정입니다.”

 

이같은 심사방식을 택함으로서 ‘김신환 국제성악콩쿠르’는 한국 가곡 연구의 모티브가 되고 한국 가곡 세계화의 지름길이 될 것이라는 전언이다.

 

“노래는 삶이에요. 삶 자체를 승화시킨 것이 노래죠. 노래도, 삶도 수많은 고난과 수양을 거치지 않고는 이뤄낼 수 없거든요. 얼마나 노력하고 수양하는지에 따라 삶과 노래의 질이 달라집니다. 고난과 수양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스쳐가는 기쁨과 환희, 슬픔과 절망을 승화시킨 결과물이 바로 노래죠.”

 

다이어리의 한 페이지가 부족해 색깔별로 표시해두지 않으면 도무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바쁜 날을 보내고 있는 78세의 김신환 회장은 노래함으로써 행복하고 활력이 넘친다.

한국전쟁 때 의용군으로 징용됐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영장이었다. 육군 보충부대로 가기 위한 행렬에서 김신환 회장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개인교습을 하고는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음악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다룰 수 있는 악기라고는 피아노, 그것도 매우 초보적인 수준일 때였다.

 

“이 중에서 음악을 전공한 사람 혹은 악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한 발짝 비껴 서세요.” 짧은 순간 김 회장의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결국 발을 내딛었다. 남산 아래 한옥에서 오디션이 치러졌다. 안병서, 김동진, 김순열 등 현대 한국음악의 거장들 앞에서 그가 부른 노래는 슈베르트의 ‘홍수’였다. 슈베르트 <겨울나그네>의 제6곡 ‘홍수’는 실연한 젊은이의 눈물이 눈을 녹이고 큰 강물이 돼 연인의 집까지 흘러간다는 애절한 사랑노래다. 독일에서 유학했던 안병서 선생을 감동시킨 그는 육군교향악단을 만들기 위한 육군군악학교의 일원이 됐다. 식사시간을 뺀 모든 시간은 연습에 몰두했고, 어느 대학에서도 받을 수 없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김신환 회장의 인생의 전환점이자 지금까지도 열정적으로 노래할 수 있게 한 노래인생의 든든한 버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