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판 베토벤 바이러스를 꿈꾸다





서울 중랑구 상봉1동 영구임대아파트 12단지 행복프로젝트 ‘안녕하세요?’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주최하고 중랑연극협회와 극단 어우름이 공동 주관하는 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시범사업 11개 참가지역 중 하나인 중랑구에서 진행중인 공연 프로젝트다. 지난 6월13일 발대식을 가진 이 프로젝트는 지역 구전설화를 각색한 <효녀 중랑>을 11월7일 중랑구청 대강당 무대에 올린다. <효녀 중랑>은 병석에 있는 맹인 아버지 대신 남장을 하고 부역에 참가한 중낭자(仲郎子) 분이의 이야기다. 이 연극에는 인형극과 사물놀이, 악극 ‘불효자는 웁니다’ 등 다양한 장르의 놀이문화가 등장한다. 주민이 직접 출연하는 연극판 베토벤 바이러스 ‘안녕하세요?’ 프로젝트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을 통해 주민 스스로가 기획, 출연, 공연까지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 주민들은 화·수·목·토·일요일, 일주일에 5일을 안무, 연기지도, 보컬, 풍물, 인형극, 연극종합 등으로 나누어 연습에 한창이다. 벌써부터 연극과 인형극 동아리 만들기 계획을 세우고 있는 12단지 주민들이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연기하는 <효녀 중랑> 연습현장을 공개한다.S# 1. 1:00 PM, 중랑구청 2층 대회의실시계바늘이 1시에 가까워지자 상봉1동 12단지 주민들의 공연 연습장소인 중랑구청 2층 대회의실에 분이 역의 정연화 양(17세), 분이 아버지 중이 역의 김영곤 씨(51세), 사또 최상윤 할머니(75세), 이방 김미숙 아주머니(55세), 저승사자 승현(16세)이네 가족 등 주요배역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한다.“안녕하세요?” 여기저기서 인사가 터진다. 거의 매일 모이다시피하는 데도 늘 설렌다. 지금까지 대본읽기 연습만 몰두하다가 드디어 오늘, 처음으로 동선을 익히는 날이다. 연출을 맡은 중랑연극협회의 경상현 회장이 미리 바닥에 검정 테이프로 표시해둔 무대가 있다. “여기가 무대예요. 절대 밟고 다니면 안되고 막이 오르기 전에는 그 위로 올라가도 안돼요. 여기가 사또가 앉는 데고 저기가 들어오는 문이에요.” 금방 주의를 줬는데도 사또 역의 최상윤 할머니도, 저승사자 1, 3을 맡은 철현(11세)·소현(9세) 남매도, 이들을 만류하려는 엄마이자 저승사자 대장 김애연 씨(43세)도, 무대 위에서 분주하다. 경 회장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여기는 무대라니까. 왜 거길 올라가 계시는거야 지금? 막도 안올랐는데….” 배우에게 무대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인지시키는 경 회장의 말에 자못 진지해진 배우들, “대사는 숨을 들이마시고 뱉어내면서…”라는 경 회장의 당부로 동선 연습이 시작된다.S# 2. 2:30 PM, 제3장 관아 동선연습“포졸들은 이쪽에서 분이를 끌고 들어오고 분이는 여기서 무릎을 꿇어요. 사또랑 이방은 여기 앉고 서 있다가 장면 끝나면 저쪽으로 나가는 거예요.”대본읽기 연습 후 사또 앞에 끌려온 분이가 아버지 대신 부역에 나가겠다는 약조를 하는 3장의 동선을 맞추고 있다. 분이 역의 연화가 자신의 어머니이자 포졸3 역을 맡은 김순희 씨(45세)에 끌려 들러올 때, 예술감독인 극단 어우름의 정혜승 대표가 연습실을 찾았다. 극단 어우름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배우로 나서 사랑의 문화나눔 예술공연을 실천하고 있다. 안데르센 동화 중 <미운오리새끼>를 각색한 <오리날자! 덩기둥땅!> 순회공연으로 눈코뜰 새없이 바쁜 일정임에도 정 대표가 연습실을 찾은 이유는 사기 진작을 위해서다. “분이 잡아오는 포졸 분은 처음 뵙는다”는 정 대표의 말에 “연화 어머니신데 고민하시다 따님 설득으로 처음 참가하셨다”는 경 회장의 귀띔이 이어진다. 근엄한 사또와 익살스럽고 맛깔스럽게 대사를 소화하는 이방의 연기에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어쩜~ 어디서 이렇게 꼭 맞는 사또랑 이방을 캐스팅했어? 어머니들 너무 잘하네.” 진심어린 정 대표의 칭찬에 최상윤 할머니가 “내가 사또 역 안 뺏기려고 얼마나 죽기 살기로 연습했는데요”라고 호탕하게 웃는다. 시원시원한 웃음과 자신감이 영락없는 사또다.S# 3. 4:30 PM. “꼭 한번 맞춰보고 가고 싶은데…”한 장의 동선연습이 끝나고 잠깐의 쉬는 시간, 경상현 회장에게 조심스레 다가서는 할머니가 있다. 연극 속 악극에서 춘천댁을 맡은 정영애 씨(69세)다. “꼭 한번 맞춰보고 가고 싶은데…”로 입을 뗀 할머니의 사연인즉슨 이랬다.집안 일로 4시45분에는 연습실에서 나서야하는데 자신 분량의 대사와 동선을 한번 맞춰보고 가고 싶다는 것이다. 내일도 연습을 할 수 있음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며 정중하게 부탁한다. 연습 초기만 해도 배우들은 연습시간에 연락도 없이 늦거나 아예 안 나타나 애를 태우곤 했다. 그러던 그들이 요즘은 쉬는 시간에도 대사나 연기지도를 해달라기 일쑤다. “아이고~ 이제는 쉬는 시간에도 연습을 하자시네?” 푸념이라기엔 너무 기쁜 억양에서 은근히 자랑하고픈 마음이 느껴진다. 연습실로 향하는 경상현 회장의 입가로 흐뭇한 미소가 걸린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완성되는 연극에서, 자신의 부재가 얼마나 남에게 폐를 끼치는가를 깨달으며 배려를 배우고 연극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그들이다.S# 4. 7:00 PM. 제1장 인형극 연습주인공 분이의 아버지 중이와 어머니 소화의 사연은 제1장에서 인형극으로 전달된다. 두 달여에 걸쳐 제작된 인형이 등장하고 중이, 소화, 나비, 의무관 역을 담당하고 있는 이하림(53세)·이은복(53세)·김금수(49세)·김정수(57세) 씨에게 연습이 집중된다. “이번에 제작한 인형과 틀을 기증해주신다고 하니까 조금 더 배워서 복지관이나 어린이집 등에서 봉사하고 싶어요”인형극의 ‘중이’이자, 악극의 변사인 이하림 씨는 이번 연극 참여를 계기로 현재 추진 중인 연극과 인형극 동아리에 기여하기 위해 연출·극작·연기·인형제작을 공부중이다. 한쪽에서는 숨쉬기에 신경쓰며 대본읽기가 한창이다. 인형극과 사물놀이 위주로 연습하는 목요일에도 대부분의 배우들이 연습실을 찾는다. 이구동성으로 대본을 읽더라도 연습실에 있고 싶기 때문이란다. 출연진과 배우들을 뽑기 위해 뙤약볕에 8개 동을 가가호호 방문하고 사업설명회도 하고, 단지 내 방송 및 공고를 해 뽑은 9~75세에 이르는 17명의 배우들은 연기는 물론 연극 관람 경험도 전무한 이들이 80% 이상이었다. 불과 두 달 전만해도 생계, 집안일 등으로 연습을 빠지고,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에 출연을 꺼리던 이들은 현재, 공연에 대한 책임감과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쳐있다.S# End…And…. 10:00 PM 아쉬움을 뒤로어느새 시간은 밤 10시가 훌떡 지나 사위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가을이 오려는지 꽤 서늘한 밤공기임에도 연습실 안은 열기로 가득하다. 연습에 임하는 주민들도, 이들을 이끄는 경 회장도, 이들을 격려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정 대표도 땀범벅이다.“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안녕하세요? 상봉동 12단지 파이팅!” 연습이 끝날 때면 외치는 구호로 스스로에게, 그리고 함께 고생한 동료들에게 감사와 격려의 마음을 전한다. “공연 때까지 감기 걸리지 마시고 건강관리 잘 하셔야 해요.” 매번 전해지는 경 회장의 당부로 하루가 마무리된다. 달뜬 얼굴의 세 남매가 엄마의 팔에 매달린 저승자사들, 자신을 잡아가는 포졸 역할의 엄마 손을 꼭 잡은 분이, 연습상대가 돼줄 딸이 기다리고 있어 마음이 급한 중이, 호탕하고 익살맞은 웃음의 사또와 이방…. 그들은 잠시 자신들의 역할을 내려놓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어제보다 좀 더 커진 연극에 대한 열정과 주변인들에 대한 배려를 다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