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과 영화를 보러 갔을 때, 상대방을 배려하다 결국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은 영화를 보게 된 적이 있나요?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사회학자 니클라스는 상대방의 내면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현대인들의 사랑을 더욱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오늘은 사랑 속에 감추어진 소통에 대해 김남시 문화예술이론가와 함께 생각해봅니다.

 

어느 시대나 사랑이 있었다고 해서 늘 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했던 것은 아니다. 시대마다 서로 다른 도덕과 관습이 지배했으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던 소통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신분과 계층 등 눈에 보이는 사회적 기호가 중심에 놓여있던 사회에서 소통은 위계적 규칙에 의해 지배되었다. 기사가 백작 부인을, 농노가 영주를, 평민이 귀족을 대할 때 어떤 제스쳐와 말을 건네야하는지, 어떤 행동과 말은 허용되고, 어떤 건 안 되는지가 엄밀하게 정식화되어 있었다. 사랑과 결혼 또한 당사자들의 선호와는 무관하게 신분과 지위를 고려해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맺음이었다.

 

18세기 말, 이전의 신분적 질서가 붕괴하고 개인들의 내면, 교육과 교양수준이 더 중요한 가치로 부상되면서 새로운 소통 규칙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신분만으로 존중을 받던 시대에서, 개인 스스로 신체적, 정신적 매력과 교양을 갖추어야 호감을 얻을 수 있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그에 따라 소통은 상대의 개인적 취향과 선호, 그의 가치관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는 사랑이라는 소통에도 큰 변화를 낳았다. 사회적 신분이나 규칙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사적 감정에 근거하는 “낭만적 사랑”의 이상이 사랑 소통의 중심이 되고, 사랑과 결혼은 내면 세계를 공감하는 두 사람의 개인적 관계맺음이 된 것이다.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 Love as passion>

이런 사랑-소통은 상대의 보이지 않는 내면의 이해를 요구한다. 나의 애인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상태에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내 감정을 배려하지 않고 행동한다면, 난 그가 이기적이며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상대와의 관계를 지속하려면, 우리는 상대가 어떤 음식을 좋아할지, 무슨 선물을 받고 싶을지, 어떤 영화를 선호할지 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에 따르면, 내면의 공유를 이상으로 삼는 이러한 사랑의 의미론은 그만큼 현대인의 사랑을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었다. 왜 그럴까?

 

이전에 비해 약해지긴 했지만, 특정 상황에서 어르신이나 직장 상사, 선생님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합의된 규칙들이 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소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상대에 대한 자신의 행동방식을 결정할 때 의거할 수 있는 유일한 준거는, 그때 그때 상대의 내면 상태가 어떨지에 대한 추측 뿐이다. 그를 감지하지 못하거나 잘못 추측하면 우리는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된다. 사회적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 우리의 사회성에 대한 비난을 초래한다면, 사랑 소통의 실패는 우리의 인성에 대한 심대한 타격이 된다.

 

이런 실패를 막기 위해 상대의 내면 상태를 직접 소통의 주제로 삼으려 할 경우 – “너가 원하는 게 뭐니?” – 우리는 낭만적 사랑의 의미론을 대변하는 유명한 공식과 마주치게 된다. “난 네가 원하는 것을 원해!”가 그것이다. 이 공식은, 상대의 욕구는 고려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 표명하는 이기적 파트너를 원하지 않는 오늘날 사랑 소통의 소산물이다. 곤혹스러운 사실은, 자신보다 상대를 먼저 배려하려는 이 공식이 현실에서는 엉뚱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서로를 향해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원해”라고 말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선택은 종종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쪽으로 이어진다. 서로의 취향을 배려하다 그 누구도 원치 않는 영화를 봐야 하는 연인들이 적지 않은 이유다.

 

낭만적 사랑의 의미론은 서로에 대한 사랑 말고는 어떤 의례도, 규칙도 필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남자/여자의 속마음 아는 법’, ‘애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등을 알려준다는 연애지침서들이 꾸준히 팔리는 것을 보면, 사랑은 여전히 어렵고 복잡한 소통이라는 걸 알겠다.

 


김남시 문화예술이론가

글쓴이_ 김남시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훔볼트 대학 문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에서 미학과 문화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예술과 문화적 현상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감성을 통한 세계 인식이라는 미학 Aesthetics 본래의 지향을 추구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권력이란무엇인가』,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 『노동을 거부하라』,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등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