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 아트를 주류 예술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예술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고, 특정한 미술 사상에 포함되지 않는 예술이라 하는 사람도 있고, 기성 예술의 틀에서 벗어나 있는 예술이라 하는 사람도 있다. 아웃사이더 아트라는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1972년, 영국의 미술사가 로저 카디널(Roger Cardinal, 1940-2019)은 장 뒤뷔페(Jean Dubuffet, 1901-1985)가 만든 용어 ‘아르 브뤼(Art Brut)’를 ‘아웃사이더 아트(Outsider Art)’로 영역했다. 장 뒤뷔페는 사회에서 고립된 독학 예술가들의 낯선 예술을 찾아다녔다. 인류학자를 자처한 예술가는 사실 장 뒤뷔페만이 아니었다. 한동안 서구 모더니스트들 사이에서는 독학 예술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는 붐이 일었다. 1920년대 초 정신의학자들은 자신의 수집품 위주로 연구하고 서적을 발간했다. 그중에서도 한스 프린츠혼(Hans Prinzhorn, 1886-1933)이 쓴 『정신질환자들의 조형작업(Bildnerei der Geisteskranken)』(1922)은 예술가들에게 결정적인 영감의 원천이 되었고 초현실주의의 성경으로 회자되기도 했다.(Carine Fol, 2015) 독학 예술의 모방은 장내에서 허용되었으며(Charles Wentinck, 1974) 예술가들은 거리낌이 없었다.
아웃사이더 아트라는 말이 생겨난 때는 정신적 장애를 가진 예술가가 사회에서 낯설게 여겨지던 때다. 무의식과 잠재의식, 원시주의와 순진함, 직관과 도취라는 환상에 빠진 예술가들은 트랜스 상태에서의 작업을 추구하기도 했다. 당시 예술가들의 생각처럼 과연 독학 예술가들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광기의 힘으로 작업했던 것일까. 시대는 변했다. 아직 부족해도 사회가 장애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정신의학과의 진료가 보편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부러 학문과 거리를 두는 것은 어느 예술가나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아닌가. 아웃사이더 아트라는 말을 만든 로저 카디널 조차 1979년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아웃사이더: 선례나 전통이 없는 예술》의 카탈로그에 ‘아웃사이더 아트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개성의 함양만 있을 뿐’이라 적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웃사이더 아트’는 국제사회에서 하나의 미술 사조처럼 존재한다. 장애를 가진 작가와 밀접하게 관계하고 작가를 충분히 관찰할 수 있는 여유가 없기 때문에 편의에 의해서 널리 쓰이고 있다. 말이 생겨나고 70여 년이 지난 지금 사람의 특성으로 예술을 구분 짓는 환상에 빠질 필요가 있을까. 특수한 예술로 구분 짓지 않아도 작가들의 작품은 잃을 것이 없다. 자신의 세계관을 시각적으로 전달하고 동료들에게 영감을 주는 군더더기 없는 보편적 예술이기 때문이다. 관성에 의해 쓰이는 아웃사이더 아트라는 용어는 이제 그만 소환할 때가 되었다.
사람은 모두 창작을 할 수 있다. 다만 많은 사람의 기여를 끌어내 기록되는 예술이 되려면 예술계가 인정해야 한다.(George Dickie, 1969) 사람들이 가진 예술의 관념은 저마다 다르고 기준도 다르다. 정신적 장애가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예술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작가들에게 작업에 대한 사회적 인정욕구가 없다고 단정 짓는 경우도 있다. 장애를 동반한 예술에 굳이 관대할 필요는 없다. 다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자. 작가에게 창작이란 과연 혼자만의 것일까. 사회적 맥락에서 장애라는 관념은 그 벽이 너무도 견고해 예술마저도 장애의 맥락으로 수렴시키고 만다. 하지만 세상과 무관하게 작가들의 세계관은 건재하고, 작품은 지금도 계속 축적되고 있다. 직관적인 작품과 관학적인 작품을 대항의 관계에 둘 필요도 없다. 사람들의 세계관은 저마다 다르고 작품은 삶의 과정에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예술 언어와 표현방식이 예술의 범주에서 거론될 수 있는 넓은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대야미스튜디오의 고주형(1994-)은 오랫동안 세잔과 피카소의 그림을 기호화해 반복적으로 그렸다. 본격적으로 작업을 지지할 생각이었던 작가의 어머니는 큰 가방 두 개를 그림으로 가득 채워 스튜디오를 찾았다. “집에 이런 그림이 셀 수 없이 많다.”라며 가방을 푸는데 여러 장의 같은 그림이 줄지어 나왔다.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는 행위에 몰두했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였다. 간단명료한 드로잉, 자유로운 채색, 흥미로운 작업의 레퍼런스는 그를 스튜디오로 영입할 근거로서 충분했다. 스튜디오 초기에 고주형은 그의 머릿속에 각인된 세잔의 ‘생 빅투아르산’이나 ‘사과’ 연작 또는 피카소의 여러 초상화를 즐겨 그렸다. 몇 개의 선으로 요약된 형태와 화면을 채우는 몇 가지의 색이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다. 최근에 고주형은 헨리 다저(Henry Darger, 1892-1973)의 작품 이미지에서 일정 부분을 잘라내어 반복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잘라낸 이미지가 같을 때도 있고 약간 겹칠 때도 있으며 전혀 다른 부분일 때도 있다. 중첩되는 그의 선택적 이미지를 연달아 보고 있으면 잘린 부분 때문에 신비롭기도 하고 유머러스하기도 하다.
고주형의 작품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게 된 시점은 서찬석 작가와 함께 한 시각예술워크숍 이후다. 서찬석은 탐색 과정에서 작가들에게 일상에서 받는 지시, 경고, 위협 등이 체화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체화된 경직이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고 느낀 서찬석은 ‘오감 확장’이라는 주제를 세우고 워크숍 내내 경쾌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작가들을 격려했다. 워크숍은 작가에게서 다양한 움직임과 관찰을 유도해냈고 낯설어하던 작가들의 움직임에도 자신감이 붙었다. 보호작업장에서 빵 만드는 일을 했던 고주형이 스튜디오에 처음 왔을 때에는 그림 그리는 것을 일이라 여긴 것 같다. 그림을 다 그리면 내게 와서 다 그렸다는 확인을 받아야 안심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스튜디오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을 주기는 쉽지 않았다. 가벼운 스킨십에도 쉽게 놀라고 경직된 상태로 걷던 작가는 워크숍 이후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달라고 요구하기도 하고 노래가 나오면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도 했다. 전략적으로 타인의 환심을 사는 것에는 둔감해도 작가들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동료를 필요로 하고 창작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지지하는 이와 함께 하기를 원한다. 배우고 싶거나 열망하는 무엇이 있어도 그것이 뭔지 모르겠거나 누군가에게 물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떠한가? 정신적 장애가 있는 작가의 동료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는 동료의 열정과 한계에 대해 쉽게 정의하지 않는 것이다. 만나보지 않아서, 함께 해보지 못해서 어려울 것은 없다. 낯섦을 맞닥뜨리는 순간 생각하는 거다. ‘나라면?’
- 이지혜
- 작가와 소규모 전시공간을 사랑하는 독립큐레이터다. 2016년부터 정신적 장애를 가진 작가들과 활동했으며 2019년에는 사단법인 로아트 설립을 주도했다. 문화매개를 공부하며 보다 자유로운 예술 행위를 위한 실천 방법론을 연구 중이다. 플레이스막 큐레이터, 사단법인 로아트 기획팀장으로 일했으며, 현재 경희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depth1212@gmail.com
사진_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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