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전쟁_건축가 구승회①

겨울이 물러나고 있다. 여전히 추운 기운은 입김이 나게 하지만 조금씩 봄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겨울이 끝나가는 것은 그림자의 길이가 조금씩 짧아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도시 안의 높은 빌딩들 사이에 있다 보면 이런 그림자의 길이는 눈에 띄게 느껴진다. 햇살이 닿지 않던 곳에 어느 날 갑자기 반가운 따스함이 손을 뻗치기 때문이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작은 공터에 선다. 높은 아파트의 그림자가 조금 물러난 곳에 햇살이 닿는다. 바닥을 덮은 벽돌도 제 색을 띠기 시작한다. 잠깐 담배를 피우는 동안 얼굴 가득 햇빛을 받으며 겨울의 우울을 조금 말려본다.

 

아파트들은 최대한 남쪽을 향해 늘어선다. 각각의 집 안에 최대한의 빛을 들이고자 하는 배치이다. 정남을 취할 수 없다면 남동, 남서향이라도 취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남향집에 대한 불변의 선호는 최대한 모든 세대가 남쪽을 향하도록 아파트의 주동을 배치하게 만들었다. 아파트의 모양이 결정되는 설계단계에서 보면 모든 세대가 남쪽을 향하게, 그러면서 최대한 많은 세대가 주어진 땅에 들어가게 자리 잡고 나면 주차를 위한 차로와 단지 내 보행 동선과 놀이터, 부속시설 등 기타 땅 위에 있을 만한 것들이 배치되는데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것은 부차적인 것들이다. 최고의 놀이터를 만들기 위해 아파트 한 동을 날려버리는 짓은 결코 하지 않는다.

 

이렇게 남쪽을 바라보는 높은 아파트들은 그 몸집만 한 그림자를 땅에 떨군다. 각 세대 즉, 사적인 공간이 최대한의 햇빛을 가지고 가면 저 아래 땅에 있는 공적 영역은 일 년 내내 햇살에서 멀어진다. 어두운 주차장과 어두운 진입로. 어두운 놀이터와 어두운 화단들. 어두운 골목길, 어두운 상가들. 사적 공간에서 햇빛의 양은 곧바로 가치의 척도가 된다. 도시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교환가치에서 이용가치로 옮겨가는 지금, 햇빛의 소유는 또 다른 권력이며 부의 잣대가 된다. 도시 안에서 더 많은 햇빛이 있는 높고 트인 곳은 비싸고, 낮고 어둡고 침침한 공간은 싸다. 이제는 공간에 대한 정량적 가치 부여에 이용되었던 면적 단위, 즉 ‘평수’를 넘어 공간이 담는 햇빛의 양이 또 다른 가치 단위가 될 것이다. 햇빛 전쟁이다.

 

햇빛에 대한 애정은 에너지와 생명의 근원에 대한 오랜 습성일 것이고, 햇빛은 누구나의 것이다. 하지만 우리 도시는 어디엔가 그늘을 만들 수밖에 없고, 그 그늘이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은 그리 정의롭지만은 않다. 사적 공간들이 햇빛을 나누는 최적의 방법을 찾는다는 것은 은행 파생상품을 풀어헤쳐 공적 요소를 집어넣는 것만큼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른다. 먼저 고려할 곳은 공적 공간이다. 이미 건축물의 높이와 그림자에 대한 관계에 대해서는 일조권 사선제한, 도로 사선 제한 등의 법적인 약속이 존재하지만 누구나의 땅에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햇살에 대해 고민을 더 많이 할 필요가 있다. 영어 단어에서 ‘grey’ ‘blue’ ‘gloomy’ ‘dark’등은 어두움과 우울함을 동시에 의미한다. ‘어두운 방’, ‘어두운 골목’으로 시작하는 밝고 화사한 노래 가사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 사회적 우울함이 늘어가는 이 시대에 은유적인 표현으로서만이 아니라 단어 그대로 따뜻한 햇살이 이곳저곳에 필요한듯 싶다. 작은 조각의 하늘과 햇빛을 허하는 것에서 많은 것이 시작될 수 있다.

 

화석연료와 전기가 어두움을 밝히기 전에는 햇살 좋은 나라들이 세상을 지배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혹자는 어두움이 깊은 철학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철학은 책으로 읽으면 되니 난 그저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골목을 걷고 싶다.

 

글 | 건축가 구승회

연세대학교와 Columbia University 건축대학원에서 건축을 공부. 창조건축과 Yamasaki Associates, Inc, 야마사키코리아건축사사무소를 거쳐 현재 (주)크래프트 대표 재직 중. 현재 세종대학교 겸임교수이며 즐겁게 일하는 것과 행복하게 노는 것에 많이 노력 중. 중소 규모의 일상적 건축을 주로 하고 있으며 근작으로는 영화 건축학개론의 ‘서연의 집’, 서래 공방, 한남동 657 빌딩, 신사동 589 빌딩, 동해 주택과 양평 주택 등이 있다. 최근 영화의 흥행에 기대어 일상적 건축에 대한 책 ‘건축학개론_기억의 공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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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씰룩팬더 2013년 02월 20일 at 1:57 PM

    “그늘이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은 그리 정의롭지만은 않다”, “작은 조각의 하늘과 햇빛을 허하는 것에서 많은 것이 시작될 수 있다”, ” 화석연료와 전기가 어두움을 밝히기 전에는 햇살 좋은 나라들이 세상을 지배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 “얼굴 가득 햇빛을 받으며 겨울의 우울을 조금 말려본다”
    느낌이 고스란히, 고민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인상깊은 문장들이 있네요.
    일조권이라고 말하는 것과 ‘햇빛’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렇게 다른 생각을 갖게 하다니,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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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씰룩팬더 2013년 02월 20일 at 1:57 PM

    “그늘이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은 그리 정의롭지만은 않다”, “작은 조각의 하늘과 햇빛을 허하는 것에서 많은 것이 시작될 수 있다”, ” 화석연료와 전기가 어두움을 밝히기 전에는 햇살 좋은 나라들이 세상을 지배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 “얼굴 가득 햇빛을 받으며 겨울의 우울을 조금 말려본다”
    느낌이 고스란히, 고민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인상깊은 문장들이 있네요.
    일조권이라고 말하는 것과 ‘햇빛’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렇게 다른 생각을 갖게 하다니,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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