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는 대음희성大音希聲을 통해 제도화되고 양식화된 음악이 사람의 진실한 마음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기존의 음악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것이 과연 진정한 음악인가?”라는 물음을 던진 셈이다. 그는 이렇게 커다란 충격을 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음악의 정체를 새롭게 생각해보게 만들었던 것이다. 음악 예술에서 공자가 치유를 강조하는 반면 노자와 장자는 충격을 내세운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이 전부가 아니다. 그들은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계속해야 한다. 그들은 이어서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음악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물론 노자는 “그건 음악 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라며 자신과 선을 긋고 있다.
어떻게 하면 노자가 문제를 제기했지만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 논의를 이끌어 갈 수 있을까? 즉 “어떻게 해야 진실한 음악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장자에서 찾을 수 있다.
장자는 존재의 평등성을 다루고 있는 「제물론齊物論」에서 ‘인뢰人籟’, ‘지뢰地籟’, ‘천뢰天籟’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뢰가 퉁소를 가리키므로 세 가지는 각각 사람의 퉁소, 땅의 퉁소, 하늘의 퉁소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퉁소는 대로 만든 악기 중의 하나로 구멍이 위쪽에 다섯 개, 아래쪽에 하나가 나있다. 퉁소는 세로 방향으로 불어서 소리를 내는데, 주로 독주 악기로 쓰인다. 이 퉁소가 장자의 퉁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도 큰 문제가 없을 듯하다.
「제물론」은 다소 엉뚱하게 남곽자기와 안성자유 두 사람의 안부 이야기로 시작된다. 남곽자기가 책상에 몸을 기대고 앉아서 하늘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멍하니 몸도 마음도 놓아버린 듯했다. 옆에 있던 안성자유는 남곽자기의 태도를 말라버린 나무와 꺼진 재, 즉 고목사회枯木死灰로 보인다며 뭔가 큰 일이 생겼는지 물었다. 이에 남곽자기는 “내가 스스로 무엇을 하려는 자아를 잊었다(오상아吾喪我)”라면서 퉁소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있다.
장자에 따르면 인뢰는 사람이 대나무로 만든 퉁소를 불 때 내는 소리를 가리킨다. 지뢰는 땅이 내쉬는 숨결인 바람이 공간을 지나면서 내는 온갖 자연음을 말한다. 바람이 깊은 계곡, 나무 구멍 등을 지나면서 내는 소리다. 장자는 이러한 지뢰의 소리를 실로 다양한 의성어를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 “콸콸, 쌩쌩, 탁탁, 후루룩, 야야, 아아악, 윙윙, 지지배배. 앞의 바람이 휙휙 불어대면 뒤의 바람이 따라서 윙윙 소리를 낸다. 산들바람에 가볍게 응하고 회오리바람에 크게 응한다. 태풍이 잦아들면 모든 구멍이 조용해진다.”
천뢰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부는 소리가 만 가지로 서로 다르지만 제각각 제 소리를 내게 된다. 잘하든 못하든 모두 저 스스로 움직여서 나아가는데, 울부짖게 하는 것이 그 누구인가?(夫吹萬不同, 而使其自己也, 咸其自取, 怒者誰邪?)” 이것은 천뢰를 묘사하는 부분이다. 개별 존재는 모두 외부 요인이나 외적 자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적 움직임에 따라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이때 취吹는 그렇게 개별 존재가 자신의 바람대로 다르게 소리 내고 노래하는 것인 반면 노怒는 스스로 나아가는 흐름에 끼어들어 개별 사물의 흐름을 뒤흔들어서 흥분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뢰는 형식화되고 제도화된 음악이고 지뢰는 바람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음악이다. 인뢰와 지뢰는 결국 제도와 사물에 구속된 음악이다. 즉 노자가 부정하는 음악이다.
천뢰는 존재가 구속을 받지 않고 상황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이는 어른과 아이가 즉흥에 따라 음정 박자 무시하고 제멋대로 불러도 사람들이 깔깔 웃고 즐기는 자유로운 음악이며 풍요로운 예술인 것이다. 이는 박지원이 「열하일기」 「일야구도하기」에서 물소리를 서사나 교훈과 연관시키지 않고 들리는 대로 듣는 것과 같다(河聲在聽之如何爾). 이처럼 장자는 천뢰를 통해 노자가 침묵했던 자유로운 음악의 정체를 드러냈던 것이다.
*다음 이 시간에는 장자가 천뢰를 구체화 한 〈함지咸池〉음악에 대해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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