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빈 무대가 될 수 있다. 누군가 이 빈 공간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다른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연극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피터 브룩의 『빈 공간』 첫 구절이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미 수십 년 전에 발표된 이 구절을 인용한다. 간결하고 명료한 이 언명은 현대연극에 대한 많은 질문과 답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빈 공간이라고 하지만 모든 것이 다 제거된 텅 빈 공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도를 채워 넣지 않았다는 뜻에 가깝다. ‘행하다’와 ‘보다’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시간 역시 이미 포함되어 있다. ‘보다’는 ‘듣다’ ‘만지고 느끼다’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매체에 따라 공간과 시간의 공유방식과 감각 역시 무한히 달라질 터다. 공간과 시간, 행하는 자, 보는 자 혹은 감각하는 자. 이것만으로 연극이 시작된다고 할 때, 세계는 사건들로 충만한 것이 된다.
고헌과 임금님은 그러한 사건이 내 몸 안에서도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2020년부터 ‘생태움직임연구소 소행성’으로 함께 작업하고 있다. 고헌은 공연 기획, 제작, 연출 등의 일을 해왔다. 관객 참여적인 다큐멘터리 시어터에 관심이 많다. 콜트콜택 해고노동자들과 <구일만 햄릿> <서울 데카당스> <법앞에서> 등을 만들었다. 닉네임은 콩나물. 임금님은 발달심리학을 기반으로 영유아 예술교육을 진행해왔고, 소매틱을 훈련해온 솔로 퍼포머다. <스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왜곡> 등에 참여했다. 그녀의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주신 본명이다. 닉네임은 배추. 이 두 사람은 <퀴어마틱스-흔들흔들흔들>에서 처음으로 함께 작업했다. 이때 서로 작업해온 방식이 달라 엄청난 갈등을 겪었다. 그래서 팀을 만들었다. 싸우더라도 뭔가 기준을 가지고 싸울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 점이 두 사람의 남다른 점이다.
이들은 왜 갈등하면서도 함께 할까. ‘소매틱’ 바로 ‘몸’ 때문이다. ‘소매틱’은 심리치료에서부터 연기훈련까지 매우 다양한 목표와 방법론으로 소개되고 있고 배우고 익히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두 사람은 소매틱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나 방법론에, 치유나 훈련을 넘어, 보는 자 즉 감각하는 자를 덧붙인다. 그리고 이들의 작업에서 행하는 자와 감각하는 자는 서로 다른 두 주체로 분리되기도 하고 ‘내’ 안에서 동시에 수행되고 있는 역할이기도 하다. 이렇게 놓고 보면 앞서 인용한 피터 브룩이 말한 연극의 시작은 이미 내 몸 안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두 사람의 작업은 새로운 창작방법론이라든가 작품의 기획제작이라든가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창작, 교육, 향유, 무대, 객석 등 공연예술에 대한 여러 관점, 관습들을 무너뜨리면서 재구성하는 과정이라고 할 것이다. 두 사람은 아직 자신들 역시 탐색 중에 있으며 여전히 협업 과정에서 혼란과 갈등이 있다고 말한다. 거의 대부분 질문에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이 출발한 문제의식과 현재의 생각에 대해 각각 답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이 두 사람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생각이 서로 맞물려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생태움직임연구소 소행성에 대한 소개 글을 보니 더 궁금해졌다. “동시대 생태적 위기 상황에서 ‘공연예술의 생태적 전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극장, 관객, 연행자 등 공연의 기본적 요소들과 자연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라고 했는데, 두 사람이 각자 그동안 해온 작업이나 소행성의 작업을 볼 때 ‘생태’가 환경 등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임금님 우리가 같이 작업을 한다면 이런 지향점을 잊지 않고 추구해보자는 뜻을 담았다. ‘생태’는 우리가 방법론으로 두고 있는 소매틱과 연결되는 개념이다. 소매틱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소마’인데, 소마는 생명체로서의 몸을 말한다. 생명체로서의 몸에는 연결성이 포함되어 있다. ‘움직임’은 동적인 것, 생명체로서의 몸, 살아있는 몸, 끊임없이 변하고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몸을 말하는 것이다. ‘연구소’는 우리는 계속해서 탐험하고 싶다는 뜻이다. 소행성은 ‘소매틱으로 행복한 성에너지’를 줄인 말이다. 이렇게 풀어서 말하기는 처음인 것 같다. 성에너지는 생명력으로 이해해주면 좋겠다. 자기 몸을 새롭게 바라보고, 자기가 숨 쉬고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감각하고 드러낼 수 있으려면 힘이 필요하다. 외부에 저항하는 힘, 기존의 관점에 대항하는 힘이 필요하다. 이걸 즐겁고 행복하게 하려면 에너지가 받쳐줘야 한다.
고 헌 다큐멘터리 시어터 작업을 계속 해왔는데 아쉬움이 있었다. 몸에 지층처럼 쌓여 있는 시간성, 공간성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방법을 찾고 있다가 소매틱을 만나게 되었다. <퀴어마틱스-흔들흔들흔들>을 하면서 처음 같이 작업을 했는데 정말 엄청 싸웠다. 배추(임금님)가 하려는 작업은 굉장히 새로웠고 존중하지만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은 놓지 않았던 거다.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 어떻게 잘 차려서 내놓을지 그런 고려들이 작업을 더 힘있게 하고 빛나고 풍성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계속 부딪혔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 관점에 너무 몰두해 있었고 균형을 맞춰가는 어떤 과정이었던 것 같다. 소매틱의 중요한 관점 중 하나가 몸에서부터 출발해서 하나하나씩 찾아 나가고 그것이 결과물까지 가는 프로세스라면, 나는 콘셉트를 가지고 현장에 접근해서 뭔가를 구성해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해왔다. 두 방식 간의 충돌이 계속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내 방식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소매틱 작업을 존중하면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방식이 극적으로 갈등을 일으켰다면 이제는 두 방식이 부딪치면서 해결해야 할 과제를 발견해가는 것 같다. 지금까지 경험하면서 발견한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연결, 연결감에 대한 회복이다. 소매틱이 몸, 정서, 인지 등의 연결성 혹은 통합성을 키우는 거라면 ‘생태’는 나 개인과 사회, 그 너머 자연까지 포괄하는 연결성, 통합성의 방향을 말한다.
그런데 왜 ‘공연예술의 생태적 전환’인가, 공연예술의 어떠한 전환을 말하는 것인지, 그게 왜 생태적 전환이어야 하는지 궁금하다.
고 헌 먼저 작업에 관해 이야기하면 다큐멘터리 시어터 등 참여적인 형식의 작업을 계속해왔는데, 이머시브 시어터 등 몰입보다는 삶과 더 깊이 연결되는 지향이 있다. 공연이 인지적 차원에서 머물거나 통찰적인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서 직접적으로 몸의 감각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항상 있었다. 해고노동자, 장애인, 임차 상인 등과 작업하면서 예술활동이 소수의 감각을 드러내서 밑바닥에서부터 감각의 변형을 일으키는 활동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한편 작업을 하면 할수록 정치적 입장, 정치적 올바름 이런 것에 소진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하려던 게 뭘까 다시 생각하면서 정리한 것이 성원권이다. 소수의 감각이나 기억을 공적 차원에서 나누는, 공적으로 승인해 주는, 그런데 “그래 너 인정해줄게, 이런 감각까지는 사회에서 포용할 수 있어” 이런 것이라기보다 우리 모두가 타자의 감각을 향해 몸을 열어젖히는 그런 의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때 공연은 소수적인 것을 발견하고 나누는 풍요로운 장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성원권으로 공연을 다시 봤을 때 안도감이 들고 편안해졌다.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성원권 개념을 사람에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좀 넓게 비인간적인 것, 비생명 존재까지 더 확장하는 것이 생태 성원권 의례인 것 같다. 그것이 공연예술의 생태적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공연예술의 이분법, 무대와 객석 등의 이분법을 어떻게 깰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는데, 생태 성원권이라고 생각하니까 자연을 들여오게 되고 그러면서 공연의 관극 체험이라는 게 완전히 달라지는구나 생각했다.
임금님 공연이라고 하면 보여주는 것, 보는 것이 먼저 직관적으로 떠오른다. 소매틱 관점으로 생각하면 바라보기에는 내가 나의 봄을 바라보는 것 또한 포함된다. 내 몸이 무대가 되고 내가 관객이 되는 그런 것들이 내 안에서부터 먼저 일어난다. 그리고 내가 내 몸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대한 전환이 필요하다. 내 몸은 표현하고 싶은 욕구, 보여주고 싶고 보는 것에 대한 욕구가 있는 장소다. 기존의 공연은 관객과 무대가 분리되어 있고 익숙하고 보호받는 어떤 것들이 있다.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공연은 관객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앞에서 펼쳐지는 것이 자신과 계속 연루되게 하는 것이다. 영감을 받거나, 감동 받는 것에서 좀 더 나아가서 어떤 이야기들이 자기 삶과 연결되게 하는, 행위자가 자기 삶의 이슈를 예술이나 공연으로 끌고 들어오고 여기서 나온 것들을 다시 삶으로 가져가는 순환에 대해 생각한다. 이것이 연결이라는 개념이고 생태, 자연의 순환, 주기 등과 겹치는 이야기이다.
작업에 대해서도 듣고 싶다. 그전부터 협업이 있었지만 소행성 작업으로는 <상실공간> <트랜스 몸 숲> <릴레이집연극프로젝트 이몸저방구석>(이하 <이몸저방구석>) 등이 있다.
임금님 두 사람이 작업방식이 다르다. 나는 나에서 출발한다면 콩나물(고헌)은 사회적인 맥락에서 좁혀서 들어온다. <상실공간>은 수치심을 주제로 한 작업이다. 수치심은 너무 강력하고 가장 밑바닥에 있는, 가려져 있는, 신체적 반응이 바로 오기 때문에 말하는 걸 꺼려하고 도망가고 싶고 회피하고 싶은 주제다. 그런데 한편 수치심은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 사회와 연결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되어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으면서 불편함, 왜 그래야 하지라는 질문과 의문이 남는다. 수치심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려 보는 작업이었다. 몸을 공간으로 보고 이 공간이 확장되면서 사회와 연결되는, 서울이라는 도시와 연결해보는 작업이었다.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몸의 기억과 도시의 공간을 연결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임금님 지금 이 시점에서 내 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불편한 것은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계속 파고 들어간다. 소매틱에서는 몸을 기억의 저장고로 본다. 그러니까 사회로부터 사건이나 조건으로 내 몸이 구성되는 거다. 몸을 탐구하면서 되짚어가면 사회적인 이슈랑 만날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소매틱이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인 것 같다. 그러니까 몸을 잘 튜닝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임금님 소매틱은 몸의 튜닝으로도 더 많이 쓸 수 있다. 자신의 몸을 이완하는 것이니까. 그걸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이다. 내 몸을 바라보면서 만들어진 관점을 확장해서 이 사회 이 도시를 다시 바라본다. 수치심이라고 했을 때 즉각적으로 떠올렸던 공간은 화장실 이런 곳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나의 수치심과 만나느냐는 또 별개의 문제였다. 점점 자신에 관한 탐구로 작업이 전개되다 보니 한강 철도 다리 밑, 고시원촌, 영등포 빌딩 이런 식으로 각자 수치심의 장소가 다르게 나타났다. 공공이라는 장소도 다르게 인식되고 다른 이야기들이 계속 나왔다.
고 헌 <상실공간> <이몸저방구석>은 몸에 대한 접근방법으로서의 소매틱을 공간으로 확장하는 작업이었다. 가설이 있는데, 표현도 바라보는 것이지 않을까, 퍼포머도 뭔가를 바라보는 첫 번째 관객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었다. 도시 공간에서 혹은 어떤 공간으로 확장해서 퍼포먼스를 한다는 것도 뭔가를 표현한다기보다 마치 소매틱으로 내 몸을 바라보고 발견하는 여정이라면 도시 공간에서도 똑같이 바라보기를 통해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소매틱에서는 움직이면서 미시 근육의 신호, 긴장감을 계속 발견하고 탐구해 간다. 움직임이 발견의 과정이다.
<이몸저방구석>은 유튜브에 여러 편의 비디오 클립이 있다.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마다 구성이 다르더라.
고 헌 지금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것은 2018년에 진행한 것이다. 지금처럼 구체화하기 이전 작업인데, 뭘 발견할지 모르지만 같이 떠나보자, 그 여정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툴(tool)을 공유한다는 동지적 관계와 소매틱 관점이 동시적으로 작용하면서 진행되었다. 소매틱뿐만 아니라 다른 창작의 툴도 같이 썼다. 교육도 제공될 수 있지만 교육적 관점으로 빠지지 않도록, 또 기존 창작의 관점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임금님 상호작용이 계속 일어난다. 나는 툴을 배우고 활용할 뿐이지 내 눈앞에 있는 이 생명체가 누구인지 모른다. 장애인과 작업할 때 그들의 몸은 내 상상 너머에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걸 제시한다기보다 참여자가 내게 불러일으키는 걸 제안하고, 그러면 이 사람이 그 제안을 거절하거나 받으면서 나에게 제안을 드러내고, 그걸 다시 보는 과정이 이어지는 거다. 나는 참여자에게 퍼포머이기도 하고 참여자의 관객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참여자도 내 앞에서 행위 하는 퍼포머이자 나의 행위를 바라보는 관객이다. 우리의 관계는 계속 변화한다. 동지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마냥 동등한 상황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순간순간 힘의 강도와 방향이 달라진다. 균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함도 있다.
퍼포머와 관객으로 이야기했는데, 교육의 과정도 떠오른다. 예술교육을 보면 기획서, 프로그램, 매뉴얼로 설명할 수 없는 교육과정에서 창조적 순간들을 잘 잡아내고 반응하는 예술교육자가 있다. 상호작용, 함께 가는 여정 등을 이야기하는 데 그 과정에서 계속 뭔가 새로운 것들이 다가오는 걸 잘 발견하는, 혹은 새로운 관점을 제안하고 실현하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
임금님 예를 들어 <이몸저방구석>에는 나, 기록자, 참여자 이렇게 3명이 있다. 어느 날 작업을 영상으로 담으려고 카메라 하는 분이 온다. 그러면 보는 사람들이 달라지고 작업이 달라진다. 또 어떤 날은 오늘은 작업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어서 보러 온다. 그때 또 작업이 달라진다. 그렇게 달라지는 것을 발견하는 데에서 창조성이 발휘되는 것 같다. 그런데 소매틱 방법론만으로 그런 차이를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보이는 모습, 이렇게 보이겠지 하는 것, 내가 보는 것, 이런 여러 시선이 공존하는 순간을 포착할 때 재미있다.
지금의 탐색이 더 진전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임금님 지금은 이런저런 시도를 좌충우돌 막 던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담는 그릇이 필요하다. 장(場)을 여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소매틱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다. 치료, 배우훈련 등 다양하게 접근하고 있는데, 우리는 공연예술로 풀어내고자 한다.
고 헌 공연을 보러 간다고 하면 서로 공유하고 있는 문화가 있다. 극장은 특별한 공간이고 핸드폰을 끄고 객석과 무대의 불이 꺼지고 공연이 시작되면 조용히 한다. 어떤 경험을 할 것이라고 공유하는 것이 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작업하는 이 장에 필요한 어떤 것들을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고헌·임금님
생태움직임연구소 소행성 공동대표. 발달심리학을 기반으로 영유아 예술교육을 하며 소매틱과 신경과학을 공부하던 임금님과 다큐멘터리 시어터, 관객참여형 공연을 기획, 연출하던 고헌이 만나 공연예술의 생태적 전환에 뜻을 모아 2020년 2월 소행성을 결성했다. 극장, 관객, 연행자 등 공연의 기본요소와 자연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삶의 의례로서의 공연형식을 복원하고 신체, 정신, 영적 차원의 연결과 순환에 초점을 둔 실존하는 주체 모두에게 해당하는 행위로서의 예술 활동을 지향한다. 주요 작품으로는 <상실공간> <트랜스 몸 숲> <릴레이집연극프로젝트 이몸저방구석> 등이 있다.
- 김소연
-
연극평론가. [문화정책리뷰] 편집장. 공연보고 글을 쓴다. 글 쓰는 것 외에 관객과 창작자가 만나는 다양한 방식을 궁리하고 실행한다. <삼인삼색 연출노트> <극작가리서치워크숍> 등을 기획했다.
www.instagram.com/sweetdream514
사진·영상_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2 Comments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코너별 기사보기
비밀번호 확인
몸, 움직임, 바라보기 그리고 연루되기
고헌·임금님 생태움직임연구소 소행성
정말 너무나도 멋지네요
몸, 움직임, 바라보기 그리고 연루되기
고헌·임금님 생태움직임연구소 소행성
기대만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