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과제 앞에,
협치의 공론장을 열어라

문화 자치와 문화 분권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인 2001년에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이하 문화부)가 ‘지역문화의 해’를 선포하고, 전국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화 관련자들이 모여 두 차례에 걸친 공론장을 만들었다. 이른바 ‘백가쟁명’과 ‘백화제방’이라는 이름으로 문화 분권과 문화 자치에 관한 열띤 논의를 펼쳤었다. 과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네 번 바뀌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 공론장에서 논의됐던 가치와 변화의 열망은 얼마나 실현되었을까? 체감으로는 나아진 게 없지만 아마도 통계상으로는 진전된 측면이 있으리라. 여타 사회적 통계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러나 기후변화라는 지구적 위기 상황과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지방 소멸 위기 앞에서는 그러한 작은 진전은 유의미성을 논하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것이다. 그때보다 수도권 집중은 심화되었고, 배금주의는 강화되었으며, 빈부 격차도 커졌으며, 사람들 사이의 경쟁은 치열해졌다. 그 결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지방 대도시들의 부동산은 폭등하는 한편, 대다수 지역은 빈집이 늘어나는 기묘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분배와 분산의 한계
나는 그간 우리 사회의 논의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의 근본적 변화, 즉 ‘문화적 관점’의 사회 발전이 아니라 지나치게 자원의 분배와 권력의 분배 등에 맞춰져 있어서 명백한 한계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혁신도시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정부 부처나 공공기관의 이전이 수도권 집중을 해소했는가? 나는 분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필요조건은 될지언정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문화적 관점(교육도 문화다)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어찌 물리적 배분만으로 지역의 삶에 만족감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분권은 중앙정부의 권한을 지방정부로 나누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관에서 민으로의 권한 분배에는 관심이 매우 모자란 측면이 있었다. 즉 수직적 분권에 지나치게 몰두해 수평적 분권에 소홀했다는 생각이다. 사실 시민의 삶의 현장은 지역(Local)이다. 근래엔 지역도 세분화해 동네(Hyper-local)가 주목받고 있다. ‘당근마켓’의 약진은 세분화된 지역 서비스의 필요성을 증명하는 사례다. 그런데 지자체의 정책서비스 현실은 어떤가? 세계사적 문명 전환에 부응하는 정책을 실현하기는커녕, 지역민이 느끼고 있는 지역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는 대체로 토호 중심의 지역 지배 구조에 상당한 원인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시민참여 없이는 지역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에는 훌륭한 리더도 필요하지만, 시민에게 권한을 나누는 수평적 분권은 시대적 과제로 등장한 지 오래다.
특히 문화 영역은 정책 수요자의 욕구와 취향이 다른 영역에 비해 훨씬 예민하게 작용한다. 지역문화 생태계가 형성되려면 문화 생산-유통-소비의 선순환이 이루어져야 하고, 인력을 포함한 지역 내 문화자원의 협업, 나아가 도시, 경제, 교육, 복지, 환경 등 다른 사회 영역과의 네트워크와 협업이 필요하다. 따라서 지역의 문화정책은 지역민의 정책적 필요와 시대 변화에 발맞추어야 하지만, 현실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지자체장이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행사, 낯내는 행사, 혹은 개인의 취향에 부합하는 행사 등에는 예산을 아끼지 않지만 정작 지역문화발전에 꼭 필요한 사업에는 예산을 사용하지 않는 현실을 자주 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문화와 예술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에게서도 흔히 나타나는 고질병이다. 문화정책의 기반이 되는 리서치와 데이터도 취약하다. 심지어 문화재단이 있는 지자체조차 기본적인 정책 연구가 되어 있지 않은 곳이 많다. 필연적으로 문화정책의 공론장은 형성되지 않는다. 문화재단의 역할은 축제 등 행사 실행, 문화시설 관리, 예술 활동 지원 등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자체장이 추구하는 역점 사업의 실행조직처럼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지역문화 활동을 위한 공공 지원체계가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다. 몇몇 지자체에서 혁신적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기는 하나 대부분 지자체는 낡은 정책 인식과 관행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문화부 정책 사업인 ‘문화도시’ 사업으로 인해 지자체 문화정책이 변화하는 새로운 흐름이 일고 있다. 거버넌스를 기반으로 한 추진체계를 중요한 심의 요건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런 흥미로운 상황이 펼쳐지게 만든 정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문화도시 정책이 수직적 분권과 수평적 분권, 수평적 분권의 기반이 될 민관 협치, 그리고 행정과 함께 협치의 기반이 될 시민의 역량 강화는 동시에 추진되어야 하는 필요성을 환기한 공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부 스스로는 여전히 하달식의 사업을 벌이고 있고, 민관 협치에 서투르다고 해도 말이다. 지역문화정책을 개선하는 해법은 협치뿐이다.
지역문화정책의 핵심 주체
근래 또다시 ‘문화 분권’이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분권과 지방 이양은 문화 자치를 위해 우리 사회가 반드시 거쳐야 할 필연적 과제이지만 지역문화와 연관된 일을 오랫동안 해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가올 포괄적 지방 이양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다. 중앙정부에서 문화 부문에 사용했던 예산을 지방에 넘겨주었을 때 지방정부가 그 예산을 문화 부문에 사용하지 않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려는 그동안 지방정부가 보여 온 정책 행태가 신뢰받지 못한다는 것을 방증하는 결과다. ‘문화 분권과 문화 자치’의 또 다른 걸림돌은 문화정책을 독점적으로 생산, 집행하는 문화부의 조직체계와 관료제라고 생각한다. 지역문화의 핵심적 주체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지역의 문화, 예술인들인데 정작 주체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통로가 없다. 지역문화협력위원회 등 문화부에 속해있는 각종 위원회는 관료들의 선호에 따른 자문위원회 성격을 띨 뿐이다. 다시 말해 정책 수요자의 대표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나라의 문화정책은 관료들의 의사결정에 따른 하향식 정책 시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문화예술교육이 실질적으로 실현되는 장소는 기초자치단체 단위이며, 학교든 사회든 간에 여기서 문화예술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지역 차원의 협업이 필수적이다. 예술가는 물론 지자체, 교육지원청, 교사, 학부모, 학생, 예술강사, 문화기획자, 문화동아리, 문화기반시설, 문화예술단체 등이 통합적으로 움직여야 실효성이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문화부 산하 일개 부서에서 수립한 정책 사업을 하달하는 방식은 오히려 지역의 통합성과 생태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만든다. 물론 중앙정부의 정책은 필요하고, 정부의 정책을 전달할 중간지원조직도 필요하다. 그러나 중앙정부-광역지자체-기초지자체로 이어지는 행정 단위 사이에 역할 분담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공론화되지 못하고 시행됨으로써 나타나는 리스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정책이 실현되는 최종 장소의 정책 수요자들의 욕구와 의견을 전달할 통로가 막혀 있다. 또한, 문화부 직제가 갖는 근본적 한계, 즉 담당 부서의 사업으로 정책을 시행할 수밖에 없어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행정의 칸막이 때문에 지역 차원에서 연결과 통합을 저해한다는 점이다.
성장을 위한 단계들
문화 자치는 문화 분권으로부터 시작해야 도달 가능한 목표가 될 수 있다. 어린이가 성장하면서 권한을 가질 때 의무와 책임이 수반되고 성장하듯이, 자치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권한을 주고 역량을 키워나가야 가능하다. 자치 역량은 금방 성장하기 어렵다. 어린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인내하며 꾸준히 지원해야 하듯이 문화 자치 또한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강조하건대 문화 자치는 당위성에서 제기되는 것만이 아니라 시대 변화를 따라가야 하는 시급한 필요에서 제기되는 과제이다. 더욱이 민주공화국 운영의 기본 원리인 대의정치, 민주주의, 국민주권주의 등이 노정하는 한계를 보완, 발전시킨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과제가 된다.
또한, ‘문화 분권’과 ‘지역문화진흥’이라는 명제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 범위, 주체, 진흥체계 등에 대한 철학적, 정책적 공론장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지역문화를 진흥하기 위해 국가와 광역지자체, 기초지자체의 사무 등을 어떻게 나누는 것이 바람직한지 역할 분담 체계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선행되어야 한다. 중앙정부-광역지자체-기초지자체 사이의 수직적 분권과 각 층위의 수평적 분권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합리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사무 배분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가 뒤따라야 한다. 이를 통해 국가, 광역지자체, 기초지자체의 문화정책이 정립될 수 있고, 혁신을 통한 문화 창달이 가능해질 것이다. 시민의 문화자치 역량의 성장과 전문 인력의 양성에 기반한 거버넌스의 구축과 실질적 작동만이 문화정책의 질곡을 돌파하고, 새로운 지역문화 진흥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지금종
지금종
지역문화 활동가. 1980년대부터 지역문화 활동을 해왔으며, 문화연대 사무총장, 지역문화진흥원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지금은 강릉시문화도시지원센터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지역문화 활성화를 통한 지역발전의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다.
c-man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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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희 2021년 10월 21일 at 1:54 PM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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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가연 2021년 12월 15일 at 11:36 AM

    단순히 물리적 배분만으로 수도권 집중과 지역 쇠퇴를 막을 수 없고, 수직적인 분권보다 수평적인 분권이 중요하다는 의견이 인상깊었습니다.
    미래 문화예술교육관련 종사자로서 수평적 분권의 실현을 위해 어떤 교육들을 계획하고 또 실행할 것인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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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현 2023년 03월 09일 at 4:31 PM

    시대적 과제 앞에,
    협치의 공론장을 열어라
    문화 자치와 문화 분권
    기대만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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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희 2021년 10월 21일 at 1:54 PM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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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가연 2021년 12월 15일 at 11:36 AM

    단순히 물리적 배분만으로 수도권 집중과 지역 쇠퇴를 막을 수 없고, 수직적인 분권보다 수평적인 분권이 중요하다는 의견이 인상깊었습니다.
    미래 문화예술교육관련 종사자로서 수평적 분권의 실현을 위해 어떤 교육들을 계획하고 또 실행할 것인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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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현 2023년 03월 09일 at 4:31 PM

    시대적 과제 앞에,
    협치의 공론장을 열어라
    문화 자치와 문화 분권
    기대만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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