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지않아 코로나 위기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번 여름휴가를 위해 경쟁적으로 제주도 호텔을 예약하고 있으며, 심지어 2021년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낼 외국의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기도 한다. 그동안 친구들도 못 만나고, 수업도 못 하고, 맘껏 여행도 못 가고,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에도 언제 마스크를 벗어야 할지 눈치를 봤지만, 백신이란 마법 같은 해법이 나오면서 이런 ‘비정상’(abnormal)의 시대에 작별을 고하고 즐거운 만남과 여행과 식도락이 만개하는 ‘정상’(normal) 세상으로의 복귀가 가시권에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과거로, 노멀로, 일상으로의 복귀가 모두 좋기만 한 것일까?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경제활동이 위축되자 대도시 곳곳에 동물들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베이징이나 뭄바이처럼 미세먼지가 심해서 바로 앞도 잘 보이지 않던 도시에서는 코로나19 이후 맑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2020년 4월을 기준으로 지구온난화의 주 원인인 이산화탄소는 전년 대비 17%나 감소했다. 환경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코로나19 사태 동안에 기후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목도했다. 그 가능성은 우리가 지금까지 만나고, 여행하고, 즐기면서 살아왔던 ‘노멀’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데에 있다.
욕망의 방향을 바꾸는 선택
포스트 코로나를 상상하는 우리 앞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욕망을 좇는다면, 과거의 노멀로 돌아가야 한다. 만나고, 놀고, 먹고, 노래 부르며, 춤추는 일상으로 복귀해서 ‘코로나 블루(우울)’를 빨리 벗어나야 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세상은 빠르게 과거로 복귀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번 팬데믹은 그동안 우리가 살아왔던 삶의 양식이 총체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글자 그대로 현명한 ‘사피엔스’라면 그저 과거로 회귀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아니 전 인류적인 차원에서 과거로 복귀하려는 우리의 욕망을 억제하고, 그 욕망의 방향을 틀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억제와 우회를 위해서 포스트휴머니즘의 감수성이 필요하다.
왜 이 지점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을 꺼내야 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번 팬데믹이 인간과 비인간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팬데믹을 야기한 코로나바이러스가 어떻게 처음 퍼졌는지 아직 특정하지는 못했지만, 2019년 말에 중국 우한에서 박쥐가 가진 바이러스가 천산갑 같은 동물을 매개로 인간에게 옮아갔다는 것이 정설이다. 박쥐는 수많은 바이러스를 체내에 가지고 있는데, 인간의 활동 범위가 박쥐의 서식지인 숲을 침범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인간이 박쥐의 바이러스에 노출될 가능성 역시 커졌다. 박쥐를 잡아먹었던 것도 문제지만, 숲을 파괴하는 것이 더 큰 위험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사람이 숲을 파괴하는 이유는 벌목, 농지와 목축지의 확보, 도로 건설, 도시의 확장 등 다양하다. 그렇지만 이런 다양한 이유의 밑바닥에는 계속 늘어나는 인구를 위한 자원, 경작지, 거주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존재한다. 인간이 재미로 숲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숲이 파괴되면서 인간은 동물이 가진 질병에 더 쉽게 노출되었다. 그 결과 20세기 이후 발생한 전염병의 60%, 21세기 이후 발생한 전염병의 75%가 동물로부터 인간으로 이전된 인수공통전염병이 되었다. 지금처럼 동물의 서식지를 계속 침범할 경우, 또 다른 팬데믹이 창궐할 수 있다는 교훈을 비싼 값을 주고 배운 셈이다. 코로나19를 겪으며 우리는 인간만의 건강과 웰빙을 추구하는 전통적인 패러다임을 벗어나서 인간, 가축, 야생동물을 모두 포함한 생태계 전체의 건강을 고려하는 ‘하나의 건강’(one-health) 패러다임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을 중심에 놓고 다른 동물을 인간을 위한 자원으로만 보는 인간중심주의의 관점에서 인간을 관계적 존재로 이해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의 관점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위기와 재난의 불공평
바이러스가 급속하게 전 세계로 퍼진 첫 번째 이유는 인류의 증가한 이동성(mobility) 덕분이다. 1950년대 말에 제트 여객기가 등장하면서 인류는 배 대신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당시 2주가 걸리던 미국-유럽 여행이 8시간으로 단축되었다. 여행이나 비즈니스 목적으로 외국에 가는 사람들은 1950년에 2,500만 건에서 1970년 1억 6천만 건, 1990년에는 4억 3천만 건으로 늘어났고, 2017년에는 14억 건을 기록했다. 세상에는 여행을 부추기는 광고, 책, 사진, 동영상, SNS, TV 프로그램이 넘쳐나며, 여행은 자아를 발견하는 실존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인류가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것은 60년도 채 안 되었다. 그러나 지금 전 세계 GDP의 2% 이상이 해외여행을 하는 데 소요되고 있으며, 지구의 온도를 올리는 온실가스의 3~5%가 비행기에서 나오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행인 것은, 지난 18개월 동안의 팬데믹이 우리가 해외여행 없이도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음을 실증했다는 사실이다.
2019년 전 세계의 GDP는 8경 7550조 원 정도였는데,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성장의 감소분은 이의 4.5%인 약 4000조 원 정도로 추산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손실을 본 것은 아니다. 한국의 경우를 봐도 2020년 1년 동안 상위 20%의 소득은 올랐고, 하위 20%의 소득은 감소해서 빈부 격차가 더 심해졌다. ‘북부’라고 불리는 부자 나라와 ‘남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격차도 더 심해졌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주로 70대 이상의 노년층을 공격하고 젊은이들에게는 크게 위험한 것이 아니었듯이, 코로나 사태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도 공평한 것이 아니었다. 위기와 재난은 결코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코로나 위기는 우리에게 ‘기술’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감염력이 강한 바이러스를 이 정도로 억제할 수 있었던 것은 마스크라는 기술(technology)과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기법(technique) 때문이었다. 중증 환자 상당수가 목숨을 건졌던 것은 인공호흡기, 에크모(심폐보조 장치), 음압병실 같은 기술이 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논란이 많았지만 렘데시비르 같은 항바이러스 치료제나 덱사메타손 같은 스테로이드 소염제도 생명을 살리는 데 한몫을 했다. 2021년 이후 도입된 백신은 코로나 사태를 종식시킬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이번에 새롭게 도입된 mRNA 백신은 약화되었거나 죽은 세균을 이용해서 항체를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mRNA를 넣어 세포가 단백질을 형성하게 함으로써 항체를 만드는 새로운 방식을 채택한 첨단기술이었다. 선진국은 백신을 빨리 개발할 정도로 과학에서 앞서 있었지만, 병에 걸린 사람들을 제대로 치료하는 의료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 아니, 좋은 의료 시스템이 있었지만, 돈 많은 사람들만이 이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인간 중심에서 관계적 존재로
팬데믹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을까? 우리는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것인가를 체험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코로나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마스크를 썼는데, 실제로 마스크는 무증상자가 타인에게 코로나를 옮기는 것을 막으면서 코로나 확산 방지에 기여했다. 처음에는 해외여행이나 노래방을 가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이나 동료와 관계를 맺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북경이나 뭄바이의 하늘도 파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즐기고 누려왔던 많은 것들이 지구라는 가이아(Gaia)를 갉아먹으면서 소수의 가진 자의 배를 채워주는 것일 수 있음을 엿보게 되었다.
돌아갈 것인가, 다른 길을 걸을 것인가? 다른 길은 인간을 관계적 존재로 보고,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환경, 인간과 지구, 인간과 기술을 대칭적으로 보려는 포스트휴머니즘의 감수성을 포함한다. 포스트 코로나에 대한 성찰은 마스크를 벗어 던지는 세상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우리가 앞에 놓인 두 가지 선택지에 대한 고민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 홍성욱
-
과학기술학자.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교수를 거쳐 2003년부터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과 생명과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모던테크』 『실험실의 진화』 『크로스 사이언스』 『포스트휴먼 오디세이』 『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 『그림으로 보는 과학의 숨은 역사』 등이 있다. 최근에 서평전문지 [서울리뷰오브북스]를 창간해서 편집장을 맡고 있다.
comenius@snu.ac.kr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5 Comments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코너별 기사보기
비밀번호 확인
공감합니다. 특히 인간을 중심에 놓고 다른 동물을 인간을 위한 자원으로만 보는 인간중심주의의 관점에서 인간을 관계적 존재로 이해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의 관점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부분,,,
안녕하세요 독자님, 반가운 이름이 보여 달려왔습니다 =3
말씀해주신 부분이 저도 마음에 많이 남았는데요, 관점의 전환이 매우 많이 필요함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관계적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살기 위해 오늘도 노력! 또 노력! 해봅니다.
교수님, 반갑습니다! 페이스북에서 한참 안 보이셔서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좋은 글로 만나뵐 수 있어 정말 반갑고 감동적입니다.
인간 중심에서 관계 중심으로 옮겨가자는 말씀은 읽는 내내, 읽은 후로도 한참 동안 몸과 마음에 울림을 줍니다.
이 글을 내일 출력해서 학급 아이들과 같이 읽어보고 얘기해 봐야겠습니다.
좋은 글을 주신 교수님과 아르떼 편집부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요즘 가장 공감이 가는 기사였던 것 같습니다.
자연, 동물, 지구, 기술과 인간을 동등하게 보며 함께 나아가는 포스트휴머니즘 감수성에 대해 고찰해 볼 수 있는 유익한 내용이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앞으로 변화하게 될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며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고심해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누려왔던 당연한 것들이 소수의 배를 불리는 것이란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포스트휴머니즘 감수성이 필요한 이유, 그것이 코로나로 인해 훨씬 앞당겨짐을 느꼈고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발맞춰 단순히 예전의 일상을 회복하는 것을 넘어서 환경과의 공존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이 난세를 타개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