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힘으로, 네 힘으로 걷는다

회복하는 생활‧회복하는 세상

의기투합 없이 만났기에 기약 없이 헤어졌지만, 이상하게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게 꾸려지는 작은 모임 속엔 늘 아픈 사람들이 있었다. 아픔에 대한 말은 대개 간절한 고백의 옷을 입고 등장을 하는 탓에 모두를 그 자신의 아픔 안으로 가둬버리곤 하기에 우리는 종종 곁에 있는 사람의 아픔에 포로가 되어버린다. 타인의 아픔에 휘말리고 부대껴 속절없이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시간을, 그러나 존중하고 싶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시간을 견뎌내는 것뿐만 아니라 ‘아픈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되어 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픔에 머물러 있는 이는 언제나 우리에게 제 얼굴을 봐달라고 간청하지만 회복하면서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이는 뒤를 돌아보는 일 없이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제 갈 길을 걸어간다. 누군가의 아픔은 나와 너뿐만 아니라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아픔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곁에서, 그들이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던 시간은 우리 모두가 ‘회복’의 힘을 공평하게 나누어 가지고 있음을 목격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 [문학의 곳간 68회_2020년 8월 22일]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현실문화, 2020)을 함께 읽었던 ‘회복하는 생활’
생활과 회복이라는 미지의 장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모임을 꾸린다는 것은 서로의 살림살이를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모임은 기꺼이 손해를 감내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만남이기도 하다. 갖은 프로젝트가 살림살이를 대체해버려 이제는 모두가 부대낌 없이 매끄럽게, 상처받지 않고도 만난다. 언제라도 지울 수 있고, 돌이킬 수 있다. 차단하기를 통해 눈앞에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관계를 맺는 것은 ‘친추’나 ‘팔로워’처럼 더하기의 연쇄를 떠올리기 쉽지만 어울림이란 더 많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의 확장이 아니라 선택의 강도를 최고도로 유지하는 것에 가깝다. 말하자면 ‘가위바위보’ 같은 것 말이다. 살림살이의 현명함은 더 많은 선택지를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선택지를 기꺼이 수락하는 힘으로부터 나온다. 가위. 바위. 보. 누구도 이 세 가지 (제한된) 선택지를 벗어날 수 없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나이가 많은 사람이든 적은 사람이든 가위를 내거나 바위를 내거나 보를 낸다. 그리고 그 결과를 수락하고 다음을 함께 기다린다. 대단히 새로운 방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뻔함’을 수락하는 일, 고만고만해 보이는 결과를 수용하고 밀고 나갈 때 마주하게 되는 예측 불가능한 힘이 있다. 평범함 속에 깃들어 있는 비범함이 출현하는 곳은 보살피고 부대낀 이력으로 조형한 생활이라는 장소다. 그곳을 지켜내는 힘은 살림살이에서 온다.
저마다의 이력 속에서 조형되는 ‘생활’은 각자의 제한된 영역 안에서만 의미를 가질 뿐이어서 아무나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미지의 장르’다. 무너졌던 생활을 일으켜 세우는 회복이라는 행위 또한 사정이 다르지 않다. 일상적으로 쉽게 사용하는 것에 반해 ‘회복’이라는 말의 구체적인 결에 대한 이야기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건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더불어 공유되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회복기(恢復期)란 곧 회복기(恢復記)일 수밖에 없다. 생활을 일으켜 세우는 행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narrate)은 각자의 내밀하고 은밀한 영역을 스스로의 힘으로 열고 나가 바깥으로 통로를 내는 일(relate)과 다르지 않다. 나의 생활에 타인이 접속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일은 생활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곧 회복하는 것과 긴밀하게 이어져 있음을 가리킨다. 생활을 돌보고 보살피는 이야기, 생활 속에 작은 희망을 조형해나가는 이야기가 풍성할수록 그 장소는 쉽게 휩쓸리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무너진 생활을 일으켜 세우는 과정을 이야기할 때 고립되어 있던 생활은 타인[사람]과, 현실[시간]과, 현장[장소]과 접속하며 바깥으로, 다른 곳으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회복은 좋았던 그 자리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과 다른 희망과 접속하여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바깥을 향한 걸음
‘회복’은 단순히 좋았던 상태를 되찾거나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무너졌던 이가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청소나, 밥 짓기, 목욕, 산책과 같은 것들인 이유는 우연이 아닌데, 회복은 우선 무너졌던 ‘생활’을 일으켜 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생활 속엔 오직 자신만이 감각할 수 있는 이력이 쟁여져 있기에 잠재된 그 힘을 다시 깨우는 것이 중요하다. 생활을 감각하는 것, 생활에 언어를 부여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생활을 돌보고 키워가는 것은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아 얼핏 무용하거나 부차적인 일처럼 보이지만 누구도 알 수 없는 내밀한 영역을 오직 자신의 걸음을 통해 이른다는 점은 중요하다.
회복하는 사람은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동력은 생활을 이야기라는 동아줄로 만들어 바깥으로 내어놓은 통로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어렵게 내어놓은 내 생활의 동아줄, 그 한쪽 끝을 잡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누군가가 그 끝을 잡아 주었기에 팽팽해진 동아줄에 기대어 일어나 오늘도 걷는다. 어디에 도착할지 알 순 없지만, 곧 누군가를 만나리라는 것은 틀림없다. 회복이라는 행위에 깃들어 있는 ‘능동적인 힘’은 ‘상호성’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은 타인의 있음으로부터 성립되는 ‘다원성’에 의존하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복은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멈출 수밖에 없던 자리도 다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돌아가되 다른 자리로 향하는 일, 이행(移行)하는 일인 셈이다. 무엇보다 회복은 (나를) 버티는 제자리걸음과 달리 ‘나(자아)’ 바깥으로 나가는 걸음이며 홀로 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타인에 기대어서만 경험할 수 있는 상호성의 체험을 동력으로 하는 걸음이다.
회복하는 사람은 도리없이 뒷걸음질 치기를 반복하며 넘어지지 않게 애쓰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길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누군가의 뒤를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누구도 뒤따라올 수도 없는 길을 가는, ‘바깥’으로 향하는 걸음. 자아의 바깥, 공동체의 바깥, 국가의 바깥, 마침내 인간의 바깥으로 나가고자 하는 걸음엔 약속된 미래가 없기에 위태롭다. 회복은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일이나(재활) 그 자리에 머물 수 있게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는 일(치유)과는 다르다. 세상의 모든 회복엔 바깥을 향한 위험을 무릅쓴 도약이 있다. 끝내 ‘바깥’으로 걸어 나가려는 회복의 의지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돌이킬 수 없이 새겨져 있는 상호의존의 힘, 그 경험을 출처로 한다. 오늘도 곳곳에서 손해를 감수하고 모임을 일구고 있는 이들이 저마다의 걸음으로 아픈 세상을 걸어갈 때 그 힘은 온전히 ‘내 것’이면서 온전히 ‘네 것’이기도 하다. 내 힘으로, 동시에 네 힘으로 바깥을 향해 다만, 걷는다.
김대성
김대성
문학평론가. 생활예술모임 <곳간> 대표. 대학에서는 강의 노동자로 일하고 있고, 때론 집필 노동자로, 부산의 문화예술장에선 기획 노동자로 활동하고 있다. 『대피소의 문학』(갈무리, 2019)과 『무한한 하나』(산지니, 2016)를 썼다.
smellsound@empas.com
https://transone.tistory.com
사진출처 _ 생활예술모임 곳간 페이스북 www.facebook.com/betweenscene
5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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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 2020년 12월 01일 at 12:17 PM

    회복은 단지 이전상태가 아니라 다시 시작할수 있는 자리에 선다는것이 와닿네요
    내 힘과 네 힘으로 바깥을 향해 계속 걸어야겠어요

  • author avatar
    권효준 2020년 12월 01일 at 3:16 PM

    좋은 글 감사합니다

  • author avatar
    이언옥 2020년 12월 01일 at 7:58 PM

    글을 여러번 읽고 또 읽네요.
    곳간의 불빛에 빚진 적이 있지요.
    그 불빛이 저의 회복, 바깥을 향한 걸음을 잠시간 비춰주었답니다.
    이 역시 불빛같은 글.. 고맙습니다.

    • author avatar
      artezine 2020년 12월 24일 at 12:33 PM

      안녕하세요 독자님,
      김대성 선생님의 글은 참 울림이 많은 글이지요.
      각자 또 함께 바깥을 향해 회복의 길과 가까워지는 2021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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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tata128 2021년 01월 21일 at 2:55 PM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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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 2020년 12월 01일 at 12:17 PM

    회복은 단지 이전상태가 아니라 다시 시작할수 있는 자리에 선다는것이 와닿네요
    내 힘과 네 힘으로 바깥을 향해 계속 걸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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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효준 2020년 12월 01일 at 3:16 PM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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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언옥 2020년 12월 01일 at 7:58 PM

    글을 여러번 읽고 또 읽네요.
    곳간의 불빛에 빚진 적이 있지요.
    그 불빛이 저의 회복, 바깥을 향한 걸음을 잠시간 비춰주었답니다.
    이 역시 불빛같은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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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ezine 2020년 12월 24일 at 12:33 PM

      안녕하세요 독자님,
      김대성 선생님의 글은 참 울림이 많은 글이지요.
      각자 또 함께 바깥을 향해 회복의 길과 가까워지는 2021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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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tata128 2021년 01월 21일 at 2:55 PM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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