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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칼럼③ 지탱가능한 예술활동

코로나19로 예측하지 못했던 변화가 일어나고 예술계에도 큰 위기가 찾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도, 예술도 계속된다. 여러 변화와 위기의 순간을 지내온 예술가들이 각자의 삶을 지키고 예술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네 명의 예술가와 함께 이야기 나누어 본다.
 
① 박찬국 여기서 예술/작가
  
② 정진세 극단 문 대표, 극작가‧연출가
  
③ 박성선 미리오페라단 예술감독
  
④ 이성미 시인‧여성문화예술연합 대표
“지속가능성이 아니고 지탱가능성이에요?”
나는 한 번 더 물었다. ‘지속가능성’이라는 말이 자주 회자되다 보니 ‘지탱가능성’이라는 단어는 다소 생소했다. 그러나 왠지 더 확 와 닿았다. 더 절박함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그 단어를 듣고 문득 생각난 것은 오페라단 사무실의 월세다. 아 왜 여기서 월세가 나와!
코로나 속 어느 예술단체의 고군분투기
올해 대부분의 공연이 취소되거나 혹은 무관중 공연으로 진행되면서, 공연 관련 종사자가 버티기 모드에 있을 것은 자명하다. 더 기막힌 현실은 이러한 코로나19의 터널이 언제 끝날지 모르며 ‘포스트 코로나’를 논하는 것조차 사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는 것도 고려해야 하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을 지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우리 단체를 지탱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공동체적 관점에서 예술 생태계를 바라보는 몇 가지 단상이 떠올랐다. 우리는 ‘예술적·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창작과 연주’라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서로에 대한 지지의 끈을 놓지 않고 함께 달려왔다. 이 순간에도 예술의 불씨를 꺼뜨릴까 노심초사하는 수많은 동료들과 그 고민의 흔적을 나누어보고자 한다.
2020년, 한 작곡가와 그가 소속된 예술단체 미리오페라단을 들여다보자. 그는 20여 년 전부터 예술교육과 현대무용과의 실험적인 협업 작업을 병행해오다가 10년 전부터 동료들과 창작집단을 만들고 공연을 해왔다. 유료 관객을 대상으로 한 극장 공연뿐 아니라, 최근 4년간 100회 이상 어린이 병동과 학교, 장애인 시설 등 공공시설에서 연주를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그간 국립오페라단 협력 민간오페라단으로 지정되어 학교에 찾아가는 오페라를 60회 가량 진행했다. 올해는 기존에 만들었던 키즈 오페라를 모아서 가족 오페라 축제를 기획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영상화 작업으로 전환되어 지역 학교에 제공된다. 매년 20회 이상 갔던 병원 공연도 영상 작업으로 대체되었다. 매년 무대에 올린 작품을 음악 그림책으로 만들어 왔는데, 올해는 대면 공연을 할 수 없어서 공연 내용이 담긴 그림책을 전달하면, 그 속에 QR코드를 통해 휴대폰이나 태블릿, 컴퓨터 등으로 우리가 영상으로 제작한 공연 전체를 관람할 수 있는 것이다. ‘신나는 예술여행’으로 예정했던 학교나 시설의 경우, 코로나가 심각하지 않았던 때는 현장에 방문했으나 광복절 이후 하반기 공연은 상당 부분 취소된 상태이다.
  • <안녕? 딸꾹!> 코로나 이전 공연장면
  • <칙칙폭폭 씽씽> 영상 녹화장면(사진_옥상훈)
예술작품은 공공재인가
오페라, 좀 더 넓게 보면 음악극까지 순수예술로 분류되는 장르의 무대를 올리면서 우리는 이것이 ‘문화 콘텐츠’ 즉 문화 상품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해왔다. 문화 콘텐츠는 ‘인간의 감성, 창의력, 상상력을 원천으로 한 문화적 요소가 체화되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문화 상품’으로 정의된다. 여기에는 연극, 오페라, 뮤지컬, 영화, 드라마, 게임 등이 다 포함된다. 얼마 전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 BTS의 음악도 문화콘텐츠다. 그렇다면 이른바 ‘순수예술’ 작품 중 유료 관객의 선택을 받을 작품은 얼마나 있을까. 사실 안타깝게도 그 비율은 매우 희박하다. 얼마 전 한국 창작 음악의 현재를 다루는 비평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에서 ‘음악의 공공성’에 대한 대담 기사를 다뤘는데, 서양음악, 국악, 심지어 실용음악 분야에서도 이미 유료 관객 시장은 거의 사라졌다고 진단했다. 작품성으로 정평이 나 있는 한 국악 단체 리더도 거의 100% 공공지원금으로 활동한다고 밝혔다. 올해 우리 단체의 사업도 지자체 지원사업, 국가 지원사업, 기업 사회공헌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맞다. 현재 순수예술영역의 공연은 대부분 공공 지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비영리 활동의 결과물이다. ‘공공재’처럼 대가를 치르지 않더라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비배제성과 비경쟁성을 가진다. 그러나 공공의 자원을 통해 제작되었더라도 그것의 저작권은 창작자가 가지며 공공의 소임을 다한 후에는 다시 민간에서 소비 유통될 수 있는 민간재의 성격을 가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공연예술은 ‘가치재’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교육이나 의료서비스처럼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으므로 지원하는 재화인 셈이다.
우리가 지탱가능성을 이야기할 때 공공재와 민간재의 혼합재, 가치재로서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은 예술이 가지는 특수성 때문이다. 공공재와 가치재가 모두 국가나 지역의 공공지원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예술행정가의 역할은 더욱 커질 것이다. 한편, 혼합재와 가치재로서 예술을 다루게 되면 예술경영의 영역이 부각된다. 예술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예술 생태계에 대한 진단과 이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역할을 명확히 해준다. 예술가 집단은 본연의 예술적 성취라는 목표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예술의 콘텐츠화도 고민하게 된다.
예술적 경험으로의 접근권
정보화 시대의 화두는 정보에 접근(access)할 수 있는 권리였다. 20세기 말은 정보에의 접근권이, 21세기 초에는 데이터로의 접근권이 미래 계급을 나눌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소유보다는 필요한 정보, 데이터로의 접근이 중요시되는 시대이다. 현재 공교육은 공공재로 제공된다. 지역 간 질적인 차이는 존재할지언정 일정 기간은 누구나에게 교육으로의 접근권이 보장된다. 그렇다면 문화예술 경험으로의 접근권은 어떤가. 예술 경험은 예술과 직접 마주하는 시간이 요구된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은 온전히 경험을 통해서만 내재화된다. 예술을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지는 접근하고 접촉하는 경험을 전제로 한다. 물론 국가와 지역은 그러한 노력을 다각적으로 기울여왔다. 문제는 공교육 서비스처럼 모두가 비경쟁성과 비배제성을 전제로 예술에 접근하는 권리를 누리는가 이다. 막대한 공공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늘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우리 단체가 방문했던 강원도 교육청 소속의 한 학교는 몇 년째 국립오페라단의 ‘찾아가는 학교 오페라’를 신청했으나 평균 6:1의 경쟁률을 뚫지 못하고 기회를 놓쳤다 한다. 그러한 학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강원도 교육청은 직접 문화 소외지역의 학교에서 예술단체의 공연을 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역시 시행 첫해에 3:1을 웃도는 경쟁률을 보였다. 학교만 살펴봐도 공급이 수요에 턱없이 부족하다. 수요를 채울 만큼 공급을 제공하자면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이러한 수요공급의 차이를 맞추려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우선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공연예술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가 누구나 누려야 할 보편적 복지로 자리 잡아야 한다. 다년간 공연하러 방문했던 각 지방의 학교나 기관에서는 오페라를 포함하여 실연 형태의 공연예술을 처음 접하는 어린이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수많은 콘텐츠가 온라인의 다양한 채널을 통해 넘쳐나지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실연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함이 있다. 예술에서의 공공성은, 일차적으로 누구나 질 높은 예술을 ‘직접 관람’할 권리를 누릴 때 실현될 것이다.
거기에 예술가가 있는가
우리 단체는 작가, 작곡가, 연주자, 안무가, 배우, 성악가 등 다양한 예술가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은 혼합재와 가치재(merit goods)이다. 국가나 지역, 기업 메세나 등 공공 지원을 받아 제작하고 공연을 하면서, 민간재로서 매력적인 콘텐츠를 개발하는 활동을 동시에 하고 있다. 현재는 공연과 동시에 음악 그림책을 만든다. 공공의 지원뿐 아니라 경제적인 자립을 통해 더 다양한 시도를 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머릿속의 아이디어가 아무리 많아도 시간 확보가 쉽지 않다는 것은 우리에게 늘 숙제이다. 우리 단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대부분은 예술대학이나 예술고등학교, 방과후 교실, 사설 교육기관 등에서 예술교육을 병행하고 있다. 라디오 작가, 레슨 강사, 대리운전을 하면서 그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한 개인 채널을 운영하는 예술가도 있다.
우리 중 전업 예술가는 없다. 이것은 달라지기 어려운 구조인가? 예술이 공공성에 기여하는 공공재적 성격을 갖는다면, 예술가 역시 거기에 집중할 수 있는 구조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당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공공재이니 일당은 지급해주겠소”라는 수준의 인식은 예술가를 소외시킨다. 이 부분은 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지탱가능성’을 논의할 때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공연 영상을 담은 음악 그림책 <칙칙폭폭 씽씽>
혼돈으로부터 새로운 영토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저자 하우저는 예술 안팎의 격변기에 이렇게 썼다.
“모든 예술은 혼돈과의 유희요 혼돈에 대한 싸움이다. 예술은 언제나 혼돈을 향해 점점 더 위태롭게 다가가서 더욱더 넓은 정신의 영토를 그로부터 건져오는 작업이다. 예술사에 어떤 진보가 있다면 그것은 혼돈으로부터 탈환해온 이러한 영토의 끊임없는 확대를 말하는 것일 게다.”
비대면이 일상이 된 지 8개월째이다. 우리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종류의 혼돈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과연 이번에도 우리는 영토의 확대를 이루어 낼 수 있을까. 그간의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여러 시도를 기반으로 앞으로 예상되는 변화에 관하여 콘텐츠를 중심으로 몇 가지 언급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금 영상화 작업과 그에 대한 지원이 한창이다. 이들이 어떤 수익 모델을 갖출지 현재는 잘 모르겠으나, ‘넷플릭스’나 ‘왓챠’와 같이 공연예술 콘텐츠를 위한 전문 플랫폼이나 허브가 생길 것이다. 연극의 시대에서 영화의 시대로 넘어오는 과정을 하우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영화예술의 일상적 양상은 영화 관람 행위의 즉흥적이고 서민적인 성격과도 일치하고 있다. 영화는 유럽의 근대문명이 그 개인주의적 도정에 오른 이래 불특정의 집단적 군중으로서의 관중을 위해 예술을 생산하려 한 최초의 기도이다.” 그동안 공연장의 문턱이 너무 높았던 집단적 군중이 이제 영화 이외의 다른 예술 콘텐츠를 골라보는 날이 오지 않을까.
둘째, ‘지역화(localization)’의 흐름이 가속화되면서 문화예술가들이 그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작은 공연, 일상의 예술화가 지역의 문화사랑방 같은 앵커스토어(Anchor store)를 중심으로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이미 감지되고 있는 흐름이기도 하다. 지역이 예술가를 키우고, 예술가들은 그들의 문화적 산출물로 지역의 색채와 예술적인 밈(Meme)으로 화답할 것이다. 셋째, 인터렉티브(Interactive)가 문화예술교육, 예술체험 콘텐츠의 핵심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비대면 예술 콘텐츠를 유료로 소비하는 관객이라면, ‘나도 예술가’를 지향하며 실시간 예술가와 교류하길 원할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적극적인 예술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인터렉티브한 콘텐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무용과 미술계에서는 그런 사례들이 보이는데, 이때 예술가는 일반 참여자의 예술 활동을 이끌어내는 매개자로서 그 역할이 확대된다. 이 외에도 10년쯤 후에는 너무도 당연시되는 어떤 것에 대해 지금을 돌아보며 “그때 정말 이게 없었어?”라고 할 만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우리를 버티게 할 든든한 ‘그것’
앞서 떠오른 단상들은 제법 오래 묵혀 둔 주제들이다. 공동체적 관점에서 예술 생태계를 둘러싼 이슈를 먼저 실타래처럼 뭉치뭉치 풀어봤다. 한편, 아주 단순하게 ‘나를 지탱하게 하는 것’을 이야기한다면 나의 대답은 좀 더 주관적이고 다소 낭만적이다. 첫 번째는 재미이고, 두 번째는 의미이며, 세 번째는 의리이다. 공연예술의 결과물은 각 구성원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표현형식이 더해진 과정과 결과이다. 개인적으로 매 작품을 만들고, 연습하고, 공연하는 동안 한순간도 재미가 없었던 적이 없다. 자신의 언어로 관객과 교감하는 순간의 재미와 즐거움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안다.
그에 더하여 작업이 주는 ‘의미’가 우리를 지탱하게 한다. 우리의 공연을 통해 누군가는 생애 첫 예술적 경험에 눈을 뜨고, 누군가는 예술 안에서 위로를 얻으며 눈물을 흘린다. 학교에서, 병원에서, 우리의 공연을 보는 관객의 반짝이는 눈을 마주할 때마다 거기에 내가 진짜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마지막으로 의리! 우리가 하고픈 작업을 끝까지 지지해주자는 암묵적인 약속은 우리를 이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든든하게 버티게 해주는 ‘빽’(뒷배)이다. 형식이나 방법은 언제든 유연하게 변화의 흐름에 맞추어 갈 수 있다.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함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겠다는 동료는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비록 상황이 더 악화되어 월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무실을 빼야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우리의 작업과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박성선
박성선
미리오페라단 예술감독/예술교육콘텐츠연구소 인터에듀아트 소장. 음악이론과 컴퓨터음악, 문화콘텐츠학을 공부했고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전북대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작품으로는 <빨래> <고백> <14feet> 외 다수의 무용음악과 음악극
<두부와 콩나물> <안녕? 딸꾹!> <수리수리 도레미> <칙칙폭폭 씽씽> 등이 있다.
sonnig1003@gmail.com
사진 _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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