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로 예측하지 못했던 변화가 일어나고 예술계에도 큰 위기가 찾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도, 예술도 계속된다. 여러 변화와 위기의 순간을 지내온 예술가들이 각자의 삶을 지키고 예술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네 명의 예술가와 함께 이야기 나누어 본다.
- ① 박찬국 여기서 예술/작가
- ② 정진세 극단 문 대표, 극작가‧연출가
- ③ 박성선 미리오페라단 예술감독
- ④ 이성미 시인‧여성문화예술연합 대표
삭제하기
지운다. 삭제한다. 버린다. 핸드폰에 있는 사진도 지우고, 컴퓨터에 있는 파일도 삭제하고, 방 안에 있는 물건도 버린다. 엄밀히 말하면 ‘기억’이나 ‘추억’을 삭제하는 것이고, 경험을 소멸시키는 것이며, ‘시간’을 없애는 것이다. 조금만 버리는 것도, 적당히 버리는 것도 아니다. 꽤 많이 버린다. 후회는 필수다. 작은 후회 정도가 아니라 눈물이 날 정도의 후회를 동반해야 한다.
최근에는 마음만 먹는다면 지우거나 치우는 일이 아주 어렵지 않다. 충동적으로 삭제 버튼을 누르고, “정말로 삭제하시겠습니까?”의 버튼을 누르고, 휴지통으로 가서 완전 삭제 버튼을 누르면 모든 것이 지워지기 때문에 약간 미친 척하고 시도하면 말끔히 사라진다. 물론 ‘복구’ 시스템이나 복원업체에서 다시 되돌릴 수도 있겠지만… 글쎄, 이 단계에 이르면 삭제하는 것, 그러니까 ‘리셋’에 가깝게 나의 모든 걸 내어주는 게 아주 두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무엇을 지울 것인가. 가급적 나쁜 추억도, 좋은 추억도 다 버린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광고하는 일은 이제 그만. 나의 멋진 순간들, 그 전리품들 모두 버린다. 의미 있는 것들, 의미 없는 것들 모조리 삭제하는 것이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 ‘빈 공간’을 남긴다. 아니, 가급적 ‘남긴다’는 생각은 떠올리지 않는다. 남기지 않아도 남아있다. 내 몸이 남아있고, 기억력이 보장하는 범위 안에서의 추억들이 남아있다. 이미 남아있는 것들로도 족하다.
예술가에게는 아카이빙이 중요하기 때문에… 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전에 다 버린다. 팩트가 있어야지, 하는 말을 주워섬기지 않도록 빨리 삭제한다. 가급적 그런 일에 연루되지 않도록 하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지울 수 있다. 물론, 과거의 공연 티켓을 갖고 가면 할인이 되는 경우 금전적 손해와 아까운 마음은 당연하다. 감수하면 된다. 너는 돈이 많냐, 하는 비판 또한 감수하면 된다. 아무튼, 삭제하는 일은 엄청난 후회와 감수를 각오하고 하는 일이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것들을 버릴 때는 제대로 재활용할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삭제할 때는 절대로 재활용하지 말 것!
장난하기
놀린다. 뻥친다. 웃는다. 괴롭힌다. 별명을 부른다. 슬쩍 가서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조롱이 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정색하는 장난을 했다면 금방 풀어준다. 더욱 친해지고 싶어서 장난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당신에게만 하는 장난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실패해도 다시 시도한다. 관계가 살짝 험악해질 때까지 도전한다. 장난을 치는 것은 새로운 인간관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공적인 것에서 사적인 것. 친밀한 것에서 내밀한 것으로 도약. 후회는 필수다. 작은 후회 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심하게 자책하게 되는 경우도 다반사다. 상대가 괜찮다는 미소를 보인다면 상관없지만 눈물을 보이면 끝장이다. 그렇게 떠나보낸 사람도 있다. 몇 사람 정도 떠나보내면 장난꾸러기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위계폭력과 성폭력, 감수성의 문제가 중요해지면서 장난이 줄어들었다. 상대의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트리거 또한 장난의 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장난은 점점 더 고차원의 일이 되어버렸다. 장난하는 상상을 머릿속으로 몇 번 돌려보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당연히 현실에선 시도할 수 없다. 장난이 아닌 것이다. 연극이라는 ‘가상’의 무대에서, 여전히 장난을 시도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너무 안전해서 장난이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요새 나의 전략은 장난을 ‘장냥’이라고 발음하면서, 장냥을 시도하고 상대에게는 장난이 아닌 척을 하고 있다. 장난이 아닌 것이다.
아무튼, 그럼에도 장난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것을 받아주는 마음이 넓고 미소가 아름다운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의 관객들을 위해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강조하지만 장난은 최종적으로 그것을 받아주는 사람을 위해 하는 것이다. 장난은 우리의 관계를 더욱더 깊이 있게 혹은 얄팍하게 만들어준다. 조금은 의미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아주 실없는 인간이 되기도 한다. 아무튼, 공적으로는 신뢰가 하락하더라도, 개별적으로는 특이한 사람으로 남는다. 그러면 된다. 공직자 중에 장난꾸러기가 없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된다. 나의 야망을 위해서라도 장난 아니 장냥은 지속되어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인간관계보다 장난이 더 좋다. 장난으로 인해 용서를 구하는 순간에도 장난기를 발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단, 나의 장난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상대에게는 진심으로 사과할 것. 그 상대의 눈앞에 나타나지 말 것.
상상하기
너무나 빤한 일들 말고, 우연한 일들을 상상한다. 뒷걸음질 치다가 뭔가를 이뤄낸 상황들을 상상한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세상을 구한 사람들을 상상한다. 숭고하지 않거나 위대하지 않은 순간들을 상상한다. 영웅이라고 알려진 이들의 일상을 떠올리고, 평범하다고 여겨진 이들의 영웅적인 순간을 그려본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 사람이 되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나 또한 나는 왜 내가 되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나다운 나가 아니라, 나답지 않은 나는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상상들.
대체로 상상은 보다 멋진 것, 놀라운 것, 대단한 것, 지금보다 더 나은 것을 떠올리기 위한 발상일 것이다. 인간은 상상을 바탕으로 미래를 그려왔다. 그것이 인류가 보편화한 ‘성장’의 기본적인 논리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류의 상상은 굉장히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인류를 힘 나게 하는 그런 상상 말고 아주 김새게 하는 상상. 뭔가가 낭만화되거나 신화화되는 순간이 방해받는 상상. 의미 있는 순간이 수포로 돌아가는 상상.
SF소설은 상상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에게 경험하지 못한 세계의 경이감을 주는 장르다. 허나 최근의 SF소설에서의 상상은 끔찍한 것, 추악한 것, 처참한 것을 더 많이 떠올린다고 한다. 심지어 지금과 같은 재난 상황에서는 일상적이고 당연했던 것, 이를테면 학생이 학교에 가고, 가수가 콘서트를 하며, 운동선수가 경기를 뛰는 일들이 SF의 소재가 된다고 한다. 예시를 들어놓고 보니 왠지 미스터리나 스릴러에 더 가깝지만… 바꿔 말하면 작가들의 눈에 포착된 우리의 미래가 그렇다는 말이다. 부정할 수 없다. 상상의 방향성을 바꿔야 한다.
나는 미래의 시상식을 상상한다. 그런데 그 시상식이 멀쩡한 경우는 별로 없다. 나는 시상식에서 매번 깽판을 놓는다. 예술가에게 상은 굉장히 드물고 영예로운 것이기에 거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상이 뭐냐며, 다 필요 없으니 다들 정신 차리라고 멘트를 날린다. 예술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퇴보하고 있다고 용감하게 소리를 높일 것이다. 실제에도 그런 용기가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물론 상상이긴 했지만 그런 나의 행동에 감화받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최근에 한 의미 없는 상상이다.
사과하기
삭제하기, 장난하기, 상상하기. 힘들고 지칠 때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삶의 지탱술이다. 다른 예술가에게는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의미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 그러니까, 어쩌면 나는 ‘의미’라는 것에 대해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몰라. 삭제하기는 의미를 없애는 노력이며, 장난하기는 의미를 줄이는 시도이고, 상상하기는 의미를 바꾸는 실천이니까. 인간의 의미에 대해 무진 애써왔던 예술가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다. 언제나 나의 생각은 틀리고 전망은 어그러졌으니, 이번에도 그러하길. 사과는 하겠습니다. 미안.
- 정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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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문 대표. 극작가 겸 연출가.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에서 편집장을 했고, 서울프린지네트워크와 삼일로창고극장에서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 공연예술 현장에서 창작과 비평 등의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전국싸움대회> <브레인컨트롤>
<세월호오브퓨처패스트> <액트리스원 : 국민로봇배우> <액트리스투 : 악역전문로봇> <구호의 역사 1945-2015 >등이 있다.
lilytulips@nate.com
사진 _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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