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들었던 얘기 몇 가지. 어느 초등학교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물었다. 자연이란 무엇인지? 아이들은 저마다 “꽃이다” “숲이다” “지구다”라는 말을 하는데, 한 아이가 슬며시 그랬단다. “자연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 자연”이라고. 또 하나. 들판을 가다 예쁜 꽃을 보고 아이는 “와, 예쁘다!” 하는 탄성과 동시에 꽃을 꺾었다. 어머니는 교양있게 “꽃아, 미안해”하며 꽃을 꺾었다. 스님들이 나무하러 갔다. 어느 스님이 자꾸 죽은 나무만을 모으자 한 스님이 물었다. “거긴 여러 생명들이 깃들어 사는데 그걸 불태우시게요?”. 어느 봄날 친구가 청도의 한 마을에 갔더니 마을이 홀라당 비어 있는데 한 어르신만이 과수원에서 일하고 계셨단다. 모두 상춘여행을 가셨는데, 왜 할배만 일하시냐고 물으니 답이 돌아왔다. “벌과 나비가 없으니 내가 수정하는 것이여!” 약간의 화가 섞인 응답을 들은 친구는 아인슈타인의 얘기가 떠올랐단다. 벌이 없으면 인류는 멸망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여기 실제 현존하는 것이었다.
그냥 무심결에 넘길 이야기들인 것 같지만 어쩌면 우리는 오늘 코로나19의 현실을 예측하고 염려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열심히 공장을 만들고 아파트를 짓고 자동차와 비행기에 의지에 여행을 떠나고 옷가지까지도 일회용으로 사용해 가며 편리와 안락을 좇던 시절이 바야흐로 지속되어 왔다. 그때 자연은 신음했으며, 또 어느 인류는 값싼 노동력과 환경공해로 신음하고 있었다. 쓰나미나 빙하의 면적감소나 바다 쓰레기 같은 것을 통해 확실하게 우리에게 시그널(signal)을 보냈음에도 내 일이 아닌 것처럼 외면했다. 편리한 삶과 더 부유한 경제를 위해 마을은 해체되고 바람마저도 길을 잃어버린 아파트와 마천루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매일 한 뼘씩 우리를 키워줬던 골목길은 사라졌고, 지청구하며 사회적 성장을 응원했던 아저씨나 할머니들도 슬며시 자취를 감췄다. 사거리나 길모퉁이에 있던 평상은 손택수 시인의 <앙큼한 꽃>이라는 시처럼 주차금지 팻말 대신에 들어선 화분 따위는 존재감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낡은 추억을 떠올리는 것은 이제 우리가 다시 무언가를 결심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다가온 위기, 전환의 계기
2000년대 초반 문화예술교육이 등장했을 때, 나는 드디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고 훌륭한 생애의 전환점을 투영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장르예술이 가진 고유한 방법을 통해 진행되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장의 이해나 요구와도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밀고 당기며 새로운 방식의 교육론을 세워나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또한 실사구시의 문화교육도 병행해 나갈 것이며, 이것이 미래세대의 문화감수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리라 믿었다. 그런 기대가 결코 헛되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힘든 것은 어느 학교를 비롯한 특정한 공간만이 교육의 최적지로 꼽히며, 일상과의 접촉면은 용납되지 않은 사례가 많다는 점이다. 관계의 사회에서 함께 끙끙대며 궁리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식이나 새로운 시도를 통해 진일보하는 문화예술교육의 통 큰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세상은 달라졌다. 우리의 활동은 더욱 위축될 것으로 예견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우주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는 시간이 도래했다. 즉 일상생활권에 사물들이 바로 교재가 되고 학습의 도구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생태감수성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충분한 공부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는 저 생명체 하나와 내 생명체 하나가 동일한 무게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오늘 문화예술교육이 기능적이고 학술적인 부분으로만 치우친다면 우리는 생태와 교감하며 인간이 이뤄낸 수많은 직유와 은유와 공감각적 사유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며느리밥풀꽃이라는 꽃 이름에서 천대받고 따돌림당했던 며느리의 수난 시대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하고, 애기똥풀에서 줄기를 꺾으면 노랗게 흘러내리는 풀의 수액이 아기들의 똥과 같아서 이름 붙여진 내력도 연상해 낼 줄 알아야 한다. 단풍나무가 헬리콥터의 프로펠러와 같은 씨앗을 단 이유는 어미 나무로부터 더 멀리 날아가야 자신이 영토를 가지며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도둑가시가 씨앗을 날리지 않고 지나가는 동물이나 사람에 엉겨 붙어서 스스로 떨어지거나 떼어내면 그 자리에서 발육하는 생명의 경이로운 생존방식을 배우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감응하고 공감하기
담양 소쇄원에는 봉황을 기다리는 집이라는 뜻을 지닌 초가정자인 ‘대봉대’가 있다. 그 옆에는 벽오동나무가 심겨 있다. 딸을 낳으면 벽오동을 심어 악기나 장롱 같은 것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라 알고들 있다. 한데 이 장소에서 이 나무는 여러 가지 은유를 지니고 있다. 첫 번째는 나라가 태평성대하게 다스려질 때 상상 속의 새 봉황이 나는 것이니 어진 성군이 나와 선비들과 더불어 왕도정치의 이상향을 실현해 달라는 주문이 담겨 있다. 봉황은 아무 곳에나 앉지 않고 벽오동나무에만 깃들이며 대나무의 열매인 죽실을 먹고, 동쪽에서 솟는 맑은 단물인 예천의 물만 먹는다는 점에서 소쇄원 대나무와 오곡문이라는 담장 밖에 있는 샘이 뒷받침해주고 있다.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를 잃은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가 기다린 것은 선비들이 존중받는 태평연월을 기대하기 위해 저 나무를 심은 것이다.
두 번째는 벽오동나무는 거문고를 만드는 재료이다. 옛적 백아라고 하는 이가 거문고의 명인이었는데 그의 소리를 알아주는 종자기라는 이가 있어 백아의 현이 울릴 때 그 의미가 무언지 척척 알아냈다고 한다. 오로지 종자기만이 백아의 거문고 연주를 알아주는지라 이 둘의 사이를 “지음”이라고 칭했다. 오늘날로 치면 “최애”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인 지음은 둘도 없는 친구사이를 일컫는다. 한데 어느 날 종자기가 죽고 말았다. 이에 백아는 거문고를 절단내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백아절현(伯牙絶絃)이라는 말이 탄생한다. 소쇄원을 노래한 <소쇄원 48영>이라는 시에는 옥추횡금(玉湫橫琴)이라는 구절이 있다. 물가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는 선비를 노래한 것인데 이 구절 안에서 또 한 번 양산보는 선비들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왕을 원했음을 연상할 수 있다. 어느 한쪽만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서로에게 감응하고 공감하는 시대를 간절히 바란 한 시골 선비의 염원이 벽오동나무에 이식되어 나타난 것이다.
호명하고 가치를 복원하는
비대면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문화예술교육에서 우리가 할 일은 그 첫 번째가 관계의 중요성을 다시 상기하는 것이라 여긴다. 저 홀로 독야청청할 수 없는 인간사회의 섭리 안에서 무한경쟁에 시달려왔던 우리였다. 표피만 관계의 사회로 칭하고 정작 모든 부분에서 선점하고자 했던 욕망들을 내려놓을 때가 왔다. 서로의 이야기에 경청하고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해주는 인간사회의 기본을 복원하는 것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저마다의 이름을 불러 보자. 친구의 이름, 학생의 이름, 나무의 이름, 마을의 이름, 풀꽃들의 이름, 잡초의 이름.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비로소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뜻말이 들어올 것이다. 모든 생명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존중과 배려가 내 안에 자리하게 된다.
두 번째는 이를 바탕으로 생태적 감수성과 문화예술교육을 접목하자. 마을 하나가 존립하는 데에 수많은 것들이 함께 수반 된다. 그 마을을 구성하는 하나하나를 다시 찾아보자. 신호등, 주차 방지 턱, 엘리베이터, 공원, 지하도, 육교, 가로수, 화단, 우체통, 우수관, 표지판 등등. 그것이 왜 존재하는지와 그 쓸모가 어떻게 우리를 거두어 주는지에 대해서. 사용 용도와 심미적 가치와 명명된 이름 사이에서 우리를 구성하는 기술력이 어디를 지향하는지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문화예술교육은 인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뤄졌던 기술중심, 성장중심의 사회에서 무시하거나 간과하고 생략되었던 모든 것들을 다시 호명하고 가치를 복원해 내는 가장 유용한 쓰임이 될 것이다.
안도현 시인의 <애기똥풀> 마지막 연이 떠오른다.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
- 전고필
- ‘전고필’은 고등학교를 졸업시키겠다는 아버지의 다짐을 반영한 이름이다. 관광을 전공하고 슬쩍 그 이름을 ‘GO FEEL’로 바꾸며 모든 사물에 관심을 가지며 배우고자 노력 중이다. 광주북구문화의집에서 문화예술교육의 시작 과정을 아르떼와 함께했으며, 관광과 문화를 토대로 문화현장을 누비는 문화기획자이다. 한 달에 한 권 정도 팔리는 향토사 전문책방 ‘이목구심서’를 고향 담양에서 운영하고 있다.
tournote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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