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출장을 다녀온 후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 잠들지 못한 첫새벽에 인왕산에 숨어들었다. 숲이 이루는 수많은 무늬와 무한한 초록에 매료되었다. 산을 바라보는 대상으로만 여기던 내가 인왕산에서 깊은 위안과 야생의 위로를 받았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연과 격리된 채 자란 나에겐 의외의 경험이었다. 그렇게 산을 드나들던 어느 날, 누워서 주변을 돌아보던 나는 내가 인왕산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명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름의 문턱에 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산딸나무, 흰색 꽃자루가 하늘거리는 큰까치수염, 개울가 바위 구석구석에 피는 흰털머위꽃은-나중에 이름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는-그냥 이름 모를 흰 꽃들이었다. 수백수천 종, 수만 종의 식물들은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 인간이 만든 도시나 물건들에 대해서는 꽤 많은 것을 아는데 엄연히 우리 옆에 존재하고 공생하는 산과 숲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이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식물이나 동물도 인간과 같은 생명체로서의 위계에 있을 터인데. 우리는 도시에서 자연과 격리된 채 우리와 오랫동안 공존, 공생해 왔던 생명체들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이다.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움이 여러 생각을 만나 최근 몇 가지 기획을 만들었다.
자연과의 투쟁과 격리
싸움이 시작되면 멈추기가 쉽지 않듯이 산다는 것도 멈추는 게 쉽지 않다. 인간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생존한다는 것 자체가 오랫동안 자연과 투쟁이었고 싸움이었다. 그 투쟁의 시간과 기록은 사실상 인류의 역사가 되었다. 손에 돌도끼를 들고 지구 최상위에서 야만적 생명체로 성장한 인간은 확장된 기계팔인 포크레인과 불도저로 자연과의 오래된 공존협정을 파기시켰다. 도시라는 에너지와 경제적 효율성이 극대화된 고밀도 공간을 만들어 자연과 격리되어 멀리 떨어져 살아야만 자연환경을 오히려 보호하게 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리처드 플로리다(Richard Florida)는 『도시의 승리』에서 “도시에 자연을 끌어들이는 친환경적인 도시는 오히려 에너지 방출 등으로 비 친환경적인 도시가 된다. (…)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과거의 흔적들을 보호하는 것도 가치가 있지만 도시가 방부 처리된 호박 화석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지나친 보존은 도시가 그곳의 거주자들을 위해서 더 새롭고 크고 나은 건물을 제공하는 것을 막는다. 우리가 녹지에 둘러싸여 살자고 주장할 때 그것은 환경에 주는 피해를 극대화하게 된다. 숲속 생활이 자연 사랑을 보여주는 좋은 방법이 될지도 모르지만 콘크리트 정글 속에 사는 것이 사실은 훨씬 더 친환경적이다.”라고 말한다.
도시를 자연과 철저히 분리시키고 도시에 남아 효율성을 방해하는 낡은 건물과 문화재들을 없애서 인간의 안전하고 짧은 거리 이동(빠른 출퇴근)을 확보하고 수직상승하는 효율적인 콘크리트 건물을 지어서 도시의 핵심적인 공적 서비스와 인프라를 집중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 개발주의를 합리화하는 이론적인 근거다. 그렇게 만든 인간들의 도시와 광장은 각자의 진실이 무기가 되어 목소리를 높이는 아수라장, 난장이 된 지 오래다. 타인의 슬픔에 주목하지 않는 우리는 자신의 진실을 확고히 하기 위해 광장에서 피 터지게 싸운다. 우리가 사는 이 도시는 그래서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역할극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선과 악의 진실게임은 도시의 일상이다. 자연에 가해자가 되었던 인간과 도시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존중하고 아픔을 배우면서 우리의 아름다움도 회복될 필요가 있다.
자연을 도덕적 영적인 심미적 대상으로 보는 맹목적 자연주의도 위험하지만, 개발주의적 시각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자연은 심미적 대상으로 목가적 환경으로는 아름답고 인간 문명이 가져다줄 수 없는 깊은 ‘야생의 위로’를 주지만 우리에게 다양한 위협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태풍이나 홍수, 지진 같은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은 평화로운 생존을 위해서는 자연을 개선하거나 수정하기도 해야 한다. 다만 자연의 수정과 개선을 지구상의 최상위 계층인 인간 중심적 시각에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최근 우리가 겪고 있는 초유의 팬데믹 시대를 통과하면서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 파기되었던 협정을 회복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종 우월적 사고를 버리고 지구라는 행성의 다른 생명체들과의 공존, 공생을 회복하는 노력을 시도해야 한다. 자연주의와 개발주의의 중간영역이 필요하다. 자연의 아름다움 자체에 매몰되어 음풍명월(吟風詠月)이나 웅얼거리는 탐닉함이 아니라 자연을 잘 알고 가까워져야 한다. 인간의 조화로운 삶이 있는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연을 살펴야 한다.
지구 생명체의 공존을 위한 첫걸음
보안1942(통의동 보안여관)에서 올해 기획한 《식물계 Plantae》《다 함께 차차茶》는 이런 개인적 부끄러움에서 출발한 각성을 전시와 프로젝트로 구현한 것이다. 《식물계 Plantae》는 위에서 얘기한 인왕산에서의 경험이 출발점이었다. 식물은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 공생, 공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존 전략을 짜고 실행 중이지만, 인간은 지구에서 가장 이기적 생명체다. 식품이든 심미적, 시각적, 정서적 감수성을 제공하는 반려대상으로써 이익을 줄 때만 식물과 동물을 사용해왔다. 식물과 동물, 사람과 자연이 각자의 세계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공부가 필요했다. 이름 모를 꽃이라 막연히 부르던 식물들이 무언인지 그들의 생태계는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했다.
《다 함께 차차茶》는 차(茶)를 마시는 행위를 통해서 자연과 나 사이의 파기된 협정을 연장하고 어둠에 잠식된 우리의 세포와 신경을 푸른 찻잎으로 회복해보려는 것이었다. 단순히 인간의 기호음료로써의 차가 아니라 차를 통해서 세상의 어두움이 자연 속에서 다스려지며 밝은 기운을 되찾는 것이다. 대지의 봄기운을 모으며 올라오는 여린 찻잎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자연과 나,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하기 위하여 다 함께 야생차밭을 탐방하고 찻잎을 따고 차를 만들어서 마시며 자연과 나 사이의 공생, 공존에 대해 모색해 보는 것이었다. 차도구들을 단순한 공예작품이 아닌 이런 소통의 가치로 확장시켜보는 것이었다.
자연 속에서 나는 과연 어디에 위치해 있고, 내가 태어난 땅과 지역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지를 성찰해야 할 때다. 자연을 해치지 않고 자연과 공존, 공생하는 방법에 관해서 공부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수행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시도를 해야 한다. 자연을 야생 상태로만 두기에 인간은 여러모로 나약하다. 자연의 종 다양성을 존중하고 지구가 인간만의 것이 아니고, 식물권, 동물권을 생각하는 자연과의 공존적인 개발의 중간영역이 만들어져야 한다.
캘리포니아의 주택단지는 집 마당과 현관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미국식 정원은 자연과 공동체의 경계인 담이 없는 것을 공동체의 미덕으로 여긴다. 개척주의자들의 자연에 대한 보상의식인지 자연과 인간의 영역에 선을 긋지 않으려 하지만 인간의 독재에 휘둘린 잔디밭이 집집마다 상징적으로 놓여있다. 그것이 미국식 공공적 삶과 마을공동체를 대변한다. 반면 제주도의 돌담은 자연과 인간의 경계선을 만든다기보다 자연과 인간의 중간영역을 쓰다듬는 하나의 선을 긋는다. 야생의 자연계와 인간계가 조화롭게 만나는 경계다. 자연을 동경하지만 심미적 자연주의는 인간의 상상일 뿐 야생의 자연은 다양한 형태로 위험하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경계가 필요하고 담이 필요하다. 개발주의자와 자연론자로 양분화된 선택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중간계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자연과 서로 결절되지 않으면서 경계를 이루며 조화로운 인간 공동체가 필요하다. 욕설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된 도시와 광장에 자연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공존시켜야 한다. 인간의 권력과 욕망을 내어놓고 지구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위치시키고 자연과 인간들의 새로운 상상계를 열어갈 수 있는 중간계가 있어야 한다. 자연의 무한한 초록과 그 수많은 우아함, 계절과 시간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아름다움, 봄과 가을이 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 상실된 인간 도시에 자연 상상계를 활짝 열어갈 수 있는 것은 문화적 예술적 행위들이 우선이다.
- 최성우
- 생활밀착형 문화예술공간 ‘통의동 보안여관’ 대표. 한국에서 미술교육과 회화를 전공한 후, 프랑스로 넘어가 파리1대학에 미술사를, 프랑스 디종(Dijon)대학에서 문화 경영 및 정책 최고 전문가 과정을 졸업했으며, 프랑스 문화부 국제문화정책연수단을 했다. 2007년, 통의동 보안여관의 과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오픈 플랫폼 문화공간으로 재구성했다. 2017년에는 보안여관 바로 옆에 숙박, 서점, 카페 겸 바, 갤러리를 한 건물에 모은 ‘보안 1942’를 열었다. 현재 일맥문화재단 이사장,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예술경영학과 미술경영 전공 책임교수, 서울 종로문화재단 이사, 국립민속박물관 이사, 부산현대미술관 운영위원, 부산비엔날레 조직위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summaron79@gmail.com
메인 이미지 제공 _ 보안1942 photo by 유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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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이 특히 공감이 되며 중간영역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경제적 상황과 관계없이 차별없이 누릴 수 있는 그런 영역을 기대하며 그 중간영역을 넓힐 수 있는 우리 개개인의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지 찾아봐야 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독자님,
저도 이 글을 읽으면서 현재의 삶을 반성하며 지구 생태계를 위한 행동을 하리라 다짐했더랍니다.
계속해서 문화예술(교육) 영역에서 지구를 위해 어떤 활동을 하고, 할 수 있는지 참고할 수 있는 기사를 소개하겠습니다.
지속적인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