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음악, 대중음악, 국악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이다. 서로 음악의 구성과 특징이 많이 다르다. 극단적인 경우 서로 자신의 음악이 진정한 음악이고 나머지는 음악이 아니라고들 한다. 가수도 마찬가지다. 인디 가수, 아이돌 가수, 록커, 통기타 가수 등은 하나같이 팬들의 사랑을 받는 가수이다. 서로 닭 소 보듯 소 닭 보듯 한다. 옛날에 글 짓는 사람들이 서로를 얕잡아본다고 해서 문인상경(文人相輕)이라 했다. 자존심이라면 예술인도 문인에 못지않은 만큼 예인상경(藝人相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노자와 음악,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조합이다. ‘노자’라는 책이 모두 5000여 자로 분량이 적을 뿐만 아니라 음악을 다룰 법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괜한 걱정일 뿐이다. 「노자」를 뒤져보아도 「논어」, 「묵자」, 「맹자」, 「장자」, 「순자」만큼 음악을 많이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노자가 음악을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노자」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음악에 대한 강한 주장이 몇 가지 들어있다. “오색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오음이 사람의 귀를 먹게 하고, 오미가 사람의 입맛을 잃게 한다(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12장).” 「노자」의 문장이 어렵다는 악명은 들어왔지만 오음이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지 않고 먹게 한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할 수 있다. 이것은 노자가 처음부터 노리는 글쓰기이다. 「노자」는 산문이 아니라 경구로 되어있는 만큼 “꽝!”하며 사람에게 충격을 주듯이 상식을 파괴하는 소리를 내지른다. 이 소리를 듣고서 사람들은 그간 빠져있던 관행과 상식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오색은 검정, 하양, 빨강, 파랑, 노랑의 다섯 가지 색깔을 가리키고 오미는 단맛, 짠맛, 신맛, 쓴맛, 매운맛의 다섯 가지 맛을 가리킨다. 오음은 궁, 상, 각, 치, 우의 다섯 음을 가리킨다. 사람은 처음에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처럼 생존을 위해 자연을 분류했다. 이어서 처음의 분류를 다시 종류, 특성, 감촉 등에 따라 재분류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류 체계가 오색, 오미, 오음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 분류 체계에 따라 경험을 구분하고 세계를 인식하게 된다.

 

이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이 가능하다. 맛과 색깔에 다섯 가지 이외에 다른 것이 있듯이 과연 음에는 궁, 상, 각, 치, 우 등 다섯 가지밖에 없을까? 이러한 물음이 단순한 회의가 아니다. 자연의 소리이든 악기의 소리이든 사람의 목소리이든 사람이 오음으로 소리의 세계를 완전하게 나타낼 수 있을까, 라는 원초적인 회의를 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색깔의 부족을 느끼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원하는 색깔이 있으면 그림을 더 잘 그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음악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세계의 다양한 소리를 오음의 차이로만 환원하고 나머지를 배제한다면 오음이 사람을 오음의 틀에 길들이는 것이고 다른 음의 세계에 귀를 막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로의 음악을 깔보는 악인상경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노자의 말은 제도화되고 양식화된 오음의 음악 세계를 비판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노자는 오음의 분류 체계를 비판만 하고 새로운 음악의 가능성을 말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짧지만 함축적인 제안을 하고 있다. “위대한 그릇은 이루어지지 않고, 위대한 음악은 소리가 없고, 위대한 형상은 모습이 없다(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41장).” 소리는 음계의 규정을 가진 오음에 맞느냐를 따지기 이전에 먼저 마음(의식)의 흐름으로 드러난다. 환희에 벅찬 사람은 가슴이 터질 듯한 감동으로 소리를 지르고 몸짓을 하는 것이지 소리와 몸짓의 규정에 맞추어서 감동을 가둔 채로 드러내지 않는다. 마음에서 싹트는 그릇, 소리, 형상은 아직 물질의 질감과 형태를 갖추지 않았지만 표현하고자 하는 ‘나’의 등가물이다. 그래서 위대하고 진정한 것이다. 특정한 분류 체계에 맞는 음악만이 음악이 아닌 것이다. 아예 어떤 꼴, 소리, 모습조차 없는 원초적인 상황으로 눈을 돌리라고 말한다. 노자는 2장에서 “음과 소리가 서로 어울린다 (音聲相和)”는 말로 음의 체계와 마음의 소리가 서로 배제하지 않는 새로운 음악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이것은 기존의 음악이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이 생겨나는 살아있는 예술의 실제 세계와 일치한다. 물론 기성의 예술이 권력화되고 사유화된다면 새로운 예술의 실험과 창작을 쓸데없는 짓으로 무시할 것이다. 이에 대해 노자는 말할 것이다. “네 음악이 사람의 귀를 먹게 하고 네 그림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할 것이다!”

 

 

 

 

글 | 동양철학자 신정근

동양철학에서 문화예술교육의 메시지를 찾다
 
서울대학교에서 동서철학을 배우고 한제국의 금고문 논쟁을 주제로 석사를, 인(仁) 개념의 형성 과정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로 시대와 사회의 맥락에서 철학과 예술 미학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다양한 연구 성과로 밝혀내고 있다. 요즘 현대 철학없는 동양 철학의 문제를 새롭게 풀어내려고 하면서 동양철학 텍스트의 재해석에 열을 올리고 있다. 아울러 철학 사상 위주의 동양학을 예술 미학의 맥락에서 재조명하고자 긴 준비기간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