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희롱하는 사나이들』이라는 미국소설이 있다. 이 작품은 소설가 G. 시드니가 1950년 한국전쟁 때 미군 해병 장교로 참전한 후 돌아가 교수로 재직하면서 쓴 자서전적 소설이다. 노근리 사건과 유사한 당시의 비극적인 참상을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시드니는 머리말에서 “한국인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 많이 불쾌해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덜도 더도 보태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쓰겠다”라고 전제하고 있다. 이 작가는 한국에 대한 첫인상을 비행기 트랩을 내리면서 맡은 은은한 똥냄새로 묘사하고 있다.
197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한국의 농사는 인분이 원천이었다. 시골 집집마다 똥구덩이 두엄을 만들어 놓고 인분을 썩혀 그것을 밭에 뿌려 거름으로 삼았다. 당시 인분은 훌륭한 퇴비였다. 한국의 들녘에는 어디를 가나 이 냄새가 저녁노을처럼 오롯이 스며있었다. 은은한 똥냄새는 곧 우리네 시골의 냄새였다. 봄이 되면 썩힌 인분을 밭에 뿌리고 그곳에 채소를 심고 거기서 자란 채소를 먹어 몸의 에너지로 삼고 다시 그 채소를 배설하여 다시 거름을 얻었다. 비록 냄새는 지독했지만 과거의 농법은 그야말로 버릴 것이 하나 없는 자연친화적 선순환 농법이었다. 현재의 농법도 예전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은 인분 대신 소똥, 돼지똥, 닭똥을 사용할 뿐이다. 요즘의 퇴비는 잘 발효시켜 정제되어 있기 때문에 밭에 뿌려도 냄새가 그리 자극적이지 않다. 그러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농사를 짓는 유기농 농법은 냄새가 강렬하다.
우리는 누구나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의 똥냄새를 맡고 산다. 자신의 이 체취를 매일 맡지 못하면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이상 신호다. 살기 위해 음식을 먹고 소화된 음식의 영양소가 몸에 활력을 주고 음식의 찌꺼기가 장에서 잘 부패되어 똥으로 나오고 그것이 우리 몸을 살린다. 똥은 에너지의 원천이요, 생명의 근본인 셈이다. 몸을 잘 씻지 않고 그대로 두면 발가락, 콧구멍, 겨드랑이, 사타구니 등등에서 야릇하고 고릿한 냄새가 나게 마련이다. 고약한 냄새지만 자기 것은 본능적으로 그 냄새에 이끌려 두세 번씩 맡곤 한다. 이 원초적인 냄새는 똥냄새와 닮아 있다. 몸에서 나는 고릿한 냄새와 똥냄새는 곧 근본의 냄새다.
가을이 되면 도심의 거리에는 똥냄새와 비슷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가로수 은행나무에서 열매가 떨어져 나는 냄새다. 은행나무는 현존하는 나무 중 태고적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3억년이라는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나무다. 이 지독한 냄새는 은행나무가 이 지구상에 가장 오래 살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식물도 똥이 있다. 식물의 똥은 낙엽이다. 낙엽은 땅에 떨어져 흙과 섞여 그대로 부토가 되고 이 부토는 다음 세대를 탄생시키는 근원이 된다. 대자연의 삼라만상은 자연 질서에 따라 근본으로 돌아가 재생하기를 반복하며 자연의 선순환구조를 묵묵히 지켜오고 있다.
도시는 오직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도시는 거의 모든 것이 인위적이다. 자연 상태의 것이라곤 하늘, 공기, 햇빛뿐이다. 땅은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덮여 있고 생활 주변의 모든 물건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도시 속에 조성된 공원을 들어가 보자. 겉으로 보기에는 풀과 꽃, 나무가 심어져 있지만 인간을 위한 인위적 자연이다. 도시 가로수 낙엽은 근본의 회귀도 없고 재생도 없다. 떨어지면 그냥 쓰레기다.
30여 년의 대학 생활을 마치고 농촌에 정착한 지 3년이 되었다. 나는 지금 농부다. 평생 선생 노릇만 해왔던 터라 배운 것이라곤 가르치는 일밖에 없던 나였다. 근육에 힘도 없고 뽀얀 손, 심약하고 낯가림도 심한 백면서생이 무슨 농부 노릇을 하겠느냐는 핀잔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난 한국전쟁이 한창인 무렵 피난살이 때 부산에서 태어나 전쟁이 끝나자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서울에 정착한 후 줄곧 도시에서 자랐다. 어릴 적 난 늘 방학이 되면 시골 할머니 댁을 가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농촌은 나에겐 로망이었다.
내가 사는 농촌은 멋진 경관을 뽐내는 전원주택 단지가 아니다. 전형적인 산골 농촌이다. 그나마 인공적 손때가 덜 묻은 곳이다. 그냥 밭이 있고 논이 있다. 태풍이 불면 바람 걱정해야 하고 가뭄이 들면 물 걱정해야 하고 장마철이면 홍수 걱정해야 한다. 늘 하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그저 그런 농촌이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자연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동식물이 있고 그와 더불어 사는 착한 사람들이 있다. 아직은 근본이 숨 쉬고 있는 곳이다.
2년 전부터 교양학부에 개설된 도시농부학교 강의를 맡고 있다. 걸음마도 채 떼지 못한 초보농부가 무슨 농부학교 강의를 하느냐고 자책도 했지만 난 하기로 결심했다. 가르치게 되면 더 배우게 되고 농촌을 더 알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상당수의 청년들이 도시에서 태어나 성장해 호미 한번 제대로 잡아 보지 못했을 터였다. 도시청년들을 잠시나마 농촌으로 데려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넓혀주고 싶었다. 도시청년들에게 농촌의 똥냄새를 맡으며 농촌이 지닌 근본의 이미지를 공유하고 싶었다. 근본을 깨닫는 것은 누가 누구를 가르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보고 느껴서 얻어지는 것이므로. 세계관이 넓어지면 가치관이 달라진다.
나무 끝에 달린 대추를 따려고 애쓰는 남학생에게 “그냥 냅 둬. 까치도 먹고 살아야지.” 새끼손가락만한 애벌레를 보고 화들짝 놀라는 여학생에게 싱긋 웃으며 “배추는 배추벌레가 먼저 먹어야 배추다.” 지금의 난 청년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청년과 함께 근본을 배우는 그들의 동료다.
사진 _ 필자제공

최상진
최상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로 의미론을 동양학적 방법으로 분석하는 틀을 세웠으며 문과대학장을 지내면서 노숙인 교도소 수용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실천인문학 강좌를 개설하기도 했다. 현재는 가평에서 포도농사를 짓고 있다.
sjch@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