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시대
기술문명이 발달하면서 문화예술의 표현 방법은 달라져도 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시키는 그 역할은 달라지지 않는다. 역사의 방향성이 있다면 인류의 상호작용 총량이 늘어나는 쪽이다. 문화예술은 상호작용의 촉매 역할을 한다. 사람들 사이뿐만 아니라 기계와 인간, 기계와 기계 사이의 상호작용 총량이 급격히 늘어나는 인공지능(AI) 혁명이 진행되는 이 시대에 문화예술교육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최근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차트 1위를 한 ‘사건’을 접하면서 우리는 한류 바람이 국소적 또는 일시적 팬덤 현상이 아님을 새삼 확인했다. 문화는 곧 소통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노래와 춤은 통한다. 클래식이 계몽시대의 산물이라면 팝은 소통의 시대 음악이다. 엘리트들은 여전히 대중을 계몽하고 싶어 하지만, 스스로 지식을 생산하고 유통할 수 있게 된 대중은 더 이상 지식 권력의 계몽을 바라지 않는다. 문자혁명이 지식 권력을 낳았다면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 시작된 매스미디어 혁명은 문화권력을 낳았다. 한때는 몇몇 사람들에게 권력이 집중되었지만 이제는 대중이 문화권력의 생산자이자 소비자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대중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면 대중문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엘리트들은 대중문화를 하위문화로 폄하하려 들지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기가 싫기 때문일 따름이다. 지식의 갑질은 역사가 오랜 일이어서 쉽사리 고쳐지지 않겠지만, 이제는 그 갑질이 통하지 않는 사회로 가고 있다. 보수와 진보 진영의 주류 언론이었던 ‘조·중·동’과 ‘한·경·오’의 영향력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권력의 대중화 시대다. 인터넷과 SNS라는 새로운 소통수단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소통의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학교는 여전히 계몽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오늘날 학교 문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이미 쌍방향 소통의 시대를 살고 있는데 교사들은 교단 위에서 아직도 계몽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셈이다. 자신들의 아이돌을 만들어내고 그들의 문화를 세계에 퍼트리면서 저만치 앞서나가고 있는 아이들을 교사들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문자보다 이미지, 책보다 영상에 더 익숙한 신세대는 웬만한 정보를 유튜브로 접하고 있다. 그런 현실을 반영해서인지 최근 공교육에서는 영화 과목을 신설하자는 움직임도 보인다. 영화관에 오는 아이들을 잡기 위해 학생주임이 극장에 잠복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건만,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영화 과목이 정규 교과가 되면 과연 문화강국의 길이 열릴까? 오히려 아이들이 영화와 멀어지게 만들지 않을까.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십 대 아이들이 패션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단지 멋을 부리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긴밀해지고 싶은 무의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화장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른 이들의 주목을 끌고자 하는 모든 행동은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욕구의 발로다. 공동체의 가치에 반하는 혐오 표현도 예외는 아니다. 공격적인 언행으로 어그로*를 끌어서라도 공동체와 긴밀해지고 싶은 것이다.
요즘 자해하는 청소년들이 늘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올 정도로 눈에 띄게 늘고 있는 듯하다. 손목을 긋고는 인증샷을 주고받기도 한다. 아이들 사이에서 놀이처럼 번지고 있는 자해 인증샷은 인정욕구에 목마른 십 대들의 이상행동으로 비치고 있지만, 인정보다 연결에 대한 욕구의 새로운 변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자신이 공동체나 다른 누군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아이들은 자해나 관종** 증상을 보이지 않는다. 자해가 유행하기 전 청소년들 사이에서 ‘잉여’가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신을 ‘잉여’로 느끼는 자의식이 무의식을 자극함으로써 공동체나 주변사람과의 연결지점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그 욕구가 자해나 관종으로 나타난다고 봐야 한다. ‘관종’ 증상을 보이는 정치인들도 공동체와의 연결고리가 약하거나 타자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연결되기를 바라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주목할 일이다.
아이들의 행동을 개별적인 문제 행동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내재한 보편성에 주목해야 한다. 그 에너지를 억압하기보다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다. 화장주임을 두고 아이들을 단속하기에 급급하면서 문화예술교육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인류 차원으로 상호작용의 범위가 넓어진 시대에 문화예술교육이 시대와 발맞추기보다 뒤좇아 가기에 급급하거나 역행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문명은 상호작용의 총량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상호작용 범위가 범지구적 규모로 커지는 만큼 교육은 아이들 스스로 인류사회라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자각을 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그 자각이 인성으로 이어진다. 인성은 곧 인류 보편의 인간성이다. ‘일베’나 인종주의자들처럼 인류를 배신하지 않는 것이 인성이다. 공교육은 보통교육이고 이는 곧 보편교육이어야 한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도와주는 것이다.
공동체는 약자를 위해 존재한다. 아기를 돌보는 가정처럼, 힘을 합쳐 약자를 돌보는 가운데 공동체는 결속력을 얻는다. 아이들, 성소수자, 난민들을 타자로 여기는 사회는 위축되기 마련이다. 내심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약자에게 손을 내밀지 못한다. 스스로를 약자로 규정하고 저도 모르게 방어 모드가 된다. 그렇게 공동체의 약한 고리를 방치하는 사회는 결국 제 무덤을 파는 것이다.
문화의 본질은 약자의 목소리를 듣는 데 있고, 우리는 지금 그 귀를 열어가는 중이다. 문화는 소수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꽃을 피운다. 제3지대, 낮은 곳, 소외된 이들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화가 다양성을 토대로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산업의 시대가 저물고 문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일찍이 백범 선생이 꿈꾼 문화강국으로 가는 길은 문화예술인들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몫이다.
* 어그로 : 관심을 끌고 분란을 일으키기 위하여 인터넷 게시판 따위에 자극적인 내용의 글을 올리거나 악의적인 행동을 하는 일
** 관종 :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
** 관종 :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
- 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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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매체 격월간 [민들레] 발행인
nol9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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