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구두가 놓여 있습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 주인과 함께 고된 시간을 함께 했는지 처음에 반듯했을 모양도 변형되었고, 표면의 윤택도 사라졌습니다. 이 〈구두〉는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 ~ 1890)가 그린 것입니다. 이 낡은 구두는 누구의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세 명의 철학자는 서로 다른 답을 내놓습니다.
 
 


반 고흐, 〈구두〉

 
하이데거는 이 신발 주인으로 촌 아낙네를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구두에 서려 있는 많은 것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를테면 〈구두〉에 ‘넓게 펼쳐진 밭고랑을 걸어가는 아낙네의 강인함, 들일을 하러 나선 이의 고통, 해 저물녘 들길의 고독, 대지의 습기와 풍요로움’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이데거가 한 켤레의 〈구두〉를 통해 만난 것은 촌 아낙네가 속한 세계였지요.

 

그런가 하면 사피로는 화가가 〈구두〉주인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반 고흐가 농촌이 아닌 세계의 도시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지요. 또한 진흙 범벅의 다 닳아 헤진 〈구두〉의 불량한 상태도 반 고흐 전문 연구가답게 놓치지 않았습니다. 화가는 여러 점의 신발 그림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는 주인이 농부로 명확한 그림도 있었지요. 그 경우 화가는 농부의 신발을 깨끗한 새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런 근거를 토대로 사피로는 이 〈구두〉가 세상의 외톨이로 살다 간 반 고흐의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이 그림이 화가의 자화상이라 덧붙였답니다.
 
그렇다면 이 〈구두〉의 진짜 주인은 누구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데리다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림 속 신발은 끈이 풀린 채 벗겨져 있습니다. 과거에 누군가 이 신발을 신었을 것입니다. 촌 아낙네가 신었을 수도, 반 고흐가 착용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사용의 흔적이 역력한 것을 보면요. 또 언젠가 누군가 이 〈구두〉를 신을 수 있겠지요. 이 신발을 필요로 하면요.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이 신발은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데리다는 반 고흐의 〈구두〉주인은 단정을 짓기 어려울뿐더러 쟁쟁한 철학자들이 벌인 신발 주인 찾기 논쟁이 무의미하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동일한 신발에 대한 논란은 캔버스를 넘어 우리 현실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김기덕 감독이 제6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습니다. 수상 당일 국내 언론을 통해 논란이 된 것은 한국 영화사에 기념할 만한 순간을 만든 그의 영화 세계가 아니라 낡은 신발이었습니다. 그가 직접 출연한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통해 이미 친숙해진 굳은 살 박힌 발뒤꿈치가 드러난 신발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너무 낡아 구겨진 가죽 신발이 그의 영화가 딛고 있는 독특한 세계와 그의 삶이 경유해 온 남달랐던 삶의 일부인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두 저처럼 맨 발로 구겨 신은 김기덕 감독의 낡은 신발이 반가웠던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일부에서는 32만 원짜리 스페인산 브랜드 캠퍼로 밝혀진 김기덕 감독의 신발을 ‘허세’와 ‘실망’으로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반 고흐의 〈구두〉처럼 낡은 상태에만 집착한다면 우리는 결코 허름한 신발에 반 고흐가 담고자 한 ‘변변하지 못한 삶에 대한 경건함’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술 세계에 속한 한 점의 그림이든, 현실 세계 내의 한 개의 사건이든 우리 시선이 오래 머물러야 할 것은 낱낱의 현상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이어야 할 것입니다.

 
 
 
 

글 | 미술평론가 공주형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수근론’으로 미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고재 갤러리 큐레이터로 10년간 활동하였고, 2001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했다. 저서로는 『사랑한다면 그림을 보여줘』, 『아이와 함께 한 그림』, 『색깔 없는 세상은 너무 심심해』, 『천재들의 미술노트』, 『착한 그림 선한 화가 박수근』 등이 있으며, 현재는 인천대학교 기초교육원 초빙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