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맹자라는 사상가를 몰라도 ‘여민락’은 한 번쯤 들어봐서 알고 있다. ‘여민락’은 조선시대 아악의 이름이기도 하고 대학과 단체에서 모임의 이름을 지을 때 즐겨 사용하는 이름이다. ‘여민락’은 원래 정치 지도자가 여유 자원을 가지고 문화 예술 활동을 벌이면서 일반 백성들과 함께 쾌락을 누린다는 뜻이다. 없는 살림에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데 문화 예술의 제전을 백성들과 함께 즐긴다는 데에 누가 반대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뜻이 좋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애용하게 된 듯하다.

 

그런데 정작 맹자가 이 ‘여민락’을 왜 중요하게 떠드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먼저 정치 지도자의 자질 또는 이상 정치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맹자도 공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여러 나라에서 유세했다. 실제로 「맹자」 첫 편은 양나라 혜왕(惠王), 제나라 선왕(宣王)과 대화로 시작되고 있다. 맹자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흥미롭게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 속에는 ‘여민해락(與民偕樂)’, ‘여민동락(與民同樂)’, ‘독락(獨樂)’ 등이 쓰이고 있다. 이 말들은 정치 지도자가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사회적 자원을 어떻게 쓰느냐, 라는 맥락을 가리킨다. 독락은 자원을 순전히 개인적인 향락과 사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고 여민해락과 여민동락은 경제적 부를 일군 인민과 함께 쾌락을 누리느라 쓰는 것이다. 인민들은 독락의 지도자를 증오하고 여민동락의 지도자를 희망한다. 따라서 정치 지도자라면 인민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는 여민해락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문화 예술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전국시대에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의 특별한 신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높은 누대의 신축, 넓은 정원의 독점, 커다란 궁궐의 축조에 매달리고 또 그곳에서 대규모 연회를 빈번하게 열었다. 이는 정치 지도자가 씨족 공동체의 수장에서 중앙 집권적 관료 국가의 왕으로 그 특성을 바꾸어가는 과정에 나타난 사회 현상이었다. 수장은 허름한 집, 낡고 떨어진 옷, 보잘것없는 식사를 하면서 인민과 함께 지내면서 동고동락했지만, 왕은 도전자의 경계, 지도자의 권위 등을 이유로 오늘날 보이는 대규모 궁궐 속에 특별한 존재로 살고자 했다.

 

이러한 일은 맹자보다 앞서 활동했던 묵자가 일찍 통렬하게 비판했던 사회 풍조이자 문화 현상이었다. 이 점에서는 맹자도 묵자와 같은 보조를 취했다. 하지만 그는 묵자 마냥 음악을 공리주의의 맥락에서 비판만 할 수 없다. 맹자는 공자처럼 음악의 교육적 기능과 문화 예술적 가치를 긍정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맹자는 일종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즉 그는 한편으로 묵자처럼 사회적 통합이 아니라 갈등을 부추기고 특정인의 무분별한 쾌락을 돕는 문화 예술(음악)의 퇴폐적인 측면을 인정했다. 다른 한편으로 문화 예술(음악)이 사회적 지원으로 받아서 사람들의 고통을 달래고 심미 의식을 키우는 문화 예술의 적극적인 측면을 인정했다.

 

맹자는 이 난제를 풀기 위해서 묵자와 마찬가지로 문화 예술(음악)의 향유를 정의의 관점에서 접근하기로 했다. 그는 묵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독락과 여민동락 또는 여민해락을 구분했던 것이다. 음악이 독락으로 쓰인다면 묵자처럼 존재 근거를 상실하지만, 여민락으로 쓰인다면 묵자와 달리 향유될 권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맹자는 지도자가 자신이 노동하지 않고 세금을 거둔 자원을 여민동락보다 독락으로 쓰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지도자를 향해 「서경」 「탕서(湯書)」에 나오는 섬뜩한 참요(讖謠)를 소개했다. “저놈의 해가 언제 없어질까? 우리 저 녀석과 함께 망해버릴까 보다!”(時日害喪? 予及女偕亡!) 원래 해는 온갖 포악한 짓을 일삼았던 하나라 걸왕을 가리키지만, 맹자는 현실에 걸왕 같은 인물이 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으리라. 여민락은 그냥 뜻만 좋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 예술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왜 있는지 끊임없이 사유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한갓 미사여구가 아니라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 물음인 것이다.

 

글 | 동양철학자 신정근

동양철학에서 문화예술교육의 메시지를 찾다

 

서울대학교에서 동서철학을 배우고 한제국의 금고문 논쟁을 주제로 석사를, 인(仁) 개념의 형성 과정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로 시대와 사회의 맥락에서 철학과 예술 미학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다양한 연구 성과로 밝혀내고 있다. 요즘 현대 철학없는 동양 철학의 문제를 새롭게 풀어내려고 하면서 동양철학 텍스트의 재해석에 열을 올리고 있다. 아울러 철학 사상 위주의 동양학을 예술 미학의 맥락에서 재조명하고자 긴 준비기간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