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어리진 마음을 풀어놓는 한바탕 놀이극

나이들어 대사 외우기 어렵겠다고? 시켜만 줘봐 그저 늙은 게 한이지! 어르신들의 인생 이야기가 무대위에서 한바탕 놀이극이 되어 펼쳐진다.


이른 아침부터 관악시립노인복지관이 북적 거린다. 벌써부터 2층 강당은 많은 인원으로 꽉 채워졌고 다른 한 쪽에서는 의상을 챙기느라 분주하다. 오늘이 바로 관악시립노인복지관 11반 할머니들의 연극 발표회 날이다. 지난 8월부터 시행된 노인연극 시범 사업의 결과물을 발표하는 자리인 것이다. 여름 햇살이 뜨겁던 8월부터 지금까지, 4개월이 넘는 시간동안 갈고 닦은 할머니들의 실력을 선보이는 자리에 많은 이들이 함께 해 그 열기가 뜨거웠다.

인생 이야기를 풀어놓는 한바탕 놀이극

흥겨운 뱃놀이 노래에 맞춰 등장하는 할머니들의 걸음걸이가 심상치 않았다. 엉거주춤 한발 한발 내딛는 게 힘들어 보이면서도 자신감이 느껴졌다. 장구 장단이 흥겹게 흘러나오고 할머니들의 뱃놀이가 시작되면서 드디어 연극 무대가 열렸다.
할머니들이 준비한 연극의 제목은 ‘길’이다. 인생을 되짚어 보면서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아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본인들이 걸어온 길을 표현하기 위해 할머니들의 발자국을 찍은 천으로 무대를 꾸미고 대본에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잘 알려진 기존의 대본을 외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어르신들의 인생 이야기를 풀어냈다. 즉흥적으로 무대에서 인생이야기를 풀어놓으면 그것이 대본이 되는 것이다.
“처음 연극 수업을 시작하면서 인생 곡선을 그려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본인에게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클라이맥스 순간을 떠올려 보는 거죠. 대부분 이별, 전쟁, 출산, 결혼을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이 내용을 주제로 연극을 풀어가기로 했죠. 제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들이 풀어놓는 이야기를 연극에 담기로 한 겁니다. 결과는 정말 좋았어요. 처음엔 이야기를 하시지도 않더니 나중에는 본인들의 이야기를 더 해주시려고 하시는 거예요.”
관악시립노인복지관의 노인연극 수업을 책임지고 있는 권오현 예술 강사는 이번 연극에는 대본도 감독도 없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이 무대 위에서 대본을 직접 만들어 냈고 그 자신들이 연출자가 되어 무대를 꾸몄다. 스스로 만든 연극에 대한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길동무 역을 맡은 김숙희 할머니(77)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이의 모습이다.
“연극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다른 곳에서도 연극 수업을 해봤었는데 여기는 전문 연극 선생님이 따로 계셔서 그런지 더 재미있고 더 쉽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다들 맡은 바 열심히 해서 오늘 연극 무대를 너무 잘 끝낸 것 같아요.”

하지만 어려움도 많았다. 이번에 연극 발표회를 갖은 할머니들은 이곳에서 제일 고령인 어르신들로 구성됐다. 게다가 거동까지 불편한 편이다. 권오현 예술 강사는 몸짓과 얼굴 표정으로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연극에서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들을 어떻게 끌어들일지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하루하루 연극수업을 진행 할수록 할머니들의 열정이 대단했다고 한다.
“매주 수요일 10시면 복지관에 모여 수업을 했어요. 이른 시간인데도 많은 어르신들이 빠지지 않고 열심히 나오셨어요. 특히 보충 연습이 더 필요하다며 토요일에도 나와야 하지 않느냐고 되묻는 분들도 계셔서 토요일에 특별 수업도 몇 번이나 했었어요. 제가 ‘연습하러 나오세요’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연습이 더 필요하다며 자율적으로 모일 정도니까요.”
객석에서 무대를 지켜본 어르신들의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너무 잘했다’며 격려하고 함께 기뻐해주는 모습이 인상적인 시간이었다.

마음을 정화시키는 치료사, 연극

항상 가족을 먼저 생각하느라 자신의 생각, 생활을 포기한 할머니들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일을 어려워한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보다 듣는 일에 더 익숙해져 있는 세대이다. 그렇다 보니 가슴에 쌓아두는 일이 많고 응어리진 가슴을 간직하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연극 수업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감정을 함께 나누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엔 몸 풀기부터 시작했어요. 인사 나누기도 그냥 ‘안녕 하세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리나 표정, 움직임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인사하기로 했죠. 처음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었는데 지금은 뭐든지 표정이나 행동으로 하세요. 가령 몸을 부딪쳐서 본인의 기분을 나타낼 수도 있죠. 기분이 좋으면 밝고 가볍게 몸을 툭툭 치기도 하고 또는 둔탁한 소리가 나게 세게 치면서 서로의 감정을 표현하게 했습니다. 우선 자신을 표현하는 법부터 배웠어요. 이렇게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꺼내면서 정화시켰습니다.”

처음엔 이야기를 풀어놓은 시간에 아무런 반응이 없어 고생을 하기도 했단다. 하지만 한번 이야기를 꺼내고 나면 마음 속 깊숙이 담아놓은 이야기까지 꺼내 강사를 놀랜 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란다. 이렇게 본인들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그 이야기를 연극 무대에 선보이면서 응어리졌던 마음 속의 상처가 치료되는 과정을 경험했다.
“저는 문화예술교육 사업이 과정중심의 사업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 결과물이 중요하지만 어떤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느냐를 살펴보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한 주 한 주 할머니들을 만나면서 어르신들의 잠재력을 끄집어내기 위해 노력했는데 처음이 어려워서 그렇지 한 번 마음을 여니 그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시더라고요.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고 누군가 내 얘기를 들어준다는 사실을 너무 좋아하세요.”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그 중에서도 연극은 몸짓이나 표정, 소리를 통해 마음속에 담아 뒀던 감정을 표출 할 수 있는 종합예술교육이다. 이런 문화예술교육이 할머니들의 응어리진 마음을 치료하는 훌륭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발표회였다.

관악시립노인복지관 나석원 사회복지사

관악시립노인복지관의 연극수업을 책임지고 있는 나석원 사회복지사가 말하는 할머니들의 변화.

– 어떻게 노인연극을 계획하게 되었나요? 그것도 복지관에서 제일 고령이고 몸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이 주축인데.
“복지관을 이용하는 어르신들 중에도 11반 할머니들이 가장 연세가 많으세요. 그리고 다리가 불편하셔서 움직이는 활동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노인 분들과 분리되고 주로 정적인 내용의 수업이 이뤄지면서 소외된 느낌을 많이 받으시더라고요. 그래서 11반 할머니들의 소속감을 심어 줄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연극을 생각하게 되었고 이렇게 교육진흥원의 후원을 받아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많이 움직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유익한 시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동시에 스스로를 표현하는 법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 연극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연극 수업 후 할머니들의 달라진 모습이라면 어떤것이 있을까요?
“11반 할머니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강당에 가는 걸 꺼려하셨어요. 주로 민요교실에서 노래를 배우거나 그냥 다른 분들이 하는 걸 구경하는 게 전부였는데 지금은 스스로 뭔가를 해내고 너무 기뻐하시니 제가 다 기쁩니다. 다른 노인 분들에 비해 억눌렸던 감정이 많았었는데 연극을 통해 감정이 표현되면서 더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여럿이서 어울리는 대강당까지 나와 서로 어울리는 걸 보니 정말 뿌듯합니다. 처음에 연극 수업을 시작하면서 할머니들의 억눌렸던 감정이 표출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의도가 정확히 들어맞았어요. 그리고 다른 반 어르신들도 많은 관심을 보이시더라고요. 오늘 연극을 보시고 ‘저걸 어떻게 하는 거냐?’며 본인들도 하고 싶다고 하시는 경우도 많았어요. 특히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다른 연극반이 있는데 몇 번 나오시다가 나오지 않던 분들이 지금은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많이 놀랐어요. 정말 연극 수업을 좋아하시는 구나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앞으로 할머니들을 위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아직 이렇다 할 계획이 확정 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번에 할머니들께서 연극 활동을 하는 걸 보고 이런 활동을 좀 더 늘려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활동이 저희 복지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곳과 연계해서 교류 활동을 한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외된 청소년이나 장애인 단체와 함께 연계해 좋은 기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 연극수업 운영에 조금 부족했거나,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우선 강사 선생님들의 열정에 감사드려요. 수업이 없는 날에도 나오셔서 물품을 직접 제작 해주시기도 하고 저희가 어르신들께 신경 써드리지 못한 부분도 너무 세심하게 챙겨주셔서 놀랬답니다. 어려웠던 점이라면 외부 지원사업과 복지관 지원 사업이 운영되는 방법이 달라 조금 혼선이 있었습니다. 예산 사용부분에 있어서도 차이가 많더라고요. 그래도 이런 과정을 하나하나 조율하고 맞춰가니 기대했던 결과보다 더 큰 효과를 봐 너무 좋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연극발표회를 가질 때는 이런 저런 장비가 많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무선 마이크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죠. 무선 마이크를 대여 하려고 알아봤는데 좀 힘들더라고요. 교육진흥원에서 이런 장비를 갖춰서 발표회를 열거나 할 때 대여 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해 준다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물론 이런 교육이 이뤄지는 자체가 정말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