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감자꽃 스튜디오 시범사업 현장 하나 – 소리를 타고 높이 날아오르렴!

이남영(동화작가)

5월의 햇살은 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뜨겁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햇살의 무작위한 난사를 지켜보고만 있다. 공연장에 비가 오면 어쩌나 걱정하던 마음은 이제 폭염에 모든 게 녹아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싱거운 상상으로 변해버렸다.
“선생님, 저 은솔인데요. 몇 시까지 가면 되죠?”
읍에 있는 공판장에 음료수를 사기 위해 마을을 막 벗어나고 있을 때였다. 은솔이는 작년 학교문화예술교육 때 사물놀이 반에 있던 아이다. 오늘 공연이 있는 학교(감자꽃 스튜디오)에는 여러 번 놀러 왔었다. 집이 학교 근처이기도 했지만, 사물놀이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다.
“공연이 7시부터니까 그 전에 오면 될 거야. 아, 그런데 너희들 몇 명이나 오지?”
공연을 잊지 않고 찾아준 아이들에 대한 고마운 감정은 어느새 아이들에게 공연 진행을 도와 달래야겠다는 계산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쨌든 아이들 덕분에 한 가지 부담은 덜어버린 셈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숲길을 달렸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운동장에 가지런히 놓인 의자에 앉아있던 아이들이 인사를 했다. 아이들은 막 물이 오르고 있는 초록빛 잎처럼 풋풋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공연 보러 인천에서 일부러 왔어요.”
작년에 인천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한 해지였다. 해지는 고등학교에서 미용을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자기 머리를 좀 손봐달라고 한 마디씩 하자 금세 분위기는 어색함을 벗고 화기애애해졌다. 지난해에 해지는 동생과 함께 사물놀이 반에서 장구를 연주했었다. 연말에 열린 발표회 때는 대부분 읍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아이들과 달리, 홀로 먼 타지에서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부담감에 얼굴이 밝지 못했었다. 하지만 오늘 본 해지는 훨씬 어른스러워지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도 자신감이 있어보였다.
“너희들, 선생님 좀 도와줄 수 있겠니?”
이내 아이들에게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아이들에게 주차관리, 손님안내, 공연장 정리 등의 역할을 나누어 맡겼다. 아이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거운 말 한마디에도 연신 웃음을 터트린다. 해가 뒷산을 넘어가자 금세 어둠이 찾아왔다. 학교 앞에는 공연장을 찾은 자동차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었다.

아이들은 사람의 영혼을 닮은 악기를 통해 하나 된 몸짓, 하나 된 외침을 경험했다.

영혼을 닮은 악기와 만나다
소리는 파장을 가지고 있고, 파장은 뭔가를 변화 시킨다. 개인의 마음에서도, 사람의 관계에서도 이 법칙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작년 한 해 동안 평창중학교에서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학교가 떠들썩하도록 악기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기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닮았다. 아이들은 악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외쳐볼 수 있었고, 또한 악기를 통해 하나 된 몸짓, 하나 된 외침을 경험했다. 악기는 아이들에게 소중한 선물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처음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해금, 피리, 사물, 가야금, 판소리 반에는 각각 십 여 명의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서울에서 내려온 젊은 강사들은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아이들의 출석은 들쭉날쭉 했고, 수업은 계속 겉돌아 진도표는 주춤거리고 있었다. 한 학기가 아무런 성과 없이 흘러갔다. 아이들은 악기에 대해서도, 악기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지 못했다.

국악캠프로 교감하기
상황이 역전된 것은 여름 방학 때였다. 아이들은 어딘가로 떠난다는 막연한 기대를 안고 버스에 올랐다. 여름 국악 캠프가 열리는 평창유스호스텔에 도착하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맞았다. 그 어색한 만남의 시간을 메우기 위해 아이들은 서먹한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무거운 가방을 들어주기도 했다. 3박 4일의 일정은 모두에게 소중한 시간이었다. 자세를 잡아주기 위해 아이의 손을 잡을 때마다 움찔움찔 놀라던 아이들은 이제 어리광을 부리기도 했다. 그 동안 악보를 읽지 못해 옆 아이들 흉내만 내던 가야금 반의 한 아이는 다정한 선생님의 가르침에 한 음 한 음 깨달아 가며 다시 건강한 웃음을 되찾았다. 마지막 날 저녁, 아이들에게 모처럼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짧은 일정이라 개별 악기 연습, 국악 이론 수업, 단소 배우기 등 정신없이 달려온 마지막 날이었다. 다음 날에는 작은 발표회도 계획되어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이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악기 창고에서 악기를 꺼내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리소리에 해금반 아이들도 뒤질세라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악기 소리가 선생님들이 모여 있는 방까지 들려왔다. 선생님들은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짧은 시간 그들은 비로소 가슴으로 교감하고 있었다.

악기를 연주하며 아이들은 푸른 꿈을 일궈간다.

푸른 꿈을 일궈가는 아이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다. 금방 날씨가 쌀쌀해졌지만 오히려 아이들은 가슴을 활짝 열고 다녔다. 악기 연습에도 탄력이 붙었다. 특히 사물놀이 반 아이들은 공연에 참가해도 될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새 학기가 되면서 가장 큰 변화는 아이들이 자율적으로 연습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부 악기는 집에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방과 후 악기를 등에 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사물놀이 반이 악기 실력을 자랑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사물놀이 반은 그동안 지역 축제와 공연에 여러 번 출연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경연대회에 참가하기는 처음이었다. 군 단위의 작은 대회였지만, 아이들의 눈빛에서 어떤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당연하게 결과는 우승이었다. 아이들의 작은 성취는 그들의 길지 않은 삶에서 햇살이었다. 그들의 해맑은 웃음에서 푸른 꿈들이 파닥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12월에 열린 발표회는 마을의 축제였다. 부모님, 선생님, 학교 친구들이 모두 모여 일 년 동안 준비한 국악반 아이들의 공연을 축하해주었다. 힘들게 밤을 새우며 연습했던 시간도, 떨리는 공연의 순간들도 관객들의 박수소리에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다. 악기를 가르쳤던 선생님들도 느낀 게 많은 한해였다. 첫 만남 때, 소통할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던 아이들. 아이들의 몸집이 너무나 작게 보여 가슴 아팠던 시간들. 그 아이들에게 이제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준다. 그렇게 선생님들도 아이들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평창에 울리는 우리의 소리, 우리의 가락
이제 매주 수요일이 되면, 평창 시내는 학교에서 들려오는 장구 소리에 들썩거린다. 학교가 시내 중심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장구 소리는 평창에서 가장 익숙한 소리가 되었다. 또한 수요일이 되면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초등학생들의 앙증맞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쉬는 시간이면 자기 키 보다 큰 장구를 등에 지고 복도를 오고가는 초등학교 일학년생들의 귀여운 모습도 쉽게 눈에 띈다.
올해의 국악교육은 더 많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확대되었다. 작년에는 평창중학교에서만 실시되던 교육이 올해는 평창초등학교까지 실시되고 있다. 고등학교에도 일부 도움반 학급에 사물반을 만든 것을 감안하면, 평창의 초.중.고 학생들 모두가 국악교육을 받고 있는 셈이다. 올해 국악교육의 또 다른 특징은 학교 선생님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작년에도 부분적으로 선생님들이 일부 악기를 배우거나 여름 국악 캠프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올해에는 좀더 체계적으로 실시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행정적인 면에 있어서도 많은 지원을 받고 있다. 평창초등학교와 평창중학교 모두 연구학교로 지정되어 국악 교육이 학교 교육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평가함으로써 앞으로의 교육에 긍정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했다. 또한 선생님들이 국악 교육 참여시 연수 시간에 반영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등 일련의 행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어느새 평창에서 가장 익숙한 소리가 되어버린 장구 소리로 학교는 들썩거린다.

고민들 그리고 희망
하지만 국악교육 대상 인원이 확대됨으로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도 생겨나고 있다. 우선은 아이들의 동기와 관련된 문제다. 많은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현실적인 어려움은 아이들에게 국악을 많은 과목 중의 하나 정도로 밖에 인식시킬 수 없을지 모른다. 어린 아이들에게 악기는 세상에 내지르는 표현의 수단이며, 동시에 모두와 함께 하나의 가락을 연주할 수 있는 하나 됨의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도출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하면서, 목표를 견지해 갈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을 찾는 노력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또한 아이들이 국악 교육에 대해 얼마나 흥미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도 관건이다. 아이들이 흥미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해 강사들 나름대로의 방법이 동원되고 있으며, 방송 자료 교육, 멀티미디어 교육 등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고 있다.
지난 주 수요일, 어김없이 아이들은 학교 체육관에 모여 있었다. 아이들 앞에는 장구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장구는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아직 아이들은 몸을 움직일 줄 모른다. 아직 아이들은 호흡을 할 줄 모른다. 단순한 가락도 자꾸만 휘청거리고, 어지러운 소리의 소용돌이가 체육관 천정을 가득 채우는 일이 더 많다. 하지만 아이들은 수 백 개의 장구에서 울려 퍼지는 우렁찬 소리에 가슴이 뛰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도 한다. 또한 가끔은 장구소리를 타고 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평창 감자꽃 스튜디오 시범사업 국악캠프 동영상 (동영상을 보시려면 play버튼(▶)을 눌러주세요)

이남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