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박물관 교육이 시작되다 – 국립경주박물관 어린이박물관학교

유병하(국립경주박물관 학예실장)

우리나라 어린이 박물관 교육의 효시

박물관에서의 사회교육의 역사는 매우 짧다. 세계적으로 박물관의 역사는 300년 이상에 이르지만 사회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세기 초에 들어와서의 일이고, 어린이를 대상으로 교육을 시작한 것은 그보다 더 늦어서의 일이다. 우리나라의 사례를 찾아본다면, 이왕가박물관이 1909년에 최초로 문을 열었고, 1945년 광복 이후 국립박물관이 중심이 되어 박물관이 많은 발전을 이루어 왔지만 어린이 교육을 포함한 사회교육이 본격화된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이 1986년 구 중앙청 건물로 이전하고서였다.

유물창고를 개조한 어린이박물관학교의 교실
최근에는 대형 박물관, 공·사립· 전문박물관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한 국립박물관을 필두로 박물관 내의 일정 공간을 활용하거나 별도의 건물을 지어서 어린이박물관으로 운영하는 사례도 점차 늘고 있다.

이렇듯 오늘날에는 미래의 주인공인 어린이를 주인으로 모시는 활동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미 반세기 전부터 우리나라에도 그러한 시도가 있어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1954년 10월 10일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의 관장실에서 문을 연 이래 50년이 넘도록 면면히 이어져 온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까지 경주지역의 어린이 4,000명 -계수화가 가능한 1984년 이후의 기록을 토대로- 이상이 우리 문화에 대한 교육을 받고 졸업하였다. 비록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의 혼란한 상황이라 교육을 진행할만한 사회·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았지만, 일부 선각자들의 혜안과 열의에 의해 우리나라 어린이 박물관교육의 효시가 되었으며, 모범적인 운영을 통해서 박물관 사회교육의 틀을 제공하는 데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경주에서 의기투합한 선각자들

전란이 끝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경주에는 ‘목요회’라는 독특한 모임이 생겼다. 당시 경주박물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진홍섭을 필두로 윤경렬, 이기섭, 박영도 등이 매주 목요일마다 만나서 술을 마시자고 결의(?)한 모임이었다. 이들은 취기가 오르면, 황폐한 경주의 문화유적에 대해 개탄을 하였고, 어떻게 하면 그 소중한 문화유적을 지켜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제안이 바로 미래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에게 신라문화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자는 것이었고, 그 제안을 실행에 옮긴 것이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였다.

맨 처음에 한 일은 학교의 운영 방침을 세우는 것이었다. ‘첫째,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둘째, 수업에 필요한 모든 자료와 교재는 무료로 제공하며, 어떤 명목으로도 돈을 받지 않는다. 셋째, 어린이들을 존귀하게 생각하고 수업을 높임말로 진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오늘날로 치면 철저하게 어린이를 중심에 둔 ‘열린 학습’의 실천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리고나서 교가를 만들고, 교재와 환등기, 영사기를 준비하여 학생들을 받을 준비를 하였다. 특히 교가는 윤경렬이 작사한 것을 마해송, 조지훈이 수정하였고, 윤이상이 곡을 붙여 완성한 것이었다. 박물관학교의 교가가 이처럼 특급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진홍섭 관장과의 개인적인 친분이 작용한 덕분이었다. 평소 진홍섭, 윤이상, 마해송, 조지훈은 개성과 서울을 오가면서 서로 간에 깊은 교분을 유지하고 있던 사이였는데, 그 인연이 경주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서울에 머물러 있던 김재원 국립박물관 관장도 직접, 간접으로 간여하면서 박물관학교를 성심껏 지원하여 주었다. 모두들 각 분야의 대가였지만 당시로서는 ‘문화재를 통한 어린이교육’에 의기투합한 진정한 선각자였다.

하늘과 땅을 교실로 삼고

어린이박물관 학교의 포스터

한국전쟁이 끝난 후는 모든 것이 허술하던 시기였다. 당시 경주의 어린이들은 천마총에서 미끄럼을 탔고, 첨성대를 기어올라 다녔으며, 석빙고에 들어가 술래잡기를 하면서 놀았다. 학교시설과 그곳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변변치 않았던 시절에 경주 시내에 흩어져 있던 문화유적은 어린이들의 주된 놀이터가 되었다. 그렇게 뛰어놀면서 눈으로 보고 발로 밟았던 하늘과 땅은 사실상 교실 밖의 ‘역사교실’이었던 셈이다.

이들을 건물 내의 역사교실로 끌어들인 것이 바로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였다. 이곳에서는 당시 엄두도 낼 수 없었던 동화 구연과 영화 상영, 슬라이드 강의 등이 이루어졌으니 경주의 어린이들에게는 ‘꿈의 교실’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업할 공간이 변변치 않아 비좁은 관장실의 비품을 치워 임시교실을 만들고 나중에는 유물창고를 개조해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어린이들에게 일주일 내내 기다려지는 학교가 된 것이다. 그러한 시간들 속에서 어느덧 단순히 놀이터에 불과했던 문화유적이 언제부터인가 어린이들의 마음 속에 의미있는 그 무엇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기쁨도 잠시, 1959년부터 어린이들은 박물관을 떠나 경주 시내의 건물과 유적지를 떠돌게 되었다. 경주 시내 중심부의 한옥 몇 채로 이루어졌던 박물관이 몹시 비좁고 혼잡하게 되자, 박물관 측에서 외부의 시설을 이용해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당시의 선생님들은 섭섭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지만 어린이들과 함께 문화유적을 답사하면서 세밀하게 신라문화에 대한 애정을 키워주려고 노력하였다. 그야말로 내 하늘과 땅을 다시 교실로 삼아 현장 중심의 문화재 교육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만들어진 야외수업의 틀은 오늘날까지 박물관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현장교육의 모범적인 사례가 되어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박물관학교의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62년에는 ‘경주어린이향토학교’로 바뀌었고, 1975년에는 ‘경주어린이도서관학교’와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로 나누어져 박물관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20여년 만에 비로소 옛 이름을 되찾게 된 것이다.

박물관에서의 배움과 가르침

박물관학교의 수업내용은 석탑, 토우 등의 문화재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으며, 그 밖에 경주 시내의 문화유적을 직접 둘러보는 현장교육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라의 장인(匠人)이 되어 불상, 토기, 토우, 돌사자 등을 직접 만들어 보는 체험교육도 실시하였다. 1982년부터는 고등부가 신설되면서 잠시 삼국유사를 해설하는 과정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틀은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고는 대단한 것이었다. 문화재를 보여줄 슬라이드를 만들기 위해 두꺼운 종이를 잘라서 그 속에 재생 필름을 끼웠고, 영사기를 빌리기 위해 대구에 있는 미국 공보원까지 매주 왕복하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에게 흥미를 돋우고 참여도를 높이기 위해서 교재도 직접 만들어서 나누어 주었다.

어린이박물관 학교의 수업전경

그리고 책받침이나 ‘자유의 벗’, ‘자유의 세계’와 같은 잡지도 어렵게 구해서 돌아가는 어린이들의 고사리 같은 손에 쥐어주었다. 이러한 과정을 주도해간 신라문화동인회와 박물관학교 뒷받침회(후원회)의 열정과 헌신이 없었더라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정과 헌신은 어린이들에게 그대로 스며들어갔다. 초창기에 박물관학교를 다닌 현 경주공고 교사 김윤근의 회고담에 의하면, “당시 박물관학교의 인기는 과히 폭발적이었다. ··· 점점 박물관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이 늘어나 일찍 오지 않으면 교실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어떤 때는 일찍 도착하여 앞줄에 섰어도 키가 작은 아이들은 낮은 학년이라 하여 못들어 가게 하니, 같은 학년이라도 키 큰 아이는 들어가고 작은 아이는 쫓겨나기도 하여 문 앞에 주저앉아 우는 아이도 많았다.”고 한다. 이들이 자라나서 전통문화를 소재로 활동하는 화가, 조각가, 금속공예가, 그리고 그것을 연구하는 큐레이터, 향토연구자가 되기도 하였다.

향토학교 시절의 봄소풍 광경
박물관학교에서의 가르침과 배움을 확인하고 자랑하는 자리는 기념잔치와 문화재실기대회였다. 박물관학교는 개교 1주년이 되던 1955년 이후, 여러 차례 기념잔치를 열어 문화재를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 전시회도 가졌고, 연극과 동화 구연과 같은 장르를 통해 그 동안 배운 바를 자랑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문화재를 그리고, 조각하고, 글을 짓는 ‘문화재실기대회’가 정착되어 경주박물관의 대표적인 문화교육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아울러 오늘날 다른 박물관, 미술관에서 운영하는 유사한 프로그램의 효시가 되었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

벌써 51회째를 맞이하는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를 되돌아보면, 각종 문화유적이 생활공간 속에 지천으로 널려있고, 또 이것을 잘 보존해야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던 경주만의 특수성이 그 탄생을 낳았던 셈이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아이들의 무료함을 달래주거나 무료로 가르치던 프로그램이 전무하였기에 더 많은 인기를 누렸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비슷한 프로그램이 도처에서 운영되고 있고, 훌륭한 시설을 갖춘 전문 어린이박물관도 많이 생겨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도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먼저 어린이박물관 내에 첨단 시설을 갖춘 전문교육장을 준비하였고, 이에 걸맞는 교육과정도 기획하고 있다. 현재까지 진행된 수업내용의 틀은 그대로 유지하되, 그 내용을 -아동심리학전문가를 활용하여- 보다 깊이 있게 어린이에게 닿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또한 공작프로그램도 다양화하고, 인터넷뉴스·어린이신문을 통해 저변도 확대하고자 한다. 그렇게 된다면 경주 가까이에 있는 울산, 포항, 영천 지역의 어린이들도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아울러 많은 열정과 전문지식을 지닌 지역연구자, 동아리 등과도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지역연계 프로그램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가의 한 대목처럼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내 하늘의 땅과 하늘을 교실로 삼아 겨레의 고운 얼을 길러주는’박물관학교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홈페이지 :http://gyeongju.museum.go.kr

유병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