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버킹엄의

       데이비드 버킹엄의 <전자매체 시대의 아이들>

글_박수경(의정부 송현고등학교 교사)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또는 긍정적인 전자매체

“텔레비전은 어린이들의 정신력을 약화시켜 그들이 건강한 인류로 자라나는 데 필요한 자연스럽고 정서적인 발전을 파괴한다. 또 어린이들 스스로 주체적인 목소리를 발전시키지 못하게 방해하며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부정한다. 또 아이들 자신의 이미지들을 지워버리고 의지를 약화시킨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자아와 조용한 대화를 하지 못하게 한다.”

– Barry Sanders의 <철자법도 모르는 한심한 아이들(A is for Ox)> 중에서

“이 새로운 기계는 청소년들을 훨씬 더 세련되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문화와 리터러시에 대한 그들의 관념조차 바꿔 버린다. 이 때문에 인터넷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청소년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그들에게 새로운 의미의 정치적 자아를 불어넣어 줌으로써 이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이 정부와 검열에서 독립된 세계를 둘러싼 가장 삼엄한 요새와 포탄을 뚫고 빛나고 있는 것처럼 어린이들은 이제야 처음으로 사회적 관습의 숨 막힐듯한 경계를 넘어서 자신들에게 이로운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어른들의 완고한 편견을 넘어설 수 있게 되었다.”

– John Katz의 <가상현실(Virtuous Reality)> 중에서

전자매체는 아이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이 물음의 해답을 찾는 과정 속에서 데이비드 버킹엄의 <전자매체 시대의 아이들>은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 책에서는 아이들의 삶에서 미디어가 하는 역할에 대한 두 가지 대조적인 분석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하나는 ‘아동기의 종말’에 관한 논제로서 텔레비전 및 기타 전자매체가 아동기와 성인기의 경계를 상당히 흐려놓으면서 아동기를 사라지게 만드는 주범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커뮤니케이션 혁명’에 열광하는 이들 사이에서 점차 인기를 얻고 있다는 주장으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새로운 전자매체로 인해 일상의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는 힘과 권한을 부여받고 있다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입장 가운데 어떠한 입장을 지지하든 그 출발점은 모두 전자매체가 발달하면서 달라지는 아이들의 변화된 삶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이 지나친 보호주의든 낙관주의든 이러한 두 입장은 모두 기술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다. 즉 기술이 우리의 사회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우리의 정신적 기능을 변화시키며 우리의 지식과 문화에 대한 기본 개념을 바꾸어놓음으로써 아이들의 정체성과 배움의 의미까지도 변화시킨다고 생각하는 기술 결정론적 입장에 근거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이야기할 때 이와 같은 기술 결정론적 입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기술이 변화하고 미디어가 변화함에 따라 아이들의 삶과 문화는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육의 영역이 근본적으로 아이들의 삶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기술 결정론적 입장은 교육의 본질을 왜곡할 가능성도 있다. 전자매체 시대의 등장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우리 교육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이들이 미디어를 접하면서 겪는 여러 가지 문화적 경험과 미디어와 맺게 되는 다양한 관계를 살펴보고 아이들에게 그것을 통해 표현하고 소통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전자매체 시대의 교육은 미디어나 테크놀로지에 대한 분석이나 연구로부터 출발하기보다는 이러한 미디어와 함께 생활하는 아이들의 삶과 문화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전자매체로 사는 아이들, 전자매체를 배우는 어른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기 전에 우리 반에서는 생일을 맞은 친구가 있으면 조촐한 파티를 하고 있다. 비록 초코파이 4개와 롤링 페이퍼, 조그마한 선물이 전부지만 교실의 불을 끄고 모두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나름대로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올해 3월 초 신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생일을 맞은 한 친구를 위해서 그날도 어김없이 밤 8시 55분에 생일 파티는 시작되었다. 초코파이 앞에 서서 웃고 있는 친구와 앉아서 축하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잘 어울릴 즈음 아이들은 저마다 가지고 있던 핸드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때 어두컴컴한 교실 여기저기 터지던 ‘폰카’의 모습이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에 떠오른다. 이곳저곳에서 등장한 폰카에 적잖이 신기해 하면서도 당황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가끔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사진을 촬영하던 아이들은 전자매체로 세상을 사는 아이들이라고 하겠다. 아이들에게 전자매체는 이미 생활의 일부가 된 것이다. 전자매체와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거나 전자매체를 배우기 위해 혼자서 끙끙거리는 모습은 아이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가끔 미디어 관련 교사 연수를 가게 되면 언제나 전자매체에 대한 아이들의 빠른 적응력에 관하여 신기해 하는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선생님들은 아이들만큼 전자매체를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전자매체에 대한 적응력이 부족한 것에 대해 고민하기도 한다. 어른들이 사용설명서를 펴고 전자매체의 기능을 한 가지 한 가지 공부하고 물어보고 배우고 있을 동안 이미 아이들은 전자매체로 자신의 일상을 구성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폰카를 보여주면 그 앞에서 고개를 돌리거나 ‘V’자의 어설픈 자세와 미소를 보이는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연출하기도 한다.
<전자매체 시대의 아이들>은 전자매체를 대하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기본적인 생각의 차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여전히 어른들의 통제 밑에 아이들을 묶어두려고 하는 전통적인 관념에 사로잡힌 어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전자매체를 자연스럽게 다루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낯설기만 할 뿐이다.
아이들에 대한 잃어버린 통제권을 되찾으려는 어른들에게 있어 전자매체의 폭력에 관한 논의는 적절한 통제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 권리를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지난 20년간 미디어에 나타난 폭력은 미디어 때문에 순진무구한 아동기가 파괴되고 말았다고 보는 일종의 윤리적 공황 상태에 관한 논의와 연관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미디어의 영향에 관한 질문들은 현실 세계의 충격적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와 결부되곤 했다. 미디어의 폭력과 관련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운동가들에 따르면 미디어 폭력은 일종의 ‘아동 학대’에 해당하며 물리적인 학대나 잔학함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미디어 폭력은 갈수록 증가하는 청소년 범죄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거의 대부분의 폭력 범죄 보고서에서는 범죄의 책임을 미디어에 전가하고 있다.
이렇듯 어른들의 세계에서 ‘나쁜’ 미디어와 폭력 범죄의 연관성은 누구나 다 알고 인정하는 논리인 양 통하고 있고 이러한 ‘상식적’ 논리는 정치가들과 자신의 윤리적 권위나 책임감을 보여주고자 하는 사람들이 손쉽게 이용하는 논리로 자리 잡아버렸다.
결국 미디어에 대한 이러한 우려는 대체로 미디어에 대한 통제의 강화 즉 검열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정부 규제 강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런 등식에 아이들이라는 요소를 첨가할 때 미디어 규제에 대한 논의는 결정적인 힘을 얻는다.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검열은 권위주의적이며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의 저항에 부딪치는 반면 아동 ‘보호’를 위한 검열은 저항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폭력이 난무하는 미디어 때문에 ‘타락’한 우리 아이들이 점차 사회 질서 존속을 위협하는 내부 요소로 인식되는 한 이러한 규제와 통제의 논리는 더욱더 힘을 얻게 된다.
하지만 아이들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려고 하는 어른들의 개입과 검열은 오히려 아이들과 어른들 사이의 대화를 단절시켜 버리고 세대 차이의 골을 더욱 깊어지게 할 뿐이다. 미디어와 미디어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단순한 윤리적 접근을 취하기보다는 아이들이 왜 그러한 미디어를 접하려고 하는지 또한 그러한 미디어를 통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보다 심층적인 접근과 관찰이 필요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전자매체의 부정적인 영향을 이야기하고 걱정하고 개탄하며 엄격한 통제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자녀들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부모’로 비친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미디어 환경과 문화를 윤리적인 잣대로만 평가하여 규제하려 하지 말고 그것이 아이들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전자매체 시대에 필요한 어른들의 역할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부모’이기 이전에 ‘진심으로 아이들의 미디어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 부모’여야 한다.

아이들의 ‘미디어 권리’를 위하여
<전자매체 시대의 아이들>에서는 전자매체 시대에 아이들의 미디어 권리를 위하여 보호와 제공, 참여와 교육이라는 네 가지 영역을 제안하고 있다.
보호란 어린이들을 유해한 환경으로부터 보호하자는 것으로 이는 우리 어른들에게는 가장 익숙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즉 어린이들도 스스로 경험하기로 선택한 것이 아닌 것 또는 그들의 복지에 해가 될 것으로 판명되는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보호를 이야기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일정한 연령의 기준을 세우고 이를 경고하거나 접근을 차단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미디어가 제공하는 정보의 소유와 통제, 재현과 설득에 대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 미디어와 관련한 보호의 문제들을 보다 발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즉 보호의 문제는 이제는 교육에 대한 문제로 전환되어야 할 때이다.
다음으로 제공이란 전자매체 시대에 아이들이 누구나 손쉽게 미디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 한 사회 내에서 계층 간 또는 국제 질서 속에서 국가 간 디지털 정보 격차가 확대됨에 따라 제공과 관련된 권리는 한층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그러나 제공의 문제는 단순히 테크놀로지에 대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테크놀로지를 창의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문화 자본과 교육 자본에 접근하는 것과 관계있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표면적인 접근이 아닌 그 안에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생산과 교육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참여란 아이들이 미디어에 접근함에 있어 ‘수동적’ 권리에서 ‘능동적’ 권리로 옮겨감을 의미한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아이들을 위해 무엇이 제공되어야 하는가 혹은 무엇에서 거리를 두게 할 것인가의 문제보다는 어떻게 하면 그들을 둘러싼 미디어 환경을 조직하고 생산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라고 하겠다. 이때 참여의 방식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는데, 하나는 생산에 참여하는 것이고 하나는 미디어 정책 형성 및 미디어 제도의 운영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참여의 기회는 개인적으로 미디어를 소비하기만 하던 아이들에게 공공의 미디어 문화를 위한 영역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자신을 보다 더 일반적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한 사회의 시민으로서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육은 앞에서 이야기한 보호와 제공 그리고 참여의 영역에서 이미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자신을 둘러싼 미디어 문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교육 내용을 마련하고 자신들의 자율적인 문화를 구성하고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의 기회는 단순히 교실 안에서 아이들과 선생님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서만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학교 밖의 다양한 문화적 시설들과 연계하여 아이들과 부모, 미디어 생산자와 정책 입안자 그리고 수용자들 사이에 서로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된다면 이를 통해 보다 다양하게 제공될 수 있을 것이다.
어른보다 더 빨리, 어른보다 더 많이, 어른보다 더 쉽게 전자매체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어설픈 보호와 통제는 서로 간 문화적 차이만을 드러내는 섣부른 접근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미디어와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아이들은 미디어를 만나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다. 그리하여 실제 그 과정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맥락들을 파악하고, 아이들이 전자매체와 함께 하면서 어떠한 모습으로 아동기와 청소년기의 시기를 거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전자매체 시대의 아이들은 어른들의 윤리적 통제만으로는 붙잡을 수 없고 전자매체에 대한 자유방임적 접근으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아이들이 전자매체를 통해 형성하는 미디어 문화에 대해 다른 아이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함께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이 속에서 어른들의 미디어 경험이 아이들의 경험과 더불어 이야기될 때 전자매체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미디어 권리가 올바르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박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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