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정주희(미술치료사)
여름 소나기가 하루에도 몇 차례씩 퍼붓는 날씨 속에 인사동의 한 갤러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으로 전시 개막을 알리는 테이프 커팅을 보기 위해 나도 고개를 삐죽이 내밀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톡톡 친다. 한 여학생이 나에게 갤러리로 들어가는 후문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그쪽으로 안내한다. 이번 전시의 주체가 되는 청소년 작가 중 한 명이다. 이 전시를 위한 프로젝트를 취재하며 안면을 익힌 아이다. 손님을 배려하는 품새도 주인급! 후문으로 들어가니 갤러리 내의 분위기가 훨씬 잘 와 닿는다. 작가와 청소년 작가뿐 아니라 이번 프로젝트와 관련 있는 사람들 모두 상기되고 설렌 표정이다. 갤러리가 꽉 찰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 환한 표정으로 함께 건배를 하고 있는 지금 이전시가 있기까지 그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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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대기중 ○○○> 전시 개막날의 다양한 풍경들 |
열정을 품은 자, 모여라!
서울시가 설립하고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운영하는 서울청소년문화교류센터인 미지센터에서는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작가를 꿈꾸고, 미술에 관심 있는 친구들에게 풍부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현대미술워크숍’과 ‘디지털 미디어 프로젝트’, 두 개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 <프로젝트 대기중 ○○○ 2005>가 바로 그것이다. 미지센터의 사회문화예술교육 시범사업이기도 한 이 프로젝트에는 예술에 대한 관심과 삶에 대한 열정 있는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참가를 신청했고, 최종적으로 51명의 청소년 작가들이 함께했다. 이들은 한 달여 기간동안 작가, 자원활동가, 동료 청소년 작가들과 함께 자신의 잠재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가진 특별한 경험의 주인공이 되었다. 올해 프로젝트는 지난해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면밀하게 준비했다. 가령, 작년에는 참가 청소년들이 주로 예술고 또는 미술고등학교 재학 중인 학생들이었다면 올해는 다양한 친구들이 참가할 수 있도록 참가자격의 조건을 많이 열어둔 편이었다. 그래서 미술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관심과 호기심이 있는 친구들, 대안학교 학생들, 대학생들까지 그 범위를 넓혔다. 그리고 작업의 결과물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접근성이 좋은 인사동의 갤러리를 전시 장소로 택했다. 현대미술워크숍은 청소년들과 미술 문화를 공유하고, 고정관념을 깰 수 있는 청소년들의 사고방식에서 자극을 얻고자 하는 국내외 작가들, 미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는 청소년들 그리고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으로 이들을 보조하고 있는 자원활동가들이 함께했다. 현재 미술을 전공하거나 공부하고 있는 친구들이 아니어도, 미술에 대한 관심이 있는 친구들이 이 프로젝트를 통해 그들의 잠재능력을 발견하고 개발할 수 있도록, ‘열정’이라는 선발기준을 통해 청소년들의 참가신청을 받았다. 선발된 청소년들은 오리엔테이션에서 7명 작가들-김명신, 박준범, 정연두, 최진기, 딜란 스톤(Dylan Stone), 가브리엘라 버틸러(Gabriela Bertiller), 준이치로 이시이-이 발표하는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듣고 팀을 선택했으며, 작가와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작업에서 전시에 이르기까지 주체적으로 프로젝트에 참가하며 현대미술을 직접 접했다. 디지털 미디어 프로젝트는 청소년 작가들이 디지털 미디어의 전 과정(촬영부터 편집까지)을 직접 제작해보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그 결과물은 9월 서울넷&필름페스티벌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 풍경 하나: 할머니 프로젝트?
전시를 며칠 앞두고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인 가브리엘라 버틸러 팀의 작업실을 찾아갔다. 이 팀의 작업장소는 창동미술창작스튜디오. 예술적이고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높은 천장이 인상적인 곳이다. 흰색 톤의 복도를 따라 작업실을 기웃거리는 내 발걸음과 숨소리에서 설레임과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조용한 작업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숨죽이며 작업실로 들어가자 작가인 가브리엘라 버틸러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고, 학생들은 저마다 맡은 파트의 작업에 몰입하고 있다가 낯선 사람에 대해 잠시 궁금해 했고, 궁금증이 해소되자 다시 작업에 열중했다.
가브리엘라 버틸러, 미술고에 다니고 있는 6명의 여학생들과 1명의 자원활동가로 이루어진 이 팀은 우리 주변에서 간과되는 사물에 관심을 가지고, 그 사물들의 공통점을 찾아‘할머니’라는 오브제로 도출해냈다. 지나치며 눈여겨보지 않는 사물들을 아름답게 꾸며보자는 취지로 할머니 이미지를 아름답게 표현하고 그 소중한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을 바탕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할머니가 앉으실 안락의자, 착용하실 옷과 신발, 할머니와 어울리는 소품인 털실 꾸러미가 흰색과 은색 반짝이로 한창 꾸며지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동대문 시장에서 발품을 팔며 재료를 사고 작품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할머니를 전시회 때 초대하기 위해 길거리에서 즉석으로 할머니를 섭외했다. 이 모든 것들이 미술작가가 하는 작업의 일부라는 것을 몸소 경험하고 있었다.
미술에 관심 있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진로를 위해 현재 할 수 있는 일들은 극히 제한되어있다. 타 과목보다 미술에 더 비중을 두는 학교에 진학을 하거나, 미술학원에 다니며 그림 잘 그리는 법을 배우는 정도이다. 그래서 현대미술 작가의 작업 현장을 직접 경험해보는 것은 이들이 진로를 선택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화가, 작가라는 사람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보니 그들이 우아하고 고상하게 이젤 앞에서 보내는 사람이 아닌, 발품을 팔아 재료를 사고 자신의 고민과 생각들을 이미지로 나타내고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무심히 지나치는 사물에서 할머니의 이미지를 뽑아내고, 할머니의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미술과 삶을 관련짓는 경험을 했다. 창조과정을 거쳐 자신의 생각과 노력이 묻어 있는 결과물을 얻어내는 경험은 삶의 태도에 작용하여 성취감을 맛보게 한다. 또한 자신의 잠재력을 깨워 성장하게 만들었다. 조용하고 수줍음 많은 여고생이지만 작품 컨셉을 잡고 작업을 하는 모든 과정에서 이들은 남과는 다른 자신의 의견과 문제해결 방식을 적극적으로 제시해 나가고 있었다. 또한 함께하는 작가, 동료 청소년 작가들, 자원활동가와 작업방향에 대해 의견을 조율하는 법을 배우고, 이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 풍경 둘: 다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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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의 포장지가 다시 과자가 된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오브제를 새롭게 조망하는 작업을 한 최진기 팀 |
현대미술워크숍에 참가하고 있는 또 다른 팀인 최진기 팀의 작업장소인 홍대 쌈지 스페이스를 찾아가는 길, 건널목에 레게머리 소녀가 보였다. 초행길이라 두리번거리며 길을 가는데 그 소녀와 방향이 같았다. 쌈지 스페이스에 도착해 작가의 작업실로 올라가는 길에서도 레게머리 소녀가 앞장서 갔다. 역시나 이번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청소년 작가였다.
이 팀은 작업 속도가 빠른 편. 전시 하루 전날 모든 작업이 끝나 갤러리로 작품을 이동해 설치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작가의 방에서 아이들이 꽃피우는 수다를 듣는 사이, 작품을 이동시킬 차량이 도착하였다. 작품 운반을 부탁드리고 모두가 지하철을 타고 인사동으로 이동했다. 같이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최진기 작가에게 질문을 던졌다.
“과자껍질로 다시 과자를 만든다고요? 어떤 의미인가요?”
“주연과 조연이 바뀌는 거죠. 그리고 각자 선택한 음식이 다르고, 선택한 음식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빼빼로, 키세스, 가나 초콜렛, 오레오, 냉동만두, 후렌치파이… 갤러리 한쪽에 탁자와 의자가 놓여지고 좋아하는 음식이 한 상 차려졌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니 먹을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작업하다 보면, 그 음식을 포장하고 있던 껍질은 다시 음식으로 탄생된다. 알맹이는 사라지고 알맹이를 감싸고 있던 껍질이 떡하니 알맹이가 되는 것이다. 한 청소년 작가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즐겨 찾던 걸 자세히 관찰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그 덕에 자신이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새롭게 볼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익숙하던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법을 미술이라는 매개를 통해 배웠단다.
작업은 계속된다
가브리엘라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작품을 퍼포먼스와 설치 두 가지 형식으로 표현한다는 얘기를 듣고 어떤 퍼포먼스를 하냐고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작업과정에서 의논을 하고 몇 번씩 동대문 시장을 다녀오고 할머니를 섭외하고 갤러리에 작품 설치를 하는 모든 활동들이 퍼포먼스라고 했다. 전시 오픈 날 갤러리를 찾았을 때, 그 이야기가 더욱 확실하게 다가왔다. 자신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갤러리를 안내하고 다른 팀의 작품을 감상하는 모습, 공동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팀원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표정, 작품을 감상하러 온 손님들이 방명록을 쓰고 나면 작품의 의미를 알리는 티셔츠를 나눠주는 풍경들은 아마도 그곳을 찾은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맥락에서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현대미술의 작업과정을 몸소 경험하는 일은 실제적인 작업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에게 갈증해소의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최진기 팀에 동참한 자원활동가 문세희 씨에게 소감을 물어봤다. 문세희 씨는 미술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이전에 다양한 청소년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최진기 작가와 청소년 작가들 사이의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녀는 실제 작가와 미술을 공부하고 있는 청소년들이 작업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이 직접 작업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옆에서 이들을 보조하고 지켜볼 수 있었던 자신의 역할도 이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미술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그림을 잘 그리거나 손재주가 뛰어나지 않으면, 미술을 접하고 실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는 쉽지 않다. 특히 진로를 결정할 시기에 놓여 있는 청소년들에게는 보다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경험들만이 앞으로 그들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내가 관심 있는 그것을 한 번 해보았다는 것, 그리고 경험한 범위 내에서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는 만큼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을 일찍 경험한 이들의 미래는 보다 희망적이지 않을까? 무더운 여름 한 달여 동안의 작업과정 끝에 각자 나름대로의 ○○○를 채웠던 시간들을 떠올려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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