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을 통해 생각한다.
지난 8월 ‘올림픽 폐인’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2004 아테네 올림픽’을 밤새고 지켜보았다. 한 때는 3S 정책, 배타적 민족주의 등을 거론하며 의식적으로 이러한 경기 관람을 멀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2002 월드컵’ 때에는 새로운 형태의 ‘거리 문화’를 접했고, 어느새 “대~한민국”을 외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그저 문화를 즐긴 것뿐이야’라고 생각하며 애써 ‘의식’에는 변함이 없음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아테네 올림픽이 시작되면서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종목은 다이빙이다. 그 짧은 시간에 멋진 연기를 펼치고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선수들은 한 마디로 ‘예술’이었다. “이거는 해설이 필요 없어요. 그 자체가 예술이네요.”라며 해설자도 말을 잇지 못한다. 한국 선수들이 나오지 않는 경기이지만, 순수하게 그 경기 자체에 매료되어 지켜보았다. 문화예술과는 상관없는 ‘스포츠, 운동, 체육’이라고 여겨지던 올림픽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였다. 그래서일까? 이번 올림픽을 보면서도 민족주의 등이 스쳐가기는 했지만, 그것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감상자의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비인기 종목으로 접하기 힘들었다가, 올림픽 기간만 되면 ‘효자 종목’이라 불리우며, 급속도로 친숙해지는 종목들이 있다. 4년마다 보게 되니, 초반에는 경기 방식도 잘 모른 채 그저 보게 된다. 방송 편성표에 따라 계속 지켜보다 보면 어느 정도 그 경기에 익숙해지고, 관심과 함께 궁금증도 생기게 된다. 그러면서 ‘무엇인가를 얼마나 접하는가, 그래서 그것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고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문화예술교육 또한 마찬가지이다. 문화예술을 접할 기회가 많아지고, 그 접근 방식이 다변화된다면, 사람들은 그만큼 감수성을 키워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체육 수업도 문화예술교육이 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러한 관심이 일상생활로 번진다면 그것이 생활 스포츠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 될 것이고, 스포츠 문화 형성을 위한 바탕이 학교 체육 수업에서 이루어진다면, 이것 또한 문화예술교육이 아닐까?
새로운 체육 수업을 만나다.
체육 교과 내에서도 문화예술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교사가 있을 것이란 신념을 갖고 ‘체육교육지’를 살펴보았다. 학창 시절의 체육 시간에 대한 경험은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중간/기말 평가를 기점으로 하나의 테크닉을 배우고, 한달 정도 그것을 반복하고 시험을 본다. 혹은 한 시간 내내 남학생들은 축구를 하고 여학생들은 발야구나 피구를 한다. 아니면 운동장 그늘에 앉아 수다를 떨다가 교실로 돌아온다. 이런 생각을 하면 체육을 문화예술교육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지만,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실감할 만큼 새로운 체육 수업을 시도하는 선생님들이 계셨고, 그들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새로운 체육 수업을 꾸준히 개발하고 진행하고 계시는 노수신 선생님(인천산곡여중)과의 인터뷰를 통해 체육 교과에서의 문화예술교육의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아르떼‘감상 수업’을 진행하고 계신데, 감상 수업을 계획하신 의도는 무엇인가요?
노수신스포츠 중에는 미적표현을 주제로한 다양한 경기들이 있습니다. 기계체조, 리듬체조, 아크로뱃, 하이다이빙, 수중발레, 피겨스케이팅, 발레스키, 모글스키, 에어리얼스키 등 그 종류도 다양하죠.
신체의 미적표현은 인간의 움직임의 욕구로부터 시작 되었고, 이러한 원초적인 욕구에서부터 우러나온 단순한 신체적 움직임은 이제 하나의 문화로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미적표현 중심의 스포츠는 운동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예술의 한 분야입니다. 즉, 단순한 근육의 운동만이 아닌 특정 의도와 연출이 포함된 정신활동을 포함한 과정으로서 다양한 동작과 운동기술로 구성된 창의적이고 실제적임 움직임과 이를 통한 아름다운 선과 공간미를 창출하는 움직임 예술이죠. 음악이 시간 속에서 존재하고 미술이 공간 속에 존재한다면 미적표현 중심의 스포츠는 시간과 공간의 합일의 상태에서 존재하는 종합예술입니다.
감상 수업 모형은 미적 표현을 연출한 선수들의 작품이나 신체활동의 미를 보는 안목을 높임으로써 신체적, 정신적, 문화적 맥락에서 스포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관련 스포츠 종목을 이해하고, 이를 분석하고 판단하여 경기 행위의 가치를 나름대로 비평할 수 있는 수업 모형이죠.
아르떼감상 수업 등 기존 수업과는 차별화된 체육 수업을 시도하고 계신데, 어떤 계기에서 이러한 수업을 시작하시게 되었나요?
노수신지금 대부분의 기성세대들에게 “체육이란 어떤 과목입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거의 예외 없이 “운동기능과 운동수행능력을 높여주는 과목” 내지는 “체력을 육성시켜주는 과목”이라는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80년대 초반 미국에서 체육교육학이라는 과목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돌아온 유학파들은 미국의 선행 연구들과 그들의 연구방식으로 무장한 그들은 체육교육에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게 하였으며 체육수업 자체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입증하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생각은 그들과는 좀 다릅니다.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별로 난 것도 없는데) 전적으로 그들 방식대로 따라가자는 것은 좀 억지인 듯합니다. 우리는 우리토향과 우리 입맛에 맞는 교수학습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상중심 수업모형]과 같은 독자적인 수업모형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요즘 교육계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교육사조 들 중에는 구성주의, 사회적 상호주의, 인지심리학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과 저의 교육철학이 딱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체육수업을 되돌아보고, 고쳐 나가는 중입니다.
아르떼체육 수업에서 문화예술교육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노수신스포츠 문화를 체육교과에서 가르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스포츠 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체육을 스포츠나 체력육성 건강관리 등과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은 자칫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체육은 체육만이 가지는 고유한 방식에 따라 전인교육을 이루어내는 교과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서 스포츠와 체력과 건강 등이 도구적으로 활용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체육의 문화적, 예술적 특성이 다양한 교육적 도구들을 통해 체육의 고유한 방식대로 가르쳐질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르게 말한다면 체육교과에서 문화예술이 또는 문화예술에서 체육교과가 공통분모가 없음이 아니라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죠.
아르떼다른 교과, 예를 들어 미술이나 음악 교과와의 통합 교육을 생각해보신적이 있나요? 그러한 시도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노수신초기 체육과목 시절(18세기)부터 음악과 체육은 상당한 친밀성이 있었습니다. 요즘 제가 실시하고 있는 기계체조 수업엔 비트 있는 음악들을 많이 사용합니다. 음악은 아이들에겐 활동력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좋은 동기유발 매체입니다. 또한 음악 줄넘기수업은 음악과 신체동작의 조화자체가 학습의 목표가 되고요. 음악에 맞추어 동작을 하는 초보적인 수준에서 창작 작품을 만드는 고등단계까지 다양한 형태의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또 지금 진행 중인 기계체조 단원이 끝나면 멀리뛰기를 할 텐데요. 이때는 미술 작품이 나오게 됩니다. 멀리뛰기를 잘하기 위해서 ╔═╗모양과 ◎모양 그리고 △모양의 운동 보조기구를 만들어야 하는데요. 운동 보조 기구는 재활용품을 활용하여 학생들이 제작하게 됩니다.
노수신선생님의 체육 수업에는 멀티미디어 자료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체육과 관련된 다양한 소재로 아이들과 함께 드라마 영상물을 제작하시기도 한다. 지금도 새로운 콘티를 짜고, 영상 작업을 계획 중이시다. .
새로운 문화예술교육의 가능성을 본다.
현재는 문화예술교육/체육 사이의 관계가 애매하다. 한국 사회에서 예체능이라는 이름 하에 같이 묶여 가지만, ‘문화예술/체육 교육’이라는 구분에 의해 문화예술교육에 체육이 포함되지는 않는 것 같다. 아직까지 체육은 ‘체육’일 뿐이지 ‘문화예술교육’이란 생각이 쉽사리 들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체육의 개념 확장이 필요한 때이다. 운동 기술을 익히고,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 존재하는 교과목의 의미를 뛰어넘어, 그 안에 담긴 문화적 가치를 발견하고, 스포츠 문화를 길러가는 수업으로 확장될 수 있다. 월드컵 때 ‘붉은 악마’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은 축제를 즐겼다. 많은 사람들은 축구 경기 자체보다는 그 때 이루어진 ‘축제, 광장’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스포츠는 즐기는 것이다. ‘하는’ 스포츠뿐만 아니라 ‘보는’ 스포츠에 대한 교육도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참여하는’ 스포츠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면 새로운 문화교육이 될 것이다. 그러한 스포츠 문화가 교육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 구성원들이 스포츠를 즐길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향유자 교육이며, 문화예술교육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또 다른 문화예술교육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스포츠 문화 교육을 생각하며, 문화예술하면 떠오르는 한정된 교과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문화’ 교육을 떠올려 본다. 사회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문화, 그리고 이러한 문화 교육을 펼쳐가는 ‘문화 사회’를 상상해본다. 정책과 관련된 좁은 범위의 문화예술교육이 아니라, 다양한 교과에서 다양한 문화예술교육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범위를 확장해 나갈 수 있다. 문화예술의 범위가 다양한 것처럼, 문화예술교육의 범위도 다양한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문화적 상상력을 키워가는 노력이 계속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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