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나라로 오세요
“저것 봐~!”
아이들이 자기키보다 큰 인형들을 보곤 낯설어 눈이 동그래지며 서먹해 하기도, 까르르 재미있어 하기도 한다. 자기가 응원했던 인형극의 주인공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때면 박수를 치며 환호한다.
아이들은 인형과 친하다. 피카츄와 디지몬, 키티와 푸우처럼 유명한 인형도 좋아하지만, 침대 위에 놓여 있는 물개인형, 곰인형에 이름을 지어주며 친하게 지낸다. 인형과 첨벙첨벙 물장난을 하고, 인형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한다.
이렇듯 아이들이 친숙했던 인형들을 거리에서,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축제가 있다. 춘천인형극제가 그것이다. 춘천인형극제는 1989년에 시작되어 올해로 16회째를 맞이하는 세계규모의 인형극 축제이다. 8월 6일부터 8월 15일까지 펼쳐졌던‘춘천인형극제 2004’(http://cocobau.com)에서는 러시아의 줄 인형극, 네덜란드의 손 인형극, 이탈리아의 발 인형극 등이 초청되었고, 국내 유명인형극단과 아마추어 인형극단들이 참여했다. 특히 이번 춘천인형극제는 국내 최초의 인형극 전문 박물관인 춘천인형극박물관의 개관(8/6)과 더불어 개최되어, 여느 해보다 뜻 깊은 행사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인형극은 주로 어린이들이 향유하는 공연예술 장르이다. 아니,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들이 향유하는 ‘공연예술’로서 자리매김 했다기보다는, 유치원, 학교 등 일상에서 흥미를 갖고 체험하는 ‘문화적 학습의 매개물’로서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상상력과 언어적 체험, 몸의 체험, 소통의 경험을 하게하는 대표적인 장르가 동화구연과 인형극이다. 때론“저는 동화구연 전국 1등이에요”라고 자기소개를 하게 만드는 경쟁지향의 사회/학교의 구조가 놀이와 문화, 성취의 즐거운 경험일 수 있는 동화구연과 인형극을 또 하나의 ‘어린이 교과’로 만들어 버리곤 하지만 말이다.
상상력을 고취시키고 문화적 체험을 선사한다고 하는 인형극이 인형극 축제의 장에서 하나의 체험프로그램으로 마련되었다면 어떤 상일까? 아르떼는 문화예술/공연예술 축제의 장이면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체험프로그램을 마련한 춘천인형극제를 취재하기로 했다. 춘천인형극제의 1일 체험프로그램 중 하나인 ‘번개인형극’이 제 6호 웹진‘땡땡’[현장탐방]의 주인공이다.
번개인형극은 하루 동안 대본을 만들고 인형을 만들고 연습을 해서 직접 인형극 공연을 하기까지의 인형극 제작의 전 과정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문화예술체험을 제공하자는 기획의도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 즐기고 놀이하는 장에서 즐기고 놀이하면서 직접 해내기까지 하는 체험이라니, 제법 멋지게 들렸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는 아이들이 축제의 장에서 축제를 즐기는 향유자가 되기는커녕, 다시 대본을 외우고 학습하고‘해내야함’의 스트레스에 힘겨워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뭉게구름처럼 품고 취재에 임했다.
인형의 나라에 온 너, 나, 우리
8월 12일, 오전 10시 반, 춘천시 청소년 여행의 집 2층. 일곱 살에서 열두 살까지의 14명의 아이들과 4명의 선생님이 두 조로 나뉘어 머리를 맞대고 대본을 구상 중이다. (춘천인형극장, 춘천시 청소년 여행의 집, 강원도 청소년 수련관은 삼각형 구도로 모여 있다. 청소년 여행의 집은 춘천인형극제 기간에 숙소로 사용되었다.)
선생님“우리 조가 오늘 할 얘기는 물고기 얘기에요. 우리 조가 일곱 명이니까 일곱 가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요. 물고기 이야기를 하려면 뭐가 있어야 하죠?”
아이들“낚시꾼!”
“물고기!”
“인간!”
선생님“유경아~유경이는 처음에 어떤 장면을 넣으면 좋을까?”
(아이들이 머뭇머뭇 반응이 없자)
“이게 대본인데, 우리 친구들이 이걸 다 외울 수 있겠어요?”
아이들“네~”
선생님“정말?”“이거 한 줄씩 읽어보자, 말하는 것처럼, 홍일이 먼저 해볼래?”
홍일이“저건 구름이라고 하는 거야!” “구름? 하, 그거 참!”
우려했던 대로 아이들이 대본을 쓴다는 게 만만치 않자 선생님이 가져 온 대본을 읽어보자고 한다. 혹시 주입식 대본암기? 하지만 이내 아이들은 지루해 했고, 선생님들은 지루함을 떨치기 위해 인형 만들기를 제안했다. 미리 조각조각 형체가 만들어져 있던 인형 재료들을 탁자위에 꺼내놓자, 아이들은 언제 지루했냐는 듯이 눈이 반짝거렸고 인형재료를 고르려고 탁자 위로 우당탕탕 올라오기까지 했다. 1조 푸른 조는 물고기 이야기, 2조 푸른하늘 조는 애벌레 이야기. 인형극에 등장하는 물고기, 낚시꾼, 애벌레, 문어, 포도, 수박 등을 만들기 시작했다.
오전 11시 반. 아이들은 인형 만들기가 한창이었고, 인형을 만들면서 이렇게 신나하지만 정해진 대본을 외우려면 공연도 하기 전에 지칠 텐데, 라고 생각하며 연습장을 나와 춘천인형극박물관으로 향했다.
인형극박물관을 둘러본 후 행사팀장 권선정씨를 찾아가서 번개인형극에 대한 몇 가지 궁금한 점을 물어 보았다.
송정아아이들이 대본을 쓰고, 인형을 만들고, 연습을 하고, 인형극을 실제로 하는 일정은 하루 동안 소화해 내기엔 굉장히 강도가 센, 힘든 일정이라고 생각한다.
권선정대본 분량은 최소한 간단하게 한다. 백설 공주 이야기를 따온다고 해도 아이들이 원하는 대사를 넣거나 한다. 강사들마다 차이가 있다.
송정아아이들의 반응은 어떤가?
권선정인형 만드는 것은 굉장히 좋아한다. 연습시간은 점심 먹고 인형 만드는 것을 마치고 3~4시간이다. 짧다보니까 막상 무대에 서서 하면 떨기도 한다. 핀 마이크를 달고 무대에 서니 인형극을 한다는 느낌이 드는가 보다. 작년에 했던 친구가 하기도 하고 자매, 남매, 형제끼리 같이 오기도 한다. 연습할 때는 지루해 하다가 무대에 서면 좋아한다. 전체적으로는 아이들이 흥미로워하는 분위기다.
오후 3시. 인형극 박물관과 인형극장 앞의 풍경을 스케치하다가 다시 번개인형극 연습이 한창인 춘천시 청소년 여행의 집으로 갔다. 아이들이 모인지 다섯 시간째. 기자는 벌써 더위를 먹었는지 힘이 없다. 아이들도 지쳤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연습이 한창인 방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의외로 아이들은 지치기는커녕 뛰어다니고 있었다.
“뭐하고 놀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자~”
“그래!”
어라, 시작할 때 봤던 대본이 아니다. 아이들의 일상이 대본이 되어 있었다. 그 대본은 글자로 쓰여 지지 않은 대본이었다, 놀듯이 연습하니 지치기는커녕 너무 재미있게 연습하고 있었던 것.
푸른하늘조(애벌레이야기)
(애벌레, 딸기발견)
“얌얌얌얌 맛있다, 정말 맛있다”(노래합창)
“선생님, 왜 오리가 나비를 낳는지 알아요!”
(오리가 알을 낳는 다음 장면, 나비가 등장한다)
푸른조(물고기이야기)
“문어할아버지~”
“하하하하하”(“문어아줌마”대사를 “문어할아버지”라고 하니 아이들이 깔깔대며 웃는다)
문어아줌마: “얘들아~ 너무너무 배고프지”
아이들: “네~”“저두요”“저두요”“저두요”“저두요”“저두요”“저두요”
물론, 다섯 시까지 이어지는 연습에 지루해 하는 아이도 있었다.
리허설 장으로 이동하면서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재밌어요? 힘들지는 않아요?
“대사 잊어버렸을 때 힘들었어요”
“계속 손들고 기다리고 있었을 때 좀 지루했어요”
“나는 지루할 때가 없었어”
다른 아이들과 달리 특히 지루해 하는 것 같았던 학도에게 물어봤다.
“재밌어요?” “작년에도 왔었어요?”
“작년에는 인형극 보러오고 지난번에 왔을 때는 그냥 재밌었는데, 이번에는 이거했는데 약간 재미 없어요”연습하는 과정에서 학도가 느끼는 감정은 8살 아이가 느끼는 지극히 당연한 감정이었다. 학도가 재미없어 하자, 홍일이는“안하면 너희 엄마 대 실망이다”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고 효정이는“학도야 너 대사 다 외웠잖아”라고 격려하기도 한다. 학도는 막상 공연에 들어가자 가장 들떠서 재미있게 해냈다.
6시 반. 리허설을 끝내고 공연시간(7시)을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이 약간 지쳐보였지만, 막상 7시가 다 되어 마이크를 다니 이제 정말 하나보다, 싶다. 엄마 아빠도 무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드디어 하루 종일 연습한 인형극을 보여준다는 생각에 점점 들뜨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대사를 잊었을 땐 킥킥거리면서 웃음을 참지 못했지만, 그 자체가 인형극의 분위기가 되어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번개인형극에 참가한 근화초등학교 5학년, 김화경 어린이는 인형극을 준비한 느낌이 어떠냐는 사회자의 질문에“재미었었던 거는 포도 색칠하는 거였구요 지루했던 거는 배역정할 때 똑같은 것만 했던 거요.”라고 답했다.
신남과 지루함, 인내와 정서적 만족감으로 버무려진 문화적 체험
기자가 보기에 ‘번개인형극’은 많은 캠프나 축제에서 이뤄지는 교육프로그램이 대게 그렇듯이, 짧은 시간동안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 참여하는 아이들이 힘든 일정을 소화해야만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렇지만, 끝까지 지켜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인형극 제작을 유도함으로써 아이들로 하여금 일정정도 과정을 즐길 수 있도록, 성취감을 맛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날 번개인형극의 강사 중 한명인 춘천인형극단의 김경미씨는 아이들을 위한 인형극을 많이 해왔지만 직접 지도하는 것은 처음이라면서도 힘든 일정 속에서도 아이들의 표정이 밝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되도록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했다는 답을 해주었다.
기능적인 교육이 되기 쉬운 압축된 교육프로그램, 정해진 룰대로 한번씩 체험해보는 체험프로그램이많다. 감수성을 고취시키고 더불어 사는 삶을 배워갈 수 있는 문화예술교육을 위해서는 일회적인 또는 기능적인 체험프로그램은 그 소임을 다 할 수 없다. 또한 결과물을 짧은 시간동안 만들어내기 위해 아이들에게 힘든 일정을 강요하는 체험프로그램은 체험의 질과 즐거움을 피로와 부담감으로 오염시키기 쉽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의 어린이들이 인형극 제작의 전 과정을 경험해보는‘번개인형극’은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힘든 일정이라는 점이 우려되었었다. 그 지점은 여전히 개선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준비된 소재지만 그 소재로 짧은 이야기를 만드는 경험, 준비된 재료이지만 그 안에서 색깔을 고르고 색칠을 해 인형을 만드는 경험, 친구가 지루해 할 때 다독이면서 때론 핀잔을 주면서/받으면서 끝까지 함께하는 경험, 그리고 마지막으로 엄마, 아빠, 동생, 관객들 앞에서 직접 인형극을 해 내보이는 완료된 경험. 그 경험을 통해 아이들 스스로가 느끼는 짜릿함과 자랑스러움을 볼 수 있었고, 장장 아홉 시간의, 신남과 지루함과 인내와 정서적 만족감으로 버무려진 ‘체험’이 아이들에게 소중한 문화적 자원이 되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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