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는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아요. 공주
시립 박물관에서 일하는 공무원이고
공주의 문화 자원으로 서민들의 생활 속에
담겨있는 모든 것을 조사하다가 없어지는
공주의 민요가 안타까워 소리도 하고
그라는 사람. 문학은 17살 때 잡은 건디,
지금은 민속이 앞서서 시들한 편이어유.
올 겨울에는 민속을 주제로 희곡 두 편
썼는데 체면은 유지하구 있네유.

 

Q. 공주 석장리 박물관장,
공주 토속요 소리꾼, 문인.
선생님의 직업은 한 마디로 정의
하기가 어렵습니다.
본인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공무원이지유. 낮에는 공무원을 최우선
으로 생활 하는디 사는 게 이상하니까, 그걸
인정하는 분이 많지 않어유. 그리구 저 혼자
하는 일은 지금 말씀하신 것보다 더 중요
하게 생각하는 일도 있어유. ‘향토 민속
채록자’ 이게 남들이 저를 기억해 주었으면
해유. 요새 하기 좋은 말로 향토사학자
라고 하던데 그건 싫은 맘이어유. 조사에
연구를 더하는 학자는 아닝께. 거짓 없이
조사하고 채록하고 정리해서 남기는 일,
거기까지만 제 일이라구 생각해유.

 




Q. 가난 때문에 학교는 포기
하셨지만, 삶은 포기하지 않고
공무원이 되셨습니다.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인생을 포기하는 게 가능한가유?
가난했지유. 변변한 재산도 아버님이
육남매를 남겨 두고 3년 동안 아프시다
돌아가셨으니까유. 지 학력을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학교 1학년 9월 중퇴고.
이후에도 운이 좋지 않았어유. 형님 두 분이
젊어서 돌아가시고, 또 다른 우환도 있었고.
그런디 아버님 돌아가실 때 최악은
지 건강이었지유. 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돈이 없으니까 병원을 못가고, 일을 못할
정도였는데 사는곳은 농촌이었어유. 겨우
며칠 품삯을 모아 병원이 갔더니 이대로
치료 않하면 죽는다고 하더라고유. 돈을
더 가지고 어른 모시고 오라고. 혼자 되신
어머니가 끼니도 못 챙기고 사는데…
할 수 없는 일이었지유.

 

그래서 17살때 하늘이 날 더러 죽으라고
하나 보다, 싶어서 죽자 했슈. 죽음만
기다리면서 읽은 책이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여인들]이었지유. 그 책을 몇 번
읽었는지 몰라유. 며칠 동안 반복해서
읽었는디 그때 그 생각을 했슈.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나두 이런 책 한 권만
쓰고 죽자.

참 신기한 건 그 이후로 저한티 어려운 일은
없었슈. 읽을 책이 있고 쓸 원고지나
공책만 있으면 불편하지 않더라고유. 혼자
공부해서 쓰는 것이니까 공부를 해야
하는데 당시 공주 문화원 도서관에 가면
책은 많았으니까유. 닥치는대로 읽고
쓰면서 10년을 살었어유. 돈벌이는 되는
대로 했고유. 그냥 책을 읽고 쓸수 있으면
행복했슈. 문학 외에는 극복이라는 말을
떠올릴 이유가 없네유.

 

Q. 공주시청 문화관광과
근무 시절 많은 작품을 기획
하셨을 뿐만 아니라
‘신풍명 선학리 지게놀이’
등을 발굴해 충남도지정문화재로
지정하는데 큰 공을 세우셨습니다.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A. 그 뭐냐 면서기가 되어 시골 마을을
들어다니면서 노인들과 경로당이서 일을
했는데 그 분들 얘기 속에 글의 소재가
수두룩 했어유. 사실 소설에 쓸 소재를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유.
속에 들어 있는 아픔을 털어 놔야 하는데
어떻게 쉽겠슈. 그런디 어른들 표현으로
‘대동아 전쟁’이나, ‘동란’을 겪고 새마을
사업을 하구 있는 노인들 한테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어서 시도 있고 소설도 있는데
그게 역사와 맞물려 있었어.
그래서 신나서 했슈.
그라다가 지방 신문에 기고한 글이 인연이
되어 군청으로 가게 되고 공주시로 통합
된 후에 공무원의 업무로 문화예술을 맡게
되었어유. 그제서야 공무원들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을 제대로 알았고유. 그때 공주
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 행정이
‘백제문화재’였어유.

 

그거 알고나서 처음으로 한 일은 축제에
대한 교육을 찾아 다니면서 받았어유. 그때
기획한 것들이 ‘웅진성 수문병근무교대식’
이고 이건 경복궁보다 우리가 빨리 시작
한거예유. ‘무령왕 즉위식’, ‘동성왕 연회재연’
백제 왕실의 호위무사 열병식을 꿈꾸었던
‘어검천룡’ 그런 작품에 대본을 쓰고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면서 고증을 받고
소품을 만들고 연출해서 지역 예술인들에게
넘기는 일을 진짜 미쳐서 했슈.
스스로 행복해 했구유.

 

Q. 전통문화 계승과 문학, 그리고
소리까지 선생님의 삶은 예술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에게
예술은 어떤 의미인가요?

 

A. 하늘이 시켜서 하는 일이유. 문학을 시작
할 때는 가난과 병으로, 거기다가 죽음을
앞세웠으니 얼마나 절박하게 시작했겠슈.
살아 있는 동안에 그거 하나만 하자고
했는디. 먹고 살아갈 방법으로 공무원이
되었고 공무원이 되었으니 글 쓰는 일이
어렵겠다 했는데 경로당에는 글감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알고 나서 민속도 알게 됐고.
민속이냐 문학이냐를 놓고 고민할 때는
이런 생각을 갖게 하더라고유.

 

문학은 내가 하지 않아도 할 사람이 많은디
민속은, 특히 공주 민속의 조사는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했슈.

그래서 요즘은 ‘사람은 하늘이 시키는
일뿐이 못하는 기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어유.

 

Q. 우리나라 청소년에게
전통문화를 알리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통문화가
아이들에게 미칠 영향과 반드시
필요한 이유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이건 진짜 누가 물어봐도 한숨 나오는
일이어유. 요즘 제가 강의도 나가유. 대상이
누구든 어떤 소재로 말하든 마지막 결론에
꼭 하는 말이 있슈. ‘대한민국에 대한민국이
없다’ 없어도 좋을 게 없다면 모르지만,
세계 어느 민족 어느 나라에서 갖고 있는
정신보다 훌륭한 가치관으로 살아온 우리
조상님의 지혜와 얼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어렵고 초라하고 비능률적인 것
으로 매도해서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버린것이 되었어유.

 

그런데 이게 현재가 무서운 게 아니라
앞으로 10년 20년 후만 생각한다면 끔찍한
일이라는 거예유. 베토벤의 음악을 모르면
안되니 유치원만 들어가면 피아노 학원을
보내고 서양의 대중 문화 조차 귀한 대접을
받고 유명해지고 돈을 벌 수 있으니 그와
관계된 정보가 넘쳐 나 아이들이 이른바
스타가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하는데, 우리 문화는 고생을 해도 돈이 되지
않는 현실이 청소년들에게는 따분하구
어렵게만 느끼잖아유. 그래서 저라도
청소년에게 가자. 청소년이 좋아하게 하자.
청소년들이 즐길 수 있도록. 그런 맘으로
살려고 노력해유. 그래서 다만 몇 명이라도
우리 문화 소중한 줄 아는 청소년이 늘어
난다면 10년 후 우리 문화가 초라해 지는
것을 조금은 줄일 수 있을 테니까유.

 

Q. 현재 전국에서 문화예술교육
이 시행되고 있지만, 아직도
아이들에겐 입시가 우선입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과
대안에 대해 할 말씀 부탁드립니다.

 

A.이 질문이 참 서글프게 하네유. 우리
문화 전통예술 중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
하는 건 간단해유. 대학에 전공으로 공부
할 수 있는 과가 있는 있어야해유. 입시
대상이다 하면 돈 잘 쓰는 우리네 어머니
들이 돈 벌이 시장도 만들어 졌어유. 그건
긍정적인 면인데 대학 졸업장의 위력이 쎈
우리나라에서는 그 분야 외의 것들을
죽이는 창이 되어 버렸어유.

지금 우리나라에 민속학과가 있는 대학이
경북 안동대학 하나 뿐이라고 들었는디,
참말로 고마지유. 전통민속의 미래를
말한다던가 걱정한다는 건 헛소리 같아유.
그런디 이건 민속과 관련된 교육의 문제고
전체 교육에서 입시 기계를 만들어 나가는
교육 풍토, 이걸 고치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출세의 척도가
고시라는 생각에 못 박혀있는
부모님의 의식이 원래 확고해서
바뀌지 않는 거 같아유.

 

Q.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 해주시길 바랍니다.

 

A.하늘이 시키는 일이나 하다 죽지유 뭐!
내가 할라고 용을 써두 않되는 일은
않되더라고유. 제가 하는 소리를 음반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절실한데 안되네유.
요즘은 좀 자유롭고 싶어유. 그래서 하는
말이 있네유. 하루 하루 즐겁게 살자.
그 즐거움을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면
좋구, 더구나 그 일이 세상에 이로운
일이라면 더 말해서 무엇하랴.

 

구체적으루 말하라믄 민속 채록은 60살
까지는 할꺼고유. 청소년들하구 우리
문화를 즐길 일이 많다면 행복하겠어유.
그냥 그렇게 열심히 살께유. 한편으로는
하늘이 좀더 어려운 일을 시켜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슈. 미쳤지유…

 

충청남도 공주시의 전통지키미 이걸재 관장. 그는 글도 쓰고 소리도 하고, 연출도 하는
팔방미남이다. 예술이 자신의 삶을 구원
했다고 말하는 이걸재 관장은 요즘 청소년
에게 전통문화를 알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
하늘이 자신에게 좀 더 어려운 일을
시켰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으며, 이걸재 관장의 뜻에 따라 사투리를 그대로 실었습니다.

 

글_김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