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와 위안을 주는 이야기꾼들, 드라마를 이야기하다

 

<종합병원> <올인> <허준> <상도> <주몽> 등 주옥같은 작품의 작가 최완규와 2007년 KT디지털 콘텐츠 공모전으로 드라마 작가로 입문한 28세의 초보작가 박빛나가 만났다. 현재 보조작가로 참여하고 있는 SBS 아침 드라마 <녹색마차>의 모니터링 때문에 밤샘 작업을 한 박빛나 작가는, 드라마 극본의 거장과의 특별한 만남에 피곤함도 잊었다.

 

박빛나 작가가 최완규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 그는 <태양을 삼켜라> 20회 대본작업에 한창이었다. MBC의 베스트극장 극본공모에서 <재미없는 사랑, 재미있는 영화>로 당선되면서 드라마에 입문한 최완규 작가처럼 박빛나 작가 역시 공모전 출신이다. 박빛나 작가는 2007년 KT 디지털콘텐츠공모전 드라마 기획안 당선으로 두 번의 보조작가와 메가TV 쌍방향 드라마로 tvN에서도 방송했던 <미스터리 형사> 중 한 에피소드의 극본 작업을 했다.

 

최완규: 10년 넘게 백수로 살다가 드라마 공모전에 당선이 됐을 때는 정말 기뻤죠. 하지만 공모 당선으로 인생이 획기적으로 바뀌진 않아요. 드라마 습작도, 준비도 없던 상태에서 공모전 당선 후 가까스로 어린 시절 살았던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단막극을 썼지만 아무도 읽어주질 않았어요. 누군가 읽고는 “글이 너무 무겁고 어둡다”고 조언했죠. 이는 표현을 좋게 한 거지, 못썼다는 말이에요. 결국 1년 만에 원점으로 돌아왔죠.

 

박빛나: 정말 공감해요. 공모전 당선되고 나서 누군가 저를 찾아주기를 계속 기다리기만 했죠. 하지만 수상 후 몇 달 동안 아무 연락도 없었고, 또다시 전과 똑같이 습작을 시작했어요. 여전히 읽어줄 사람은 없었죠. 열심히 습작한 극본을 읽어줄 사람이 절실했어요.

 

최완규: 그래서 중요한 건 기회가 왔을 때 잡아서 작품을 쓸 수 있는 개인의 역량, 능력이에요. PD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을 흥분시킬 수 있는 미니시리즈 기획안 서너 개 정도는 재산처럼 가지고 있어야 기회가 현실화될 수 있어요. 아주 우연히 방송국 드나들면서 만나 얼굴을 익힌 PD가 새 드라마 기획안을 부탁했어요.

 

그게 <종합병원>이었죠. 이걸 쓰기로 한 작가가 바쁘니 보조작가로 병원 가서 취재를 해달라고 해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세 달을 의사처럼 살았어요. 결국 메인작가로 참여하기로 했던 사람이 일을 할 수 없게 됐고, 저는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죠. 이미 석 달 동안 병원에서 생활한 제가 아니면 쓸 수 없는 극본이었거든요.

 

1년6개월을 병원에서 살았어요. 제 인생에서 제일 치열하고 열심히 살았던 시기였고, 막연했던 것이 분명해진 시기였죠. 한번쯤 미친 듯이 산 시간이 있어야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어요.

 

“천재시인은 있을 수 있지만 천재 드라마 작가는 없다”

 

박빛나: 드라마 작가마다 시청률에 대한 불안감이 있잖아요. 시청률에 대한 생각과 <종합병원>부터 <야망의 전설> <허준> <상도> <올인> <주몽> 등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신 비결이 궁금합니다. 제 친구 중 한 명은 “내 고3시절에 <허준>이 없었다면 서울대를 갔을 것”이라고 얘기하곤 해요. 그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신 거죠. 저 역시, 그런 작품을 쓰고, 오래 살아남고 싶어요.

 

최완규: 시청률에 대한 욕심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안정적인 시청률이 나오길 바라는

건 일하기가 좀 수월해지 때문이에요. 시청률이 안나오면 극본에 대한 말들이 많아지게 마련이거든요. 그리고 시청률이 드라마 한편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엄청난 데미지를 입히기 때문이기도 해요. 그래서 시청률은 매우 중요하죠. 저에게 <허준>과 <상도>, 이병훈 국장과의 작업 중에 했던 경험과 공부는 드라마 작가로서 살 평생의 밑천이 됐어요. 천재시인은 있을 수 있지만 천재 드라마 작가는 없어요. 30%는 발로 뛰고, 30%는 공부하고, 나머지 40%를 작가적 능력과 감각으로 채워야 작가로서 생명력을 오래 유지할 수 있죠. 드라마는 삶이고, 세상인데 긴 세월을 두고 다양한 인간의 삶과 세상을 이야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박빛나: 메가TV에서 <미스터리 형사> 중 한 에피소드의 극본을 쓰고 방송이 나갔을 때 “준비도 많이 하고 밀도는 있는 것 같은데 너무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잠깐만 딴 짓을 해도 이해가 안된다는 조언이었죠. 엉뚱한 노력을 했구나하고 반성했어요.

 

최완규: 드라마 준비할 때, 저는 <벤허> <스팔타카스> <닥터 지바고>를 꼭 봐요. 이들 영화 속에는 굉장히 단순하고 쉬운 드라마틱한 이야기 구조가 있거든요. 보다 많은 대중에게 친숙하고 폭 넓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종합병원>이나 <허준>에 무수히 많은 메디컬 상황이 있지만, 열심히 취재하는 것만으로는 재밌는 드라마를 쓸 수 없어요. 의사들이 재밌는 상황은 시청자는 이해조차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역으로 스토리나 구조는 제가 만들고 그 상황에 맞는 메디컬 상황을 의사들에게 조언을 받아요. 일종의 공부 요령이죠. 그리고 제가 경험한 사람들, 책이나 영화에서 본 캐릭터들을 어떻게 내 드라마에 새롭게 조합하느냐의 능력은 작가가 반드시 지녀야할 능력이죠.

 

드라마가 더 탄탄해질 수 있다면 각색도 의미 있는 작업

 

박빛나: 초보작가다 보니 극본을 작업하다보면 PD, 선배 작가, 제작사 관계자, 배우까지 많은 조언들을 해주세요. 경험이 일천하다보니 어떤 얘기를 들어야하고 배재해야하는지를 가늠하는 게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고집대로 가자니 확신이 없고, 들은 얘기를 적용하려니 너무 많고 늘 갈등의 연속이죠.

 

최완규: 물론 많은 이들의 이야기와 요구를 들으면서 자기 중심을 유지하기란 어렵죠. 하지만 드라마 <올인>에서 사람들이 가장 인상 깊게 봤던 멜로 장면은 배우 이병헌의 아이디어였어요. 배우만큼 그 배역을 많이 생각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작가 스스로가 잘 중재하고 컨트롤만 할 수 있다면 제작진과 배우 뿐 아니라 시청자들의 의견까지도 드라마를 생동감 있게 만들죠.

 

박빛나: 저도 많은 분들께 조언을 듣는 편이에요. 얼마 전 어떤 PD가 “단막극은 없어지는 추세니 미니시리즈 극본을 써봐라. 원작을 가지고 각색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조언을 주셨어요. 그래도 처음은 제 이야기로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을 많이 하고 있죠. 최작가님의 작품들은 원작이 있지만 완전히 다른 작품이라는 느낌이 강하잖아요.

 

최완규: 원작이 없으면 극본을 못쓰는 거 아니냐는 비판도 많이 들어요. <허준> <상도> <올인> 등이 전부 원작이 있는 드라마였으니까요. 하지만 요즘처럼 드라마가 많은 분위기에서 각색이라는 구조를 통해 드라마가 더 탄탄해질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작가에게 요구되는 큰 능력 중 하나죠. 각색할 원작이 없는 게 문제고, 각색했을 때 어떤 시각과 방법으로 접근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만드느냐가 중요합니다.

 

대중에게 위안과 재미를 주기 위해 노력해야

 

박빛나: 다음 작품까지의 기간 동안, 작품 구상도 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만만치 않은 것 같아요. 저같은 신인작가들은 또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서거든요. 최완규 작가님 같은 대작가들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해요.

 

최완규: 쉬는 시간이 별로 없어서, 저에게는 적절치 못한 질문이긴 하지만 또 다른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있어요. 유행하는 말로 ‘한방에 훅’ 갈 수 있다는 불안감이죠. 쉴 새 없이 일하다보니 저의 문제를 더욱 증폭시켰어요. 한두 편의 시청 반응이 안좋으면 금방 안찾게 되니까요. 요즘 많은 반성을 하고 있어요. 시청률과 상관없이 드라마에 반영된 저의 안이함을 절감하고 있거든요. 그 동안 쌓아온 연륜과 경험이 긍정적으로 또 다른 변화를 거쳐 힘 있게 표현돼야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걸 깨닫고 있죠. 변화를 위한 결단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박빛나: 반성하는 것도 큰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잘못한 걸 알지만 인정하지 않으면 반성할 수 없으니까요. 저는 드라마 작가란 사람을 울리고 웃기는 광대고, 드라마는 광대가 마련한 마당놀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구경하고 이야기하고 공감하면서 소통하고 가까워질 수 있게 하는 장이요. 그 장에서 아주 오래 살아남아 행복하게 글을 쓰고 싶어요.

 

최완규: 저는 TV광이에요. 좀 심각하고 부끄러울 정도로 거의 모든 오락 프로그램을 챙겨보거든요. 일주일 내내 그 프로그램을 기다리면서 행복하고 설레요. 저에게 드라마란 오락 프로그램과 같은 존재죠. 처음 드라마를 시작했을 때는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세상이 바뀌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대중에게 재미와 위안거리가 되는 게 드라마죠. 마치 잔고가 두둑한 통장처럼요. 그 작은 위안과 재미를 주기 위해 좀더 책임감 있게 노력해야하는데 그러지 못해 반성하고 있어요. 어떤 장르를 하든 오래도록 시청자들에게 재밌는 이야기꾼으로 남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