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_박유신/ 사진_박해욱
사실, 미디어아트 작가의 웹 사이트를 뒤지는 것이 매번 흥미 있는 작업은 아니다. 같은 액자 속에 들었다고 해서 그림들이 다 같은 그림이 아니듯이, 미디어아트 작가들도 당연히 자기 나름대로의 예술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미술관에서 한 작품을 보고 끄덕끄덕하고 다음 작품으로 다음 작품으로 출구를 향해 걸어나가는 것과 무심한 ‘클릭클릭’을 반복하며 작가들의 다소 기이한 이미지, 혹은 사색의 흔적이 엿보이는 페이지를 부유하는 행위는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다. 아무리 작가들이 ‘인터랙티브 아트’를 표방한다고 해도 많은 작품들은 관객인 우리들에게 여전히 객체이며 그 중에서도 아주 낯선 타자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미디어아트 작가인 양아치(본명 조성진)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그의 웹 사이트인http://yangachi.org를 방문했을 때에도, 나는 비슷한 클릭을 반복하고 있었다. 아하, 이런 작품을 하는 사람이군… 클릭클릭… 이런 절차와 함께 그의 작품을 섭렵하기 위한 클릭을 반복하고 있을 때, 갑자기 프린터에서 이런 것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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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지 마세요” |
물론 프린트를 예고하는 메시지를 클릭하긴 했지만, 갑작스럽게 일상생활 속에 작가의 메시지가, 즉 예술이 침투해 들어왔을 때의 묘하고 즉물적인 느낌은 마치 영화 <링>에서 귀신이 모니터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의 황당함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보니, 네모난 모니터 안의 예술과 프린트된 예술은 얼마나 다른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미디어들과 우리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우리는 과연 자각하고 있는가?
안국동에서 생긴 일
홈페이지를 통해서 본 양아치의 작업들은 게릴라처럼 미디어와 실제 세계 사이로 파고들고 있었다. 최근의 작업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가장 최근의 프로젝트라 할 수 있는 <핸드폰 방송국 (http://yangachi.org/300)>또한 마찬가지이다. 공공미술 프로젝트인 <미술로 등 긁기> 프로젝트 중 하나인 이 작업에서, 시각 미술적인 작업을 하는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그는 자신이 담당한 안국동에서 눈에 보여지는 것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가 안국동을 위해 마련한 <핸드폰 방송국>에는 일반적인 미술 또는 미디어 아트를 기대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짐작을 할 수 없는 콘텐츠가 자리하고 있다(하긴 누가 미디어 아트가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었던가!). 기자라고 생각되는 남녀의 사진 밑에 있는 재생 버튼을 눌러보면, 우리가 매일매일 사용하지만, 녹음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던 내용들이 통화 연결음부터 시작해서, 일상적인 인사말에서부터 부재중 신호에 이르기까지 아주 자세하게 녹음되어 있다.
‘삑삑삑 삑삐삐삑 … 따르르르르륵… 따르르르르륵… 따르르르르륵.. 따르르…
‘여보세요?’
‘여보세요? 저 아까 통화한 사람인데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네. 저 지금 주위가 시끄러운데,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아요.’
‘지금 풍문여고 몇 학년이세요?
‘2학년이요.’
‘제가요. 전에 풍문여고 담벼락에서요, 어떤 아줌마랑 학생들이랑 검은 봉지를 담벼락으로 주고 받는 것을 보았거든요, 그게 뭔가요?’
‘아, 그게요. 저희 학교에 매점이 없어서요, 학생들이 밖으로 못 나가니까요, 바로 앞에 있는 슈퍼 아줌마들이랑 물건을 주고받고 하는 거예요. 불법으로…’
어떻게 보면 소소하고, 어떻게 보면 상당히 복잡한 사건인 듯한 이 통화내용은 현재 양아치의 <핸드폰 방송국>을 통해 방송되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도대체 <핸드폰 방송국> 안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마침 작가 양아치는 아트센터 나비에서 <핸드폰 방송국>을 주제로 그룹전에 참여하고 있었다. 직접 만나보니 양아치라는 도발적인 닉네임과는 달리 다소 수줍고 겸손한 말투를 지닌 작가였다.
풍문여고 매점 이야기는 <안국동 프로젝트> 진행 중 발견하게 된 것인가요?
아이들이 ‘아줌마 뭐 주세요.’ 라고 말하고 돈을 던지면 아줌마가 검은 비닐 안에 물건을 담아서 던져요. 알고 보니 2년 전에 무슨 연유에서 풍문여고에 매점이 없어졌고, 아이들이 과자를 사먹을 수가 없으니까 다른 방법으로 사 먹고 있었는데 제가 본 것이 바로 그 대안이었던 거예요. 그것을 ‘담치기’ 라고 하더군요. 안국동에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던 거죠. 이것을 문제 삼으려면 삼을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또 그냥 추억거리로 넘길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이면을 들여다 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여러 가지를 알게 되더군요. 아이들이 담치기를 하다가 선생님한테 걸리면 벌점이 매겨지고, 벌점이 매겨지면 대학 가는 데 지장이 생겨요. 그러니까 여기서 재미있는 시나리오가 생기는 거죠. 먹는 것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들을 전화통화를 해서 컨텐츠로 만들면 상당히 여러 이야기가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에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양아치에게는 풍문여고 학생들이 매점을 돌려받는가, 돌려받지 못하는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매점이 없다’는 단순한 문제가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일들이 더 흥미롭다고 했다.
이 작품에선 문제해결 보다는 전화통화 녹음으로 만들어져 나가는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것인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에요. 다들 ‘이야기 부재시대다’ 라고 얘기들을 하는데, 이야기가 사라진 게 아니라 핸드폰 환경으로 이야기가 이동한 것 같아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경험했지요. 미디어 아트 역사라고 말하긴 좀 그렇지만 미디어 작품들을 죽 살펴보면 과거의 회화가 가지고 있던 이야기를 이것들은 끌어내지 못했어요. 번쩍번쩍하고 요란하고 난리가 났는데, 그것이 우리한테 뭘 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죠. 저는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미디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보면 결국 ‘이야기’로 귀결되더라고요. 스토리텔링. 이것을 담아낼 수 있는 방법이 뭔가 생각해보다 전화 통화 속에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똑같은 이야기를 갖고도 오랫동안 전화통화를 하잖아요. 저는 거기에 매력을 느꼈고 이야기가 핸드폰을 통해 전개되는 방식을 택했어요. 그래서 핸드폰을 통해서 콘텐츠를 끌어내고 이야기를 만들었죠. 녹음도 어렵지 않아요. 핸드폰 기능에 다 들어있거든요. 그런 경험들이 재밌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미디어 중에서 특별히 핸드폰을 택한 이유는 그것이 일상적인 미디어이기 때문이군요.
색다른 경험이 아니잖아요. 들어보면 평소에 하던 건데 그것이 콘텐츠로 생산되니까 굉장히 낮설게 느껴지죠. 한번 녹음해 보세요. 자기 일상의 대화가 얼마나 재미있었는가를 알 수 있어요. <핸드폰 방송국>을 들어보면 재미있지 않던가요?
그의 핸드폰 방송국의 내용을 하나하나 들어보면, 카드 해지를 요구하자 돌연 당황하는 전화교환원의 목소리라든가, 전화를 받지 않아 결국 메시지 녹음으로 연결되는 등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의 통화들이 그대로 녹음되어 있다. 이런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그는 자신의 예술 소재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확실히 재미있고 친숙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마르셀 뒤샹의 변기처럼 이들은 예술적 오브제로 작용한다.
미디어, 친숙하고도 낯선 경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보니 예전엔 주로 웹 아트 작업을 하셨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역사적 사진을 다른 구도로 훑어보는 작업들이 재미있었습니다.
그 작업 같은 경우는 어떤 이미지를 볼 때 우리가 소위 역사적 사실에 의해서 정보를 받아들이고 학습되는 경향이 있는데, 들여다보면 그 이면에는 숨겨진 이야기도 있을 것 같아서 시작한 거예요. 이미 고착화된 이미지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충분히 이끌어낼 수 있거든요. <영어 학습자 네트워크>라는 작품 보셨어요? 박정희와 케네디가 마주하는 장면이 반복되는 작품이요. 제가 보기엔 케네디는 선생같고, 박정희는 영어 배우는 학생처럼 보이는 거예요. 이미지만으로 상상을 해서 혹시 그런 관계이진 않을까 가정을 해보는 거죠. 저는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같은 문제도 보존이나 철거 이런 걸 떠나서 그냥 문화적인 흔적으로도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튼 그런 이미지들을 작가들이 한 번 씻어내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봐요.
정치적인 사건이나 무거운 이미지들을 해체하는 유희적인 작업일 수도 있겠네요.
그렇죠. 뭐, 해체는 아니고 짐을 덜어내고 비워냈으면 좋겠어요. 저는 정치적으로는 회색분자인 것 같지만요. 하하.
그런데 저는 작품들을 쭉 보다가 ‘자살하지마세요’ 인쇄물이 나왔을 때 정말 놀랐는데요, 미디어가 갑자기 일상 생활 속에 침투한 것 같은 생경하고 묘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작품을 프린트해서 보게 한다는 것도 신선했고요.
사실 웹 작업을 하다 보니까 제 작품이 너무 아까운 것 같았어요. 제가 성의를 들여서 만든 콘텐츠를 무료로 제공했는데 보는 사람은 무성의하죠. 쓱~ 하고 그냥 보는 거예요. 그래서 기분이 나빠서 ‘내 콘텐츠를 보려면 프린트해서 봐라’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냐 라는 심정이요.
한번은 ‘자살하지 마세요’ ‘스토킹하지 마세요’ 라는 프린트를 실제로 광화문 지하도에 전시를 했었는데요. 그 글들을 외벽에 걸어놓았더니 사람들이 캠페인인줄 알더라고요. 이걸 이렇게까지 해야겠냐, 외국인이 보면 창피하다 등의 반응들이 나왔어요. 작품이라고 던져놓았더니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잘 소화를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참 재미있더라고요. 처음엔 그런 목적이 아니었거든요. 저는 그냥 처음엔 자살과 스토킹이 많다고 해서 좀 자제를 하고 살자, 그 정도만 얘기하고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데, 그런 반응이 나오니 재밌었어요.
프린트 작업은 아마 계속될 거예요. 저는 이미지를 무료로 제공하고 책 표지로 쓴다던가, 액자를 한다던가, 그냥 버린다던가 하는 건 사용자 마음대로겠죠. 그렇게 미술을 공유하는 방법도 있겠지요.
보신 작업들이 좀 어지러웠죠? 제가 8년 정도 작업을 해오다 보니 많을 수밖에 없었어요.
이런 게 어떻게 미술이 될까 생각하실 텐데요, 오히려 상상하는 그대로가 미술의 형태가 되고 미술로서 바라보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아요.
현실과 상상, 간극 메우기
그의 이전 작품들은 무수히 많아서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훌쩍 흘러갔다. 그는 작품이 너무 많아서 어지럽다고 말하며 웃었지만 감상자로서는 치열한 작가의 족적이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인터넷에 개방되어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함을 느꼈다. 무심한 듯, 우연의 산물인 듯 말하지만 상당히 치열한 고민을 하는 작가라는 것을 언뜻 느낄 수가 있었다. 가령 그가 최근 작업중인 <안국동 프로젝트>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작가의 고민이 적혀 있다. 혹시 그는 고민에 대한 답을 찾았을까?
■ 생각해봐야 할 몇 가지.
1. 주민 참여에 대한 생각 : 주민이 원하는 미술 프로젝트와 작가가 원하는 프로젝트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다. 이런 간극이 프로젝트와 관계 가능한가?
2. 지역 공간 참여에 대한 생각 : 지역 공간은 지역의 프로슈머로서 자리하지만 직접적인 주민과의 교류는 생각보다 한정적이다. 이런 간극이 프로젝트와 관계 가능한가? |
요즈음 <안국동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신데, 홈페이지를 보니 작가로서 고민의 흔적이 느껴지던데요. 그 내용을 보면 지역사회에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는 분들에게도 거의 공통된 질문인 것 같습니다. 이런 고민들에 대해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나요?
네. 고민이 있었어요. 일단 주민들이 원하는 미술은 일반적인 거예요. 그림을 그린다던가, 전시를 한다던가 하는. 저희가 원하는 건 다른 형태인데 그걸 할 수 없는 형편이에요. 주민들의 반응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가 없었어요. 벽화, 공공미술 이런 것들을 원하는데 저는 그것들을 하기 싫은 거죠. 그게 과연 내가 할 것인가. 이런 생각도 들고요.
프로젝트 진행에서 그것이 어려운 부분으로 작용하던가요?
그 간극 자체가 어려웠어요. 수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부담이 되더라고요. 앞으로 주민들과 관계를 맺지 않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제가 제안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해요. 그건 제가 헤쳐 나가야 할 영역인 것 같아요. 풍문여고 학생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예술을 한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편견이 생겨요. 미술이란 이런 거다 하는 것에 대해 일일이 다 설명하고 작업을 했어요. 사실은 안국동 주민들이 뭔가 생산해주기를 바랬는데… 예술에 대한 선입견이 강하게 있어서 설명할 시간이 더 필요하죠.
그것은 앞으로의 과제이기도 하겠네요.
네. 그리고 이번 <핸드폰 방송국> 같은 경우는 그 일환이기도 해요. 핸드폰 방송을 하고 녹음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니까요. 근데 그걸 미술이라고 생각하기가 아직은 어려운 거죠.
그런 문제들이 일상생활로 침투하려는 미디어 작가로서 스스로 느끼는 한계와 관련이 있나요?
그렇죠. 주민들과 저는 미술에 대한 입장이 틀리니까요. 그런 지점에서 앞으로 공유를 한다면 더 결속이 단단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니까 공유점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면서 제 프로젝트는 계속 업그레이드가 되어야겠죠. 저한테 이 작업들은 아직 의미를 추적해가는 과정이에요. 생각하는 과정이고요. 매체 자체로서는 웹에서 핸드폰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아요.
이젠, 당신도 예술가!
마지막으로 예술가로서, 문화예술교육 현장에 계시는 여러분들에게 하시고 싶은 제안이 있으신가요?
사실은 너무 많은데요, 짧게 이야기하는 것이 더 어렵네요. 우선 생각나는 건, 꾸준한 관심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항상 트렌드에 민감해서 다양한 관심은 있는데, 그게 얼마 못 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문화적으로 풍요롭고 다양한 것도 좋지만, 더 깊이 있고 뿌리가 튼튼한 그런 게 있었으면 해요.
‘누구나 예술가다’ 이런 얘기를 참 많이 하죠. 그런데 본인들이 예술가라면 일상생활에서 뭔가 재미있는 것을 만들어서 보여주면 좋겠어요. 아무것도 안 보여주면 예술가가 아니죠. 예술이 복잡한 거라고 많이들 생각하시는데 그런 건 아니에요. 어떤 것 하나라도 자기만의 방식을 가지고 재미나게 놀 수가 있을 텐데 우린 아직 놀이 기술이 좀 부족한 것 같아요. 노래방 가고 가족끼리 모여서 가까운 데 놀러 가고 하는 일방적인 접근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만들어가는 놀이방식에 대해 제안하고 싶어요. 핸드폰 방송국처럼요. 아주 쉽잖아요. 본인들이 예술가라는 걸 잊지 말고 꼭 보여주세요. (하하)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예술이라고 명명했을 때 이미 예술에 대한 정의는 무한히 확장되었다고는 하지만, 양아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는 작가로서, 일반인들의 삶 속에 파고들려는 작가로서 여전히 고민 중이다. 마르셀 뒤샹 이후 100년이 흐르도록 예술인들과 일반인들의 예술에 대한 개념이 전혀 가까워 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사이에는 대체 얼마나 넓은 강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을 극복하고 공유점을 만드는 것은 단지 작가 양아치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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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그의 어떤 작품은 지극히 미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진 듯 했지만 사실은 전화통화 속에 살아있었던 무수히 많은 이야기에 서명을 하여 예술 작품으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그의 <핸드폰 방송국>은 미디어 사회에서 예술이 갈 길 하나를 제시한 듯 보인다. 미디어 작가 양아치의 핸드폰 방송국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자기의 이야기를 콘텐츠로 만들고 싶은 사람들은 누구든 그의 방송국을 방문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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