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한 것들의 공존과 대화 – 서울여성영화제에서 본 소녀들의 영화


도대체, 이건 무슨 이야기일까?  남학생들이 순진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정말 이런 걸 붙이고 걸어 다닌단 말이야?”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몸을 뒤틀며 옆으로 누워버린 한 남자 아이는 말한다. “ 여자들이 예민해지는 이유를 알겠어.”   두 명의 소녀는 양손에 커다란 생리대를 한 개씩 쥐고 겅중겅중 춤을 추며 노래를 한다. <생리해 주세요(2004, 손현주)>라는, 유난히 관객들의 박장대소가 잦았던 서울여성영화제 상영작 한 편의 대목이다.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지난 4월 6일부터 14일까지 서울 신촌의 한 극장에서 제8회 서울여성영화제(Women’s Film Festival in Seoul;WFFIS)가 열렸다. 이미 97년 전부터 개최되기 시작하였으니, 한번도 가본 적 없다 하더라도 들어본 적은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요즘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여가 생활 중 하나가 영화보기라고 하는데, 여성영화 보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세상의 절반은 여성이라지만, 엄연히 여성은 사회적 소수자로 분류된다. ‘여성’을 언급하는 것이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일반적인 관심처럼 생각된다지만, 엄연히 문화적 다양성 보호의 주요한 대상이다.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을 위한 유네스코 협약” 10항에는 ‘여성의 잠재력을 강조함’을 명시했다. 이것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단일한 주체가 아니라 여러 다른 소수자들을 포함하면서도 분화시킬 수 있는 복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화적 다양성을 이야기할 때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더욱 중요하게 취급될 수 있다.

 

그 동안 여성영화제는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See the World through Women’s Eyes!)”라는 캣치 프레이즈 하에, 여성영화의 최근 흐름과 역사를 소개하면서 여성주의 시각을 확산하는 것에 주력해 왔다. 메인 프로그램인 “새로운 물결” 섹션에서는 전 세계에서 선보인 최근 여성영화들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세계 각지의 여성들, 특히 이란이나 터키 같이 우리가 사는 아시아에서도 멀리 떨어진 아시아이거나, 동유럽 시골 마을처럼 ‘유럽’과는 다른 유럽의 여성들의 삶을 볼 수 있다. 또한 여성으로 뭉뚱그려 불리기엔 또 다른 문제들이 생기고, 그냥 동성애자, 장애인, 이민자로 불리기에도 다른 문제들이 생기는, 동성애자 여성, 장애인 여성, 이민 여성 등, 좀 더 분화된 정체성에 따라 몇 겹으로 중첩된 주변부적 상황이 어떤 삶의 모습을 만들어내는지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예를 들어 미국 중산층 가정의 백인 여성이 서울여성영화제에서 관객과 못 만나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남편 혹은 남자친구와의 역사적이고 관성적인 관계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면, 그녀가 엄마의 발칙하거나 흉측한 노년을 다른 시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면, 그녀가 딸의 느닷없는 커밍 아웃과 독립과 떠나감을 삶의 새로운 국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면, 그녀가 동아시아에서 입양되어 온 옆집 소녀의 매력과 좌절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면, 서울의 관객들은 그녀들을 환영한다.

 여성영상공동체와 소녀들의 영화

여성영화제의 주요한 프로그램 중에는 여성영상공동체가 있다. 여성영상공동체는 여성이 가장 활발하게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가 주가 되는 섹션인데, 여성의 시각으로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하는 액티비즘의 성격을 띤 작품들이 주로 소개된다. 그런 작품들이 독립적인 섹션으로 마련되는 이 프로그램의 성격은 여성영화제가 다른 영화제들과 확연히 다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성주의 시각이라는 것이 세상을 파악하고 판단하는데 멈추지 않고 변화로 나아가야 함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영상공동체와는 반대의 방법으로 여성영화제의 성격을 뚜렷하게 한 것은 ‘영 페미니스트 포럼’인데, 작년 7회 때 특별 프로그램처럼 배치되었다가 올해는 없어졌다. 영화제 참여 연령을 낮추고 영화들의 재기발랄함을 높이는데 공로가 컸던 소녀들은 작년에는 특별히 초대된 손님이었다가 올해부터 정식으로 여성영상공동체에서 영화를 상영하면서 기본 프로그램으로 진입했다. 위에서 말한 <생리해 주세요>를 비롯해서 <신호(2005, 김효비)>, <외계소녀, 불시착하다(2005, 오민지)>는 10대 소녀들이 연출한 작품들이다.

소녀들은 학교 안 혹은 바깥에서 열심히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생리해 주세요>는 학교 밖 영상동아리에서 만든 것이고 <신호>는 특성화고등학교인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만든 것이다. <외계소녀, 불시착하다>는 인문계고등학교에 다니는 감독이 청소년 미디어센터의 사전제작지원을 받아 만들었다. 십대 소녀들이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이 다양해진 것만 아니라 그녀들이 만들어내는 영화의 내용도 다양하다.

엄마와 딸이 서로에게 보내는 신호 – <신호>

십대들은 영화 제작을 통해 신호를 보낸다. 청소년들에게 문화예술교육이 매우 중요해지는 이유는 여기 있다. 십대는 학술적인 권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인 담론을 만들고 주도할 만한 위치에 있지도 못하다. 그래서 그들의 처지와 사고와 정서를 종합해서 표현할 수 있는 매체를 가지려고 한다. 영상 문화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수용되고 영상 제작과 관련된 학내외 활동이 매우 인기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몇 년 전 ‘학생’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그 사회의 십대들을 옥죄고 있었는가에 대한 신호를 보냈다면 지금은, 특히 소녀들은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을까? 그 중의 한 사례가 <신호>다.

<신호> (2005, 김효비 연출) 

신호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소녀다. 대학입시를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공부해도 모자랄 판에 교과서 대신 라디오를 끼고 산다. 엄마는 이런 신호를 보살펴주고 독려하기는커녕 자기 생활에 들떠서 돌아다니느라 신호보다 더 바쁘다. 엄마는 대학 신입생이 되었던 것이다. 신호는 이런 불만을 라디오에 써서 부친다. 그러다 어느 날 신호는 엄마의 젊은 시절의 일기를 발견한다. 새 생명을 낳은 후 엄마가 된 기쁨을 적은 일기를 읽고 신호는 엄마와 자기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본다. 그래서 엄마의 대학 진학을 함께 기뻐하고 엄마의 바쁜 생활을 이해하게 된다.

스토리만 보자면, 지극히 단순하고 비약적이라서 어설퍼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제목을 “신호”라고 짓는 십대 소녀 감독의 정서이다. 그리고 주인공 소녀를 라디오를 즐겨 듣는 아이로 설정한 치밀함이다. 라디오는 주파수가 맞으면 잘 들리고 그렇지 않으면 소음일 뿐이다. 엄마의 바쁜 대학 생활이 처음에는 소음처럼 신호에게 불쾌한 것이었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 라디오의 낭랑한 디제이 음성처럼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순간은 출산이라는, 여성으로서의 독특한 경험과 모녀라는 특별한 유대 관계에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소녀들은 이처럼 분노한 학생으로서 신호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십대이며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충실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외계인과 대화하는 방법 – <외계소녀, 불시착하다>

때로는 신호가 해독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마치 외계에서 우주인이 보내는 암호처럼 말이다. 이럴 때는 그 신호가 아예 없었던 것으로 무시하면 될까?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외계 소녀, 불시착하다>이다. 이 작품의 감독은 중학교에 다니는 여동생을 모델로 시나리오를 쓰고 여동생에게 주인공 역할을 직접 맡겼다. 그럼으로써 매우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는 주인공이 나오게 되었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전송하면 외계인의 얼굴이 찍혀 나오고, 그들이 하는 말은 도통 무슨 소린지, 그들이 하는 행동은 도통 무슨 생각으로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외계 소녀.


<외계소녀, 불시착하다> (2005, 오민지 연출) 

감독 언니의 눈으로 보면 동생 주인공의 생활은 비상식의 연속이다. 둘 사이에는 어떤 신호도 주고받는 것이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두세 살 차이로도 이렇게 서로 소통 불가능한 다른 세계가 있다는데, 십대 학생과 삼십대의 교사 사이에는 오죽할까? 서로 이해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고 말아버릴 일은 아니다. 언니처럼 동생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드는 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시도는 라디오에서 소음이 들린다고 아예 꺼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채널을 맞춰 봄으로써 어떤 소리인지를 들어보려 노력하는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이 교육 현장에서 다양성에 기여할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유가 여기 있다.

다양성은 그저 ‘다른 것들이 많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수퍼마켓에도 상품이 있기는 매우 ‘많이’ 있다.) 그것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고, 서로의 존재를 무시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서로의 특성의 우열을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그리고 비록 외계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계속 노력하는 것이 서로의 삶을 공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믿으며, 다양성은 결국 서로 다른 것이 공존하며 대화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양성, 잡다한 것이 공존하기

간단히 말하면 문화적 다양성은 자기 재현의 기회와 대화의 기회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협소하지만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사례를 예시하자면, 십대 소녀들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여건과 지원 방안을 충분히 마련해 주는 것, 그리고 그들이 만든 영화를 많은 사람들과 (단지 교육과 관련된 사람들이거나 십대들로 한정할 필요 없이) 같이 보며 이야기를 나눌 장(場)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소녀들이 만든 영화를 소녀들만 소비할 필요는 없다. 케냐 영화는 케냐를 넘어서 더 많이 보일 필요가 있다. 소녀들이 만든 영화도 보고 케냐 영화도 볼 수 있는 여성영화제는 여성들만 가는 곳이 아니다.

십대들에게는 여성영화제의 영화들이 다루는 내용이 때론 급진적이고 전복적이어서 당혹스럽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단지 소녀들이 영화를 만들어 보여주고 여성주의 문화를 듬뿍 맛보며 자기와 다른 처지의 많은 자매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협소한 장점 이외에도, 소년들은 알다가도 모를 것 같은 소녀들의 세계와 소녀들이 자라난 미래의 모습을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봉변처럼 생리대를 차본 후 여자들이 왜 예민해지는지 알게 된 그 소년은 여성영화제가 아무리 문화적 충격을 준다 해도 그 충격을 흡수해낼 능력이 생겼을 것이다. 문화적 다양성은 교실 안에서 다 이해될 수 없는 개념이다. 여성영화제처럼 주변적인 다양한 것들이 공존하고 대화하며 연대함으로써 확장해 나가는 현장은 자주 오지 않는다.

여성영화제의 여성‘들’, <날으는 의사 사이카티>와 아프리카‘들’

서울여성영화제에서는 매회 지역 특별전과 감독특별전, 그리고 한국영화 특별전을 마련한다. 올해는 아프리카특별전이 준비되었다. ‘나의 아프리카들’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데, 아프리카에 대해 에이즈라든가 가난, 혹은 세렝케티 초원 등의 단촐한 이미지를 갖고 있던 사람들에게 아프리카는 복수임을 보여주었다.

아프리카의 영화산업도 나라별로 편차가 크다고 한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아프리카인들은 자국영화에서보다 할리우드 영화에 재현된 흑인의 모습을 더 많이 접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날으는 의사, 사이카티>가 특별전에 초청되어 서울을 방문한 안느 문가이 감독은 케냐 마사이족 출신인데, “많은 사람들이 외국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만 보고 마사이족은 늘 뛰어 다니기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내 영화를 보더니 마사이족도 말을 하는군요, 라고 놀라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또한 감독은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흑인 여자들에는 공감이 가는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면서, 사이카티라는 인물은 자신과 자신 주변의 많은 케냐 여성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넣은 것이라고 했다.

마사이 소녀 사이카티는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아버지를 대신하는 삼촌은 정혼자와 결혼할 것을 재촉하지만 사이카티는 다른 꿈이 있었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을 각오를 하면서 사이카티가 다시 도시로 떠나는 것이 영화의 시작이다. 사이카티는 바람둥이 남자친구와의 짧은 연애로부터 인간으로 존중받는 대상으로서의 남녀관계를 깨닫고, 부주의한 남성들이 만들어낸 위기의 상황에서 의젓하게 비행기를 조종해냄으로써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자기 능력을 발휘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남자와 고향에서 전통 혼례를 치루는 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이다.

동북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의 여성들이 이 영화를 볼 때, 아프리카라는, 그것도 외부에 전형적인 이미지로 많이 알려진 케냐 지역의 마사이족이 사는 모습을 보는 이질성과 여성이라는, 그것도 아버지의 보호 하에 있어야 할 것으로 취급되는 소녀들의 삶을 보는 동질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아마 이 영화를 보면서 한국의 소녀들이 느꼈을 안타까움과 통쾌함 혹은 신기함과 놀라움은 한국의 불안한 소녀들을 보여주는 <고양이를 부탁해(2001, 정재은)>와 같은 영화를 케냐 소녀들이 볼 때와 유사할 것이다. 케냐의 소녀들도 <생리해 주세요>를 보면서 백주대낮에 남자들에게 생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장면에 놀라워하다가도 생리대를 차고 뒤뚱거리는 남자들의 모습에 깔깔대며 웃을 것이다. (케냐의 소녀들은 어떤 생리대를 사용할까?) 그리고 다른 엄마들처럼 희생하지 않는 엄마에게 화를 내는 신호의 고민에 공감하면서 40대 이후의 여성이 다시 자기 개발을 위해 대학에 진학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할 수도 있다. 학교 가기 싫다고 툴툴거리는 소녀의 모습이 케냐 소녀들에게는 충격일지도 모르지만 오밤중에 혼자 화장실에서 우주선을 목격하는 황당한 소녀의 환상은 더 잘 이해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할리우드 영화들이 재현하는 흑인 여성의 이미지로 케냐 여성들의 삶을 비추어보려고 할 때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케냐에서도 할리우드 영화들이 재현하는 동아시아 여성의 이미지로 한국 여성들의 삶을 비추어보려고 할 때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불가능한지  알면서도 자기 재현한 영화들을 볼 기회가 없다면 케냐 여성과 한국 여성들이 영화를 통해 대화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 재현은 특히 서사와 이미지가 결합되어 있는 영화를 통해서 문화적 다양성을 구현하는 일에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