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전효관| 정리 :신정수
전효관: 아르떼의 인터뷰는 그냥 인터뷰가 아니라 ‘지혜를 나누는’ 인터뷰입니다. 우선 선생님이 시각 디자이너가 되기까지의 성장과정에 대해 들려주시면서 말문을 열어볼까요?
안상수: 시각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용의주도하게 준비를 했던 것은 아니고, 시각 디자이너가 되고 난 후에 보니까 마치 어떤 프로그래머가 내 인생을 프로그래밍한 것처럼 이어진 사건들이 제가 시각 디자이너가 되도록 한 것 같아요. 너무 건방진 이야기인가요?
지혜를 나누는 인터뷰라니, 저도 어느덧 어른이 되었네요.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랍비(rabbi)의 지혜가 번뜩이더군요. 우리 문화권에서 지혜라고 하면 공자, 맹자의 지혜처럼 도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많은데, 이들의 지혜는 유머가 있는 가운데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것 같아요.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웃음)
전효관: 선생님의 개인 블로그(www.ssahn.com)를 가보면 ‘ahn sang-soo 4337, 2548, 2004, 1383, 558‘라고 되어있는데, 저 숫자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 부호인가요?
안상수: 몇가지 알려진 숫자들은 잘 맞추는 분들도 있는데요, 4337은 단기(檀紀)인데 저는 단기를 즐겨써요. 여기서 묘한 자부심같은 것을 느끼고, 이것을 자주 써야한다고 생각해요. 그 다음의 2548은 불기(佛紀), 그 다음 2004는 서기(西紀)입니다. 그 다음의 1383은 회교도의 춘분을 설날로 잡는 마호메트력(Islam曆) 이에요. 558은 세종의 한글 창제력이라고 제가 이름 붙였는데, 저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이 날이 한국 사람들이 우리의 정체성(identity)라는 것을 의식하게 된 기점이라고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강제로 현대성이라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리의 현대 역사가 여기서부터 쓰여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이것은 엄청난 충격이었고,문화적인 대변혁이었을 겁니다. 우리가 말한 그것을 그대로 적을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문학이 바로 기록이 되니까요. 그 전에는 이두(吏頭) 등이 있었지만, 그것은 암호같은 것이었지 바로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전에 어느 글에 문외한이면서 글을 썼는데 그것이 논쟁의 씨앗이 되었지요.
이 숫자들은 그런 의미가 있는데, 앞으로 여러 가지 저에게 유의미한 숫자들을 더 넣으려고 해요. 엄청난 숫자들 예를 들어 지구 탄생일. 옛날 송나라 때의 책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중국 북송(北宋)의 학자 소옹(邵雍)의 저서, 역리(易理)를 응용하여 천지만물의 생성변화를 설명한 것)에서 계산을 해놓은 것이 있더라고요. 저는 그런 수치들이 난시처럼 있는 것이 재미있어요. 사실 자기 삶에 관계된 숫자들이 굉장히 많지요? 저 숫자들 중에 이슬람력인 1383은 춘분을 기점으로 한다는 것이 재미있어요. 그들에게는 춘분이 설날이고, 서력으로 사는 사람들과는 휴일도 다르다고 알고 있어요. 우리는 2004 중심으로 살고 있고 시간계산을 그에 맞춰 하는데, 실제로 사람들이 여러 각도를 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것을 상징적으로 적어놓은 것입니다.
전효관: 디자이너라고 하면 서구적인 이미지가 많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과 글을 보면 ‘우리’, ‘한글’ 이런 것들을 자주 반복하시는데, 디자이너로 존재하면서 다른 세계를 개척해온 이야기를 해주시겠어요?
안상수: 글씨체에 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어서, 이 인터뷰에서 반복하기보다는 어제 제가 받은 잡지 한권을 오늘 끌러봤는데, 그 잡지 이야기를 하면서 소개하면 좋겠네요. 전에 인터뷰를 하러 왔기에 참 열심히 인터뷰를 했는데, 요만큼 나왔네요.
여기 나온 사진은 제가 묵(墨)을 좋아한다기에, 제 노트-현대문학 잡지가 제 노트에요-에 써 본 것을 찍어간 것이에요. 저는 이런데 쓰는 것이 좋아요. 나중에는 이 노트(잡지)들을 모아두면 좋겠어요. 이런 글씨 위에 글을 쓰다가 그 사이사이에 있는 단어를 발견하면 강렬하게 들어오더라고요. 우리는 이야기 위주로 책을 읽잖아요? 하지만 저는 운문은 잘 읽는데, 소설과 같은 이야기 중심으로 책을 잘 못 보겠더라고요.
저는 일어는 잘 모르지만, 대략 뜻만은 이해할 수 있어요.“대학에서 학교 신문 편집부 소속이었던 안상수는 그 때부터 한글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 이래 계속 한글에 집착하고”-집착이라는 말이 쉬운 말은 아닌데, 인터뷰 할 때도 이 말에 관해서 논쟁이 있었어요. 제가 외부에 환자처럼 집착하는 것으로 보여요. 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으려고 굉장히 많이 노력했고, 실제로 너무 그렇지는 않거든요. 단지 많이 좋아하는 것이지 그 것 밖에 모르는 사람은 아니거든요.“한글은 그 물(物)으로서 파악한다. 그래서 문화 전반-패션, 문학, 아트 등 수비범위가 아주 넓다.”제가 한글로 그렇게 논다는 이야기이이죠.“집의 대문은 안씨 자신이 만들었기도 하고, 거기서 자신의 한글 스케치를 만들기도 하고, 화장실에 앉아서 정면에 보이는 자기 작품도 한글에 관한 것이다. 한글은 그에게 연구과제이며 동시에 영감을 주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대학생 선배의 영향을 받아서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기로 했고 한글과 돈(金), 생활을 위한 직업으로 디자이너가 되었다. 현재 그로부터 나오는 것은 휴머니즘, 평화, 생명(命), 정체성, 디자인, 인생 그 자체라고 단언한다. 그는 세종대왕(世宗)과 시인 이상(李箱)을 존경 한다.”
전효관: 이상(李箱)은 왜 좋아하세요?
안상수: 고등학교 때 이상 좋아한다고 하면 달라 보이니까요. ‘척’하느라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점점 이해하게 되면서 많이 알게 되니까 ‘나와 맞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이상이 괜히 멋있잖아요. 요절도 하고, 난해하고, 얼굴도 굉장히 고뇌하는 표정이고, 댄디(dandy)하게 살고. 그렇게 이해하다가 나중에는 속살을 보게 되고, 그 사람의 감성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죠. 나중에는 제가 ‘이상은 나의 선배이자, 후배이자, 친구이다’라고 건방진 농담도 했는데, 제 그 사람보다 인생을 두 배나 길게 살고 있잖아요. 어쨌든 20대에 요절했으니까, 그 사람은 나의 인생의 후반을 극복할 수 없거든요. 그것은 저에게는 아주 기분 좋은 일이고, 아마 동시대에 살았으면 친구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서울에 살면서도 웬만하면 다들 알게 되잖아요? 더군다나 그 정도 시대에는 어울려 다녔을 거에요. 지금보다 60년도 전에 자기 나름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 ‘선배’이지요.
제가 이상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시대에 다른 사람들은 일본에 유학도 다녀오고, 굉장히 이데올로기 적이고, 또 어떻게 보면 당시에 그것이 유행이었더라고요. 그것이 일종의 사회적인 유행같은 사회적인 흐름이었어요. 당시 일본의 젊은 지식인들도 좌파적인 흐름 속에서 인텔리들이 있었고, 유학을 간 학생들이 그 영향을 받고 돌아와 전파도 하면서 ‘현대성’을 맛보게 되었는데, 이상은 순전히 자생적인 사람이었어요. 이상은 미술평론도 하거든요. 사실 그림 그리고 싶었는데, 큰 아버지가 먹고 살지 못할 것이라고 해서 건축과로 갔대요. 건축하면서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사로 들어가서 현장 감리-높은 직위는 아니고, 당시 일본인 밑에서 현장감독 정도 하는 직위-하면서 먹고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지요. 그러한 상황에서 자기의 예술혼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현대적이에요. 먹고 사는 행위와 나의 정체성을 구분해서 살지요. 그런데 이상이 즐겨보던 잡지 중에 <세르빵>과 <詩와 詩論>이라는 것이 이상의 수필에 나와요. 제가 일본 국회도서관에 가서 그 잡지가 뭔가 뒤져봤어요. 그런데 권두언이 ‘레닌의 기치아래서’ 이런 말이 나오는 완전 좌파잡지였어요. 이상도 그런 잡지를 읽었지만 자기 자신은 빠져들지 않았어요. 지적인 호기심은 있는데, 그것 때문에 자기의 어떤 것을 던져버리진 않았어요. 그 시대에 지식인들은 대부분 좋아하며 정지용 등은 월북했잖아요. 그 당시의 구도에서 보면 그 때 문화예술인들의 시소가 있다면 이 쪽에 수북하게 모여 있는데, 이상만 반대 쪽에 있었던 셈이에요. 저는 그것도 굉장한 용기라고 보여요. 그것이 처세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술적인 신념 자체였다는 것이죠. 저는 만일 이상이 해방 이후까지 살았다면 우리나라 문화계의 지도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상은 우리가 현대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보니 이상이 너무 좋아요. 이상의 글의 문장 하나하나 뿐만 아니라, 이상이 디자이너여서 오감도, 삼차각 설계도 등을 보면 그냥 그것이 시각시를 쓴 거에요. 시각시라는 것이 사실은 굉장히 앞선 생각이거든요. 자기 생각을 그냥 글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조형적인 시각적인 상상력을 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반가운 것이지요. 그래서 동종의식, 같은 패거리구나! 그래서 많이 좋아하게 되었지요.
전효관: 정체성(identity)를 생각할 때, 대부분 자기 정체성을 시대의 사상이나 흐름에 통합적으로 구축하는 것이 일반적이죠. 그런데 선생님은 본인을 통합된 정체성에 결부하기 보다는 독립적인, 인디적인 정체성을 일부 가지고 계신 느낌이 있습니다. 통합시키기보다는 해체하고 분열하는 느낌 같은 것이죠.
안상수: 하하. 그것은 새로운 해석인데요,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고 저는 유행어를 조금 싫어하는 편이에요. 해체, 구조, 브랜드 등의 유행어는 그 흡입력이 대단히 큰 것 같아요. 그 그물에 씌우면 살아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한글을 생각해봐도, 한글이라는 언어의 그물이 너무 커서 부담스럽습니다. 그 인력권(引力圈)에서 떨어져서 봐야 한글이 보이지요. 우주비행사가 지구 인력권을 떠나서 봐야 초록별이라는 외로운 행성을 봤듯이, 언어의 일력권이라는 것이 저는 늘 빠져나가보려고 하지만, 글을 쓸 때마다 괴롭지요.
그런데 한글은 보면, 저는 한글을 통해서 자꾸 세종대왕이 보이거든요. 그림을 보면 그림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린 사람이 어른거리고, 김영하 소설을 보면 김영하가 궁금해지는 거에요. 그렇듯 한글을 보면 자꾸 세종대왕이 떠올라요. 제가 궁금했던 것은 저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을까, 정체가 뭘까, 그래서 저는 무례하게 튜닝이라는 말을 썼는데, 저의 수신감도를 높여서 미세한 전파를 수신한다면 그에 감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그랬더니 그 분이 대단히 놀라운 생각을 한 것이잖아요. 그런 창조성(creativity)를 냈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인 것 같아요. 맨 처음에는 ‘만들어야겠다’는 직관적인 생각으로 시작했겠지만, 그것을 가만히 뜯어보면 굉장히 논리적이에요. 그 논리는 사람의 생각을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한글도 굉장히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세종 임금은 아마도 이런 글자를 지향했을 것이다라는 저의 추측이에요. 저는 사실이 그렇다고 믿어요. 한글의 글자가 초성, 중성, 종성이 있잖아요. 각각은 위치값이 있는 것이거든요. 그 당시 네모틀의 글자라는 것은 중국한자의, 그 당시의 국제 기준(global standard)이에요. 그런데 그 분은 초성, 중성, 종성은 각각 독립적인 기능을 하는 글자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일본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할 수 없어요. 음절이 하나로 묶여서 が(히라가나, [가]와같은 소리를 낸다)하면 자모음 분화가 안되어서 ‘ㄱ’-‘ㅏ’가 독립적인 음절이라는 생각을 못해요. 한글은 위치 불변이 아니라 복잡한 음절을 가지면 이리저리 불뚝불뚝하고(예: 닭), 간단한 것은 작고 간단하고(예: 기). 이런 탈네모틀 글씨는 타자기 만든 사람이 먼저 봉착한 문제에요. 타자기에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으니까요. 공병우(公炳禹, 1950년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제작, 상품화) 선생님, 이원익(李元翼, 재미교포로 1914년 영문타자기에 한글 활자를 붙여서 한글 타자기를 고안했다)라는 유명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런 형태를 만든 것이지요.
전효관: 그런 생각이 훈민정음 자체에도 단서가 있나요?
안상수: 있죠.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는데 그런 정신이 쭉 흘러가고 있어요.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제가 살면서 발견한 세계 최고의 디자인서에요. 작년부터 제가 박사과정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훈민정음 강독을 시작했어요. 사실은 한문을 하시는 분들이 해야 하는데, 한문하시는 분들이 하면 해석을 너무 교조적으로 하실 것 같고, 한글 학자는 어문학적으로 할 것 같아 고민하다가 저는 디자인적인 해석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훈민정음은 세계 최고의 디자인 이론서에요. 전 558년 전에 그런 책이 나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막연히 상상망을 그려낸 것도 아니고, 다 있는 것을 구슬 꿰듯이 잘 끼워서 만든 것이에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죠.
외국에서 한글에 관해서 발표를 하면 사람들의 분위기가 장엄해져요. 그들도 막 빨려들어 가는 것이죠. 제가 지난 3월에 대영박물관에서 강의를 했는데, 영국에서 오랫동안 산 교포들이 강의에 찾아와서 한국의 창조성에 자부심을 가질만한 것 인줄 몰랐다고 감동하고 가더군요. 저는 한글은 기가 막힌 디자인의 성과물이라고 계속 이야기합니다. 저는 문자를 발명했다, 창제했다가 아니라 디자인적인 성과였다고 아전인수(我田引水)하는 것이지요. 한글은 그 자체의 디자인으로 국제성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 할아버지가 그렇게 기가 막힌 디자인을 했죠. 그것을 600년이나 가져왔고, 민족적인 정체성에 도구를 주었잖아요. 창의 한국의 핵심은 그것일수 밖에 없어요. 창의 한국의 증거물은 해방 이후에도 한글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어요.
신정수: 훈민정음이 발음하는 목구멍의 모양을 딴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반면 사람들이 책을 소리 내어 읽지 않잖아요. 활자를 눈으로만 읽으며 이미지를 상상하잖아요. 오랫동안 책은 소리 내어 읽는 것이고, 소설의 매체로 판소리와 책의 구분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활자가 음성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였어요.
안상수: 그것은 인쇄술의 죄에요. 옛날에는 문자를 향유할 수 있고 부릴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어요. 예전에는 문자가 계층을 나누는 도구였어요. 머슴이 글자를 알면 곤장을 쳤잖아요. 이집트만 해도 계급에 따라 신성문자(神聖文字, 히에로글리프)는 왕족과 사제들만 쓰는 문자였고, 속용글자, 민중 문자(民衆文字, 데모틱)가 따로 있었어요. 그것은 발음기호에 가까워요. 신성문자는 상형문자이고, 또 신관문자가 따로 있었어요. 우리도, 구텐베르크도 활자를 만들었지만 동서양의 개념은 약간 다른 것 같습니다. 인쇄술을 만들고 나서 성서를 많이 찍어서 배포하니까 종교혁명까지 이어지고, 정보가 퍼지게 되었지요. 그 전에는 사람들이 뉴스도 외쳤거든요. 서양에서 신문이라는 것은 여기서 ‘와-!’하고 저쪽 골목으로 가서 ‘와-!’하는 그것을 헤럴드(herald)라고 한대요. 그랬던 것이 인쇄가 되어 퍼지기 시작하면서 소리를 잃어버린 것이죠. 책이라는 것도 음성적인 것을 잃어버리면서 묵독의 관습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죠. ‘창의’라는 것은 그 이전부터 계속해서 이어진 ‘이야기(storytelling)’의 무엇인 것 같아요. 인쇄는 말하자면 소리의 그림자인데, 각각이 소리를 머금고 있지요. 이 글도 사실은 눈으로 보지만 소리가 와글와글한 것에요. 저는 책을 보면 소리가 와글와글해요. 지금은 소리가 보이지 않지만 없는 것은 아니에요. 거꾸로 한글이 소리를 만들어 낼 수가 있거든요. 하나하나의 음절을 만들어 나가는 합성적인 면도 있고요. 소리에 대해서는 한글은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전효관: 안상수 선생님은 중국에 자주 오가신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히 중국에 가게 되는 계기가 있으세요?
안상수: 중국에서 정말 많은 체험을 했고, 가면 여기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단적인 예로 전에 중국의 미술대학에서 1년 동안 방도 주고, 강사료도 주고, 조교도 붙여주어 지냈는데, 제 조교로 있던 사람이 젋은 교수 부부였어요. 1년 만에 다시 중국에 갔더니, 그 부부가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얼굴이 빨개지더니 부탁이 하나 있대요. 부인이 첫째 아기는 유산을 하고 둘째 아기를 뱄는데,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심 무척 기뻤어요. 만일 거꾸로, 제가 젊을 때 함께 지낸 어느 외국의 교수가 있어서 1년 간 따라다니면서 밥도 같이 먹고 했다고, 내 애기 이름을 부탁할 수 있을까? 저는 못할 것 같아요. 그 때 너무 기뻐서 아기 이름을 오랫동안 궁리 끝에 지었어요. 중국에도 돌림자가 있어서 하나만 지으면 되는데, 사내아이든, 여식이든 양쪽에 괜찮을 이름을 지었어요. 멋있게 해서 보낼 거에요. 무엇이라고 지었는지는 천기누설 같아서 알려드리면 안돼요.
제가 처음 중국에 갔던 것은 천안문 사건(89년) 이전, 한중 수교(92년) 이전이었어요. 그 이후 97년부터 자주 가게 되었는데, 도시 등에 대한 기억보다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지난 번 1년간 중국의 미술대학에 있을 때, 가자마자 26명의 학생들을 인솔해서 한 달 동안 여행을 했어요. 중국에서는 여행이 정규 교육과정이에요. 전국의 학생들이 여행을 다 갑니다. 북경에서 돈황까지 3박 4일동안 기차로 가서 그곳에서 미니 버스를 빌려 다시 한달 동안 거꾸로 북경으로 왔습니다. 그 동안 목욕을 한번도 못했네요. 중국 학생들은 참 총명해요. 어쩌면 한국 학생들보다 생각의 바탕이 국제적인 것 같아요. 이 아이들은 외국인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저에게도 바로 와서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전효관: 선생님은 대학에서 디자인으로 학생들을 만나고 계신데, ‘문화예술교육’에 무엇이 강조되면 좋을지 말씀해주시겠어요?
안상수: 그것은 참 모르겠어요. 어떻게 이야기해도 다 맞는 것 같고요. 저는 사실 교육은 좀 엄격한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편하고 자유스럽게 하는 것도 맞고, 엄격한 것도 양쪽이 다 맞는 것 같아요. 저는 테두리 안에서는 엄격하지만 밖에서는 풀어준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식입니다. 제가 외국에서 본 어느 수업에서는 진행은 실제로 매우 엄격한데, 발표하거나 토론하면서 나오는 생각들은 다 포용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이런 점이에요. 교육이 무엇 하나로 된 사람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잖아요. 모두에게 판박이 씌우는 것도 아니고요. 소질은 너무나 규정적인 말이고, 확실하게 가지고 있는 본성을 찾아주면 된다고 봐요.
예전에 바우하우스(Bauhaus)라는 한 세기를 풍미한 학교가 있었죠. 그곳에 두 사람의 선생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라는 매우 엄격주의자인 교장이었어요. 엄격이라는 것은 관리는 매우 엄격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통독이 된 후 바우하우스가 있던 곳에 가봤는데 지하실에 술집이 있어요. 저는 대학교 안에 술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곳에서 공연도 이루어지고, 토론도 이루어지는 것이죠. 다른 한 사람이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이었는데, 이 사람이 괴팍한 사람이라 수업하기 전에 요가를 시켜요. 세기적인 인물이지요. 그로피우스와 이텐 사이에 의견 충돌이 심하게 일어나요. 학교 운영에 관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 당신 방법이 너무 심하다는 등의 논쟁 끝에 이텐이 이념이 달라 학교를 그만 둡니다. 제가 보기에는 두 사람이 다 맞는 것 같아요. 선택을 하고자 한다면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고, 이텐의 방식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관리는 엄격해야 하는 것 같아요. 교육에선 우리가 이런 것들을 문제시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디자인이라는 것은 산업진흥, 수출 등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디자인은 그것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는 디자인이 적용 범위가 넓습니다. 저는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디자인, 문화 콘텐츠 디자인을 강조하고 싶어요. 영국의 영국문화협회(the British Council)는 영국의 문화를 조직적으로 전파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문화전도군단이지요. 정부의 후원을 업어 민간 주도로 사업을 하는데, 영국문화협회(the British Council)의 기준을 정했어요. 대외적으로 영국문화협회가 집중할 것은 영국 디자인과 교육을 온 세계에 프로모션하는 것이다.
디자인에는 두가지 관점이 있는데 하나는 콘텐츠가 따로 있고 이것을 만질 수 있도록 해주는 것, 캐릭터 등으로 만드는 것이 디자인이다는 것과 또 하나는 디자인 자체가 콘텐츠라는 것입니다. 저는 후자의 입장인데,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돈(화폐)이 디자인이 끝내준다고 가정해요. 돈은 4500만 인구가 다 쓰는 것이잖아요. 아이들도 빨빨거리고 기어 다닐 때부터 돈을 알지요. 우리 돈의 디자인이 예술인데, 그것을 가지고 다른 나라에 갔는데 그 나라 돈에 비할 바가 아니라면 그 문화적 자부심은 돈으로 환산 불가능하지요. 어릴때부터 쥐고 살았다면 무형의 미감 교육은 계산이 안 되지요. 몇 조원의 수입 대체효과가 있다는 등의 계산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보지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돈은 네덜란드 돈인데, EU에서도 네덜란드 돈을 따로 만들자고 논의되고 있어요. 유로 화폐는 문화가 뭉뚱그려지면 엉망이 된다는 것을 증명해요. 디자인 자체가 문화에요. 바우하우스도 그 자체가 교육기관이면서 그 자체가 콘텐츠였지요. 건물, 사람, 교육내용, 역사에 끼친 영향 등 그것이 한 세기를 가고 있지요. ‘디자인이 콘텐츠다’라는 것이 핵심이고 올바른 접근이라고 봅니다. ‘~의 디자인’처럼 수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곧 바뀔 거에요.
미래를 위해서도 디자인에 대해 온당한 생각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지금 그런 흐름이 일어나고 있고 시각적인 것들은 쉽게 국경을 넘잖아요. 우리가 디자인에서는 유리한 면이 저는 글자가 디자인의 중심이라고 보는데, 한글은 뜻글자의 터전 속에서 소리 글자가 있는 것이라, 잡종(hybrid)한 태생이 있거든요. 그런 것들이 음으로 양으로 성격이 스며있지요. 최근 일본의 잡지IDEA NO. 307 : 韓国のグラフィックデザイン, 한국의 그래픽 디자인)에서 한국 디자인을 소개했는데, 이 표지는 제가 디자인 한 것이고 제목은 ‘α(알파)에서 ㅎ까지’ 제 기본적인 생각이에요. α(알파)에서 상상력의 폭이 더 넓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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