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 :이선옥(아르떼 기획운영팀장)| 정리 :김지우(웹진콘텐츠팀)
일시 : 2004년 11월 23일 | 장소 : 중앙일보 고문실
이선옥: 우선 귀한 시간 쪼개서 아르떼 웹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지난 1년 동안 일본 교토 국제일본문화센터에서 연구교수생활을 마치고 올 7월 귀국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1년 동안 어떤 연구 활동을 하셨는지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할까 합니다. 그리고 일본에 계시는 동안 참여하신 한, 중, 일 동북아시아의 문화 네트워크 대담 프로그램 관련해서, 기존 패권주의를 넘어서 문화 다양성을 살리는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네트워크 구상에 대한 의견도 함께 듣고 싶습니다.
이어령: 제가 일본에 1년 동안 있으면서 가장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한중일 동아시아의 문화였습니다. 동아시아 문화는 분명히 솥발처럼 안정된 세 다리를 가지고 1-2천년을 내려온 문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사람은 ‘중국 문화=동아시아 문화’라고 생각하고, 일본 사람은 동아시아 문화가 근대 이후 일본 문화가 전파되어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생각에는 중화사상(中華思想, 중국 한족의 자기민족 중심사상),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정치 슬로건. 동아시아에 동남아시아를 더한 말로 ‘대동아 신질서 건설’이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사용한 말) 등이 기저에 깔려있습니다. ‘동아시아 문화’는 지배하는 문화이고, 다른 문화는 종속된 문화라는 생각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 문화의 독자성’을 이야기 할 때, 민족주의, 나쁘게 말하면 국수주의적인 입장에서가 아니라 중국문화가 오늘의 중국문화인 것, 일본 문화가 지금의 일본 문화인 것은 한국이라는 중간의 반도문화, 즉 양 나라 사이에 있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 일본, 아시아 문화가 다양해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고대사나 근대사를 보더라도 이런 한국의 역할을 발견할 수 있고, 앞으로도 ‘한국의 문화는 무엇이다’라고 알릴 때에도 중국, 일본의 문화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겁니다. ‘어떻게 “동시성” 속에 세 나라가 다양한 목소리를 가지고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해 왔을까?’ 이런 관심을 가지고 [매화](2003, 매화를 통해 한중일 문화코드를 읽는 책)라는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벚꽃, 중국은 모란, 우리는 무궁화, 각 나라를 상징하는 꽃은 다르지만 ‘매화’는 한중일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좋아합니다. 각자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모두에게 통하는 문화도 있는 것이죠. 다시 말해 벚꽃, 모란, 진달래/무궁화로 상징되는 세 나라의 개성도 있지만, 매화라는 공유하고 있는 문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매화라도 중국 사람의 매화, 일본 사람의 매화, 한국 사람의 매화는 다릅니다. 원래 매화의 원산지는 중국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 일본으로 건너오는 사이에 매화를 둘러싼 문화가 서로 다른 다양성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매화’와 같은 동아시아가 가진 공통문화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50개의 항목을 통해서 책을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제가 다 못쓰면 누군가가 이어서 쓰겠지요. 그래서 일본에 가서 1년 동안 자료를 조사하는 등 기초작업을 하고 왔습니다.
김지우: 일본에 계실 때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이어령: 제가 일본에 있는 동안 ‘배용준’을 비롯해 한류 붐이 일었어요. 배용준은 제가 한국에 있을 때에도 잘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신기하게도 한국인이 한국이 아닌 일본에 와서, 한국의 먼 옛날 사람도 아니고, 학문의 대상도 아닌, 현재 비디오나 TV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에 관해서 알게 되었죠. 일본에서 ‘욘사마’를 보며 마치 파리에서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에서 프랑스 음식을 먹는 것처럼 문화란 공기와 같아 마치 기류처럼 돌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때 제가 깨우친 것은 개인의 삶에 얽혀있는 문화가 사람을 통해 확충해갈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물론 배용준이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일본 여성들이 좋아하는 것은 아닐겁니다. 배용준을 보고 감동하기 때문에 좋아하지요. 4,50대가 되어 소녀의 꿈도 사라지고, 사랑도 희미해진 그들에게 누가 다시 첫 사랑의 기억과 가슴이 울렁거리는 그 감동을 줄 수 있었겠어요? 정치, 경제가 줍니까? 남편이 줍니까? 아니죠, 배용준이 준 거에요. 그들에게 배용준은 배용준이 아니고 자기가 첫사랑하는 남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배용준이 나오는 비디오를 볼 때는 향수를 뿌리고, 소녀 때 입던 원피스를 입고 마치 첫사랑 연인을 만나는 것처럼 본다는 거에요. 이 현상이 한류인가 아닌가를 떠나서 꿈도 낭만도 잊어버린 중년 부인들이 비록 TV 속의 환상이라고 할지라도 다시 옛날의 순수한 순정의 첫사랑의 감동으로 가슴이 끓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그간 백 년 동안 서양, 할리우드(hollywood), 유럽만 바라보며 탈 아시아를 부르짖다가 지금은 그런 것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자기와 생김새가 별반 다르지 않은 배용준에게 열광하는 것은 대단한 현상입니다. 아시안 콤플렉스, 개화기 이후 해바라기같이 서양에만 향했던 일본인들의 시선이 일본으로, 이웃나라 한국으로, 중국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했다는 것은, 거대한 문명화 문화를 이루는 또 하나의 층이 만들어진다는 의미이죠. 한 때는 식민지 관계로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관계였던 한국의 이미지가 동등한 타자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죠. 그것은 한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 자신을 위해서 행복한 일입니다. 자기 이웃에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 있는 줄 몰랐는데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의 삶이 얼마나 재미있어지고, 풍부해졌겠어요? 우리도 이제는 그 문턱을 넘어야 하는데, 아직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기 때문에, 상처를 준 사람은 잊어버리고 화해하자고 하지만 상처를 입은 사람은 여간해서 쉽지 않지요. 정치, 경제로는 화해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국가주의나 정치적인 문맥 속에서 보았을 때는 문화의 왜곡현상, 문화의 이지러짐의 각도가 크지만 개개인의 마음에서는 문화처럼 문턱없이 넘나드는 것도 없습니다. 문화만이 문턱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선옥: 선생님 말씀 들으면서 ‘(개인의) 감정을 매만져주는 문화의 힘’, 삶을 관통하는 문화의 힘을 생각하게 됩니다. 선생님께서 90년 초대 문화부장관을 역임하면서 국민들의 문화향수권을 강조하셨습니다. 초대 문화부장관으로 재직하셨을 때의 이야기들을 들려주세요.
이어령: 우리가 경제적 불평등을 이야기하고 서울-중앙 집중, 도농간의 격차로 인한 여러 가지 불편함을 이야기하지만, 문화향수권의 격차는 빈부격차보다 곤란한 문제입니다. 빈부격차는 경제 발전과 정책으로 개선할 수 있지만, 문화적 차이라는 것은 한번 벌어지면 그 간격을 메우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북한 아나운서가 이야기 할 때 같은 한국말인데도 우리와 많이 다른 것처럼, 서로 다른 문화가 오래 지속되면 정치, 경제의 격차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가 나옵니다. 문화예술이 일상생활과 괴리되어있고, 지금의 고급문화는 단절된 채로 떠있습니다. 저는 고급문화가 대중 속에 숨쉬게 함으로써 문화예술이 향상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도 민간 설화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민중, 민속의 문화가 괴테의 파우스트라고 하는 세계 최고봉의 문학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저는 우리의 전반적인 문화향수권이라고 하는 것이, 일상 문화가 산맥처럼 형성되어야 거기에서 에베레스트 산이 나올 수 있듯이 그렇게 산맥처럼 확대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합니다. 큰 산맥 속에서 하나의 높은 산이 나오는 것이지, 평지에서 높은 산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벌판처럼 편평한 한국의 다양한 문화를 산맥처럼 만들어야 합니다.
공기처럼 만인이 누릴 수 있는 문화향수권을 어떻게 산맥처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물건은 나누면 작아지고, 먹을 것은 나누면 적게 먹게 되지만 문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작곡한 노래를 부르면 그 노래가 없어지나요? 백 사람, 천 사람이 불러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죠. 그림을 다 같이 본다고 해서 그림이 닳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이 있을 때는 남들을 불러 이것 좀 먹어보라고 잘 하게 되지 않아도, TV에서 재미있는 것이 하고 있으면 ‘이것 좀 와서 보라’고 사람들 불러 모으잖아요? 물질은 나누기가 참 힘든 것이지만, 아름다운 음악, 미술, 연극은 나눌수록 기쁘고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눌수록 가난해지는 것을 사회의 목적으로 삼아야 할까요? 정치나 경제는 본질적으로 아무리 깨끗한 말을 해도 독재나, 재벌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지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고 분유(分有)하는 것은 문화이죠. 그러니 문화가 강해져서 정치도 문화를 닮고 경제도 문화를 닮으면 거기서 나눔의 정치, 나눔의 경제가 생기는 겁니다. 문화가 모델이 되어야 모든 사람들이 고루 권력을 나누고 돈을 나누면서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생활문화, 문화향수권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문화부에 있을 때 했던 일 중에 ‘움직이는 미술관’을 예로 볼 수 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도시 한복판 접근하기 쉬운 곳에는 미술관, 오페라홀, 교회당 같은 것이 있지 관청이 있지 않습니다. 식민지 때 형성된 우리 도시의 중심에는 전부 관청이 있습니다. 행정 관청은 살기 위해 도와주는 것인데 왜 한복판에 있습니까? 관청이 중심이 되는 도시가 아니라 문화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국립미술관은 과천, 그것도 코끼리 차타고 들어가야 하는 곳에 있습니다. 접근성이 너무 떨어져 그 앞에 길을 내보기도 했지만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있는 미술품을 꺼내서 ‘움직이는 미술관’으로 공단, 병원 이런 곳에 가서 처음으로 전시를 하게 되었죠. 그렇게 1년 동안 했더니, 그 기간 동안 과천 현대 미술관에 가서 작품을 본 사람보다 움직이는 미술관을 통해 본 사람들이 더 많지 않겠어요? 미술관이 움직였더니, 미술관 하나를 더 지은 셈이 되었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다가 교통사고 나거나 화재라도 나서 미술품에 문제라도 생기면 큰일이라고 말합니다. 해보지도 않고 위험하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수장고에서 썩히는 미술품은 차라리 불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보여주고 공감할 때 진정한 미술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대중 속으로 끌고 나왔습니다.
제가 문화부 장관을 하면서 공식석상에서 세 번 울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는데요, 그 중 한번은 움직이는 미술관을 하면서였습니다. 전에 스웨덴 병원이라고 불리던 병원에서 한국의 풍경 그림을 전시한 적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주로 생활하는 어느 암 환자분이 휠체어에 앉아 우두커니 그림을 보며 눈물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 마지막에 육신을 움직여서는 도저히 가서 볼 수 없는 고향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데 그걸 보며 같이 울었습니다. 병실에서 답답하기만 했던 사람에게 저 그림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닿았을까, 내가 이걸 하지 않았다면 저 사람은 이 그림을 보지 못한 채로 죽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이 드는 순간 눈물이 나오더군요. 또 한번은 쌈지공원을 만들었을 때의 일입니다. 서울에는 집을 도저히 못짓는 작은 자투리 땅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쌈지공원을 만들어 보자하고 생활이 어려운 동네에 공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 어린이들이 서툰 글씨로 ‘이어령 문화부장관님, 감사합니다’ 간판을 만들어 환영해주더군요. 글씨를 잘 쓰고 어른이 시켜서 했으면 눈물이 안 났을 텐데, 아마 제가 본 간판 중에 그렇게 서툰 간판이 처음이었을 거예요.(웃음) 사실 부부싸움을 하면 제일 먼저 애들을 내쫓는데, 그런 동네에는 놀이터도 없어서 애들이 나가서 마음 놓고 울 때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도 쌈지공원에 오면 풍경이 땡그랑거리고, 아름다운 조각품이 있는 것이죠. 그런 곳에서 이러저러한 생각과 상처들을 스스로 예술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지요. 그러다가 모차르트가 나오고 피카소가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국회에서 왜 문화부가 환경부처럼 그런 자투리땅에다가 쌈지 공원을 만드느냐고 다그침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네들은 그저 쌈지공원으로 보느냐. 나한테는 그게 예술학교다’ 그랬죠. 그렇게 상처받은 아이들이 아름다움과 예술적 공간을 접했을 때 거기서 베토벤이 나오고 모차르트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 달동네에서 아이들이 상처로 삐뚤어지면 범죄자가 되지만, 거기서 아름다움을 체험하며 스스로 상처를 어루만지면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예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국회에서 답변하다가 너무너무 화가 나고 분해서 혼자서 몰래 운 것, 이렇게 세 번 울었지요. 제게는 이렇게 아프고 감동적인 기억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제게 준 핵심적인 키워드는 ‘문화는 공기처럼 만인이 소유하고 공유하고 분유하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가 못하는 것을 문화는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문화정책은 모든 국민이 같이 나누는 것이 되어야 하고, 이것이 문화의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선옥: 평지와 함께 산맥에 대한 비유를 하시면서 일상적 삶에서의 문화의 가치, 문화의 중요성, 함께 나누는 문화의 가치들을 많이 말씀해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 하시고자 했던 것들이 어떻게 보면 문화예술교육과 맥이 닿아 있는 사업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문화예술교육의 가치와 지향점은 무엇인가요?
이어령: 제가 문화부 시절 ‘문화학교’를 만든 것은 전국적으로 문화 체험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상 속에서의 문화향수권 뿐만 아니라 누리면서 배우는 교육효과를 주기 위해 문화학교 제도를 만들어 각 처에 독서, 붓글씨 등 문화교실(당시에는 문화사랑방으로 불림)을 만들었습니다. 일상적인 문화를 단순히 누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우고, 가치를 높이는 그런 작업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재미없는 것도 자꾸 하면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문화에 익숙해지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되도록 문화와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문화교육의 제일 중요한 부분이 독서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서상품권이라는 것을 만들게 되었지요. 사람들이 선물로 책을 살 수 있고, 읽을 수 있도록 말이죠. 책을 읽으라고 백번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도서상품권을 주면 그건 책 밖에 못사니까 돈이 아까워서라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방송국에서 퀴즈하고 상품 줄 때도 다른 것 주고 도서상품권 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시작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많이 유통하게 되어 독서인구를 늘리는데 이바지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주 접하면 익숙해지고, 보는 눈이 틔인다’ 그것이 저의 교육관이고 실제 교육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선옥: 최근에 독서광으로 소개된 저명인사 분들에 관한 기사를 봤습니다. 선생님 관련 기사 중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댁에서 일요일이 되면 모든 가족들이 누워서 함께 또 따로 책을 읽는 진풍경이 펼쳐진다는 것이었는데, 상상만 해도 굉장히 재밌는 이미지였습니다.
이어령: 저도 책을 읽고, 집사람도 읽고 그래서 애들도 책을 읽습니다. 그것도 질서정연하지 않고 여기저기 누워서 책을 읽어요. 한편으로는 식구들이 모두 게을러서 체육대회같은 것을 나가면 매번 꼴등하고 그랬지요. 저도 몸 움직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집에 가면 모든 가족들이 드러누워 책을 읽는 광경이 펼쳐지지요.(웃음) 책을 읽는 것은 환경에서 얻어지는 습관입니다. 어머니가 책을 읽으면 애들도 책은 읽는 건가보다 하면서 읽게 됩니다. 저의 독서습관은 어머니가 늘 책을 읽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형성되었습니다. 심지어 제가 아파 간호하실 때도 책을 놓지 않고 보시다가 부부싸움 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애가 아픈데 자식 간호 안하고 책 읽고 있다고 말이죠.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책을 보시니 잘 모르지만, 어머니와는 안방에서 같이 자고 생활하는데 늘 손에 책을 들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제가 오늘날 문학을 하게 되고, 교수를 하고, 문화부장관, 언론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어머니 손에 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책 읽는 어머니, 책 읽어주는 어머니, 커서는 자식이 어머니에게 책 읽어주는 이런 대물림의 독서라는 것이 우리 문화향수권의 기본이 되어야 하고 교육의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김지우: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문화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부는 그런 환경을 정책적으로 장려하고 지원, 조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가는 정책적으로 어느 선까지 관여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어령: 사실 엄격한 의미에서 문화부는 없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기본적인 것만 닦아주고 그 다음에는 자연발생적으로 자기 조직화 되어 문화를 즐긴다면 문화부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저는 그것을 글라이더(glider) 이론이라고 부릅니다. 글라이더는 혼자 날 수 없지요. 옆에 고무줄 달고 그걸 견인차가 끌고 와서 부력을 받아 고리쇠를 놓게 되면 혼자 날게 됩니다. 문화부는 문화의 글라이더이지 프로펠러가 되어선 안돼요. 글라이더를 끌어주는 견인차가 되어야 합니다. 발동을 걸어주고 놓아주면, 그 다음에 문화는 혼자 날아갈 거예요. 저에겐 제 어머니가 문화부장관이었지, 문화부가 책 읽으라고 해서 읽은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책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면, 우선 책값이 싸야 하고 좋은 책이 나와야 하고 전국 구석까지 책이 가야 합니다. 이런 혼자 힘으로 되지 않는, 자연발생적으로 되지 않는 부분인 공공영역(public)인 출판을 도와줘야 하고, 시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정부는 어디까지나 돕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문화부가 앞장서서 프로펠러 역할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하려고 해도 되지도 않습니다.
이선옥: 아르떼에는 문화예술교육에 관심 있고 실제로 활동하고 계시는 선생님들, 문화기반시설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분들, 광범위한 범위에서 문화예술교육에 관심 갖고 계신 분들이 두루 회원으로 계십니다. 그리고 청소년 세대, 젊은 세대들도 사이트를 보고 있는데, 아르떼에서 이 인터뷰를 볼 분들에게 선생님의 문화예술교육의 가치를 담은 메시지 부탁드립니다.
이어령: 기쁨을 전제로 하지 않는 교육, 그저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교육이 아니라 정말 인간이 존재하는, 사람으로 태어나길 잘했다, 오늘 하루 산 것이 정말 기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교육을 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물질이나, 권력, 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체험, 문화적 체험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 문화교육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쉽게 말하면 ‘아침 태양’을 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 해가 그 해지 별거냐, 어제 뜨는 해가 또 뜨는 해인데 뭐가 신기하다고 보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반복’된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아침마다 떠오르는 해가 어제의 태양이 아니라는 것, 태양은 똑같은 방향에서 똑같은 빛으로 똑같이 뜨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상상력과 기쁨을 아는 사람이고 문화를 아는 사람입니다.
보들레르(Baudelaire, Charles-Pierre, 1821~1867)는 성서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여 여자를 싸늘한 바위에 빗대고 자기를 모세에 빗대, ‘탁 내리치니 바위에 물이 흐르듯이 냉엄하고 쌀쌀한 여자의 육체에서 눈물을 흐르게 하여 그 눈물이 내 사하라의 사막을 적신다.’고 그랬습니다. 아주 무관심하고 돌아보지 않는 여자와 사랑에 메말라 타버린 사막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신이 있습니다. 그때 여성의 눈물이 내 사막을 적셔준다고 했습니다. 그 사랑을 ‘문화’라는 말로 바꾸면 어떨까요. 문화는 그 바위와 같은 사람을 만져서 거기서 흐르는 눈물로 메마른 삶을 적셔줄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사막과도 같은 메마름으로 그 눈물이 절박합니다. 제가 ‘문화예술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현장에 계신 아르떼 회원분들을 만난다면, 제가 문화부에서 하고자 했던 일, 도저히 개개인으로 문화의 가치를 전도할 수 없기 때문에 제도, 법, 정책으로 문화의 좁은 골목을 넓은 길로 닦아보려고 했던 꿈이 이십년 후에 여기저기서 이루어지는, 꿈이 조금씩 실현되어가는 것을 느끼는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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