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거 아틀리에의 삶과 예술 이야기, <로베르네 집>

글_백현주(계간 새야 편집장)

욕망 혹은 갈등하는 땅

<로베르네 집>(시공사, 2003)
요즈음 땅이 한창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규모는 한정되어 있는데 사람은 많으니 당연히 땅은 인간 욕망의 최전선에서 문제를 만들어낸다. 지난해인가는 달나라 땅을 분양한다는 광고도 있었다. 1에이커(약 1200평)에 19.99달러 하는 땅은 국내에서만 8일 만에 777에이커가 팔렸는데, 달의 새로운 주인들 중 대부분은 꿈과 사랑을 선물하려는 이유로 땅을 구입했단다. 인간 심리와 욕망의 고리를 기막히게 포착한 사업이 아닐 수 없다.
이보다 몇 달 앞서 예술가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인터넷 사이트와 미술잡지에도 독특한 분양 광고가 난 적이 있다. 공간재생 전문회사 ‘오아시스 프로젝트’의 이름으로 낸 이 광고는 서울 목동의 예술인회관을 입주금과 계약금 대신 예술 품앗이 2~3회를 받고 분양한다는 내용이었다. 300여 명의 예술인들이 분양 신청 의사를 표명했고, 8.15 광복절에는 젊은 미술인들로 구성된 ‘오아시스 프로젝트’ 회원들에 의한 ‘불법 점거’가 진행됐다. 경찰의 저지로 현장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담 밖에서 공연과 전시 등을 펼쳤다.

원래 예술인회관은 예술인들을 위한 작업실과 편의시설을 제공한다고 계획했던 건물이었다. 하지만 건물은 비리와 시공업체 부도 등으로 착공이 중단된 채, 7년째 흉물로 방치되어 왔다. 말하자면 이날 점거는 예술창작의 권리를 주장하는 항의이면서, 작업 공간 운영에 소홀한 건물주와 당국에 경종을 울리는 시위의 퍼포먼스였다.

점거는 곧 예술?

‘점거’만 놓고 보면 사실 이 해프닝은 새로운 것도 아니다. 총장실 점거, 명동성당 점거, 미문화원 점거, 가두 점거 등등 지난 수십 년간 신문기사를 장식하며 민주화운동 시민투쟁의 반려가 됐던 그 단어가 아닌가! 하지만 그런 점거가 일시적 자구행위였다고 한다면, 점거예술(squart = 점거squat + 예술art) 또는 점거아틀리에운동으로 불리는, 예술가들에 의한 점거는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 가고 있는 듯하다.

70년대 유럽에서 처음 등장한 점거운동은 처음에는 생존권과 거주권을 주장하는 단순점거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공간에 대한 배타적 독점과 활용에 대한 질문과 비판이 실질적인 점거 행위로 발전하면서 문화운동으로, 예술의 한 형태로 정착되고 있다. 부족한 창작공간에 대한 요구를 넘어서 도심 속에 오랫동안 방치된 죽어 있는 공간을 예술적으로 재활용하는 어엿한 예술행위가 된 것이다. 실제로 유럽의 성공적인 점거 사례들은, 확보된 작업실을 사회적 공간, 시민들과 예술가들이 소통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만들고, 이를 통해 예술의 생산과 유통에 대해, 예술과 공간의 철학에 대해 심오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파리시 리볼리 59번지

<로베르네 집>은 바로 그러한 불법점거 아틀리에에서 살고 있는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파리의 도심 한복판 리볼리 59번지에 사는 이 예술가 무법자들은 이제 자신들의 작업실이 된 ‘로베르네 집’을 대중에게 개방, 살아 있는 전시와 공연을 매일같이 무료로 제공한다. 그리하여 연간 방문객의 숫자가 4만 명을 넘어서는, 파리의 현대예술 공간들 중 세 번째로 많은 관람객을 가진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이곳을 점거한 이유 중 하나는 우리처럼 돈이 없는 예술가들은 물가가 비싼 파리에 작업실을 얻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야. …
3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최근 파리의 아틀리에 수는 10분의 1로 줄었어. 재개발을 이유로 모두 부수고 다시 짓지 않았거든. 그런데 우스운 일은 파리에는 500미터 간격으로 빈 건물이 있다는 거야. 우리는 생각했지. 창작열에 불타는 사람들이 작업실이 없어서 아무 일도 못하고 있는데 저렇게 많은 빌딩을 고스란히 빈 공간으로 둔 채 활용하지 않고 있는 건 잘못된 거라고. 그래서 이곳을 점거하는 일이 법을 어기는 일이긴 하지만 형평성이란 관점에서는 타당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실행에 옮긴 거야. 토론거리가 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우리는 점거라는 불법적인 행동을 한 것 외에는 어떤 나쁜 일도 하지 않았어. 밤에 소음을 내서 이웃들을 괴롭히거나 건물을 손상하거나 우리로 인해 사람들이 불평할 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았어. 우린 그저 방문객들을 위해 오후 한시 반이면 건물의 문을 열고 일곱 시 반이 되면 문을 닫았어…”

로베르네 집의 대변인 격인 가스파르의 이야기는 즐거워 보이기까지 하지만 어려운 일이 없었던 건 아니다. 1999년 11월, 불법 점거와 함께 실제 건물주였던 프랑스 정부는 즉각 소송을 제기했다. 곧 이들에 대한 추방령이 내려졌으나 6개월간의 유예기간이 주어졌고, 여론과 정치인들도 동조에 나섰다. 이후 수차례의 불안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현재는 약간의 벌금을 내고 공간을 사용하고 있다. 파리 시가 점거행위를 눈감아 주고 있는 것인데, 합법화를 위한 문서에 서명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이들은 불법 점거자들일 뿐이다.

진짜 미술관, 진짜 미술가

<로베르네 집>은 점거 과정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다. 대신에 이 책이 씌어질 당시, 여기서 작업하고 있던 25명의 작가들 중 16명과 함께 각각의 삶과 작품에 대해 나눈 인터뷰가 핵심을 이룬다. 이들 중에는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있고, 아프리카와 에스토니아 같은 먼 나라에서 온 사람도 있다. 20대 초반의 파르란 청년이 있는가 하면 우주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는 50대 아저씨까지 나이도 천차만별이다. 작업 형태도 다양하다. 지극히 정치적이고 전복적인 작업은 물론 전통적인 조형언어에 천착하는 작품까지 뒤섞여서 진짜 현대미술의 ‘박물관’이 된다.

이들에게 공통점은 가난하다는 것과, 그와는 반대로 전혀 다른 종류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다는 점, 그리고 ‘진짜’ 미술관을 원한다는 것 정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있는 현대미술관이야. 현재 살아있는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꼭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라도 전시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곳 말이야. …지금은 없어졌지만 여기에 공연장이 있었어. …능력 있는 배우를 기용해서 감동적인 공연을 하는 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문화수준을 높이려면 공연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기회를 줘야해.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무명배우만 모아서 공연을 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지.”

로베르네의 최고 연장자 베르나르의 말처럼, 이 책은 ‘현대미술의 거장’하고는 전혀 상관 없는 작가와 작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들 중에는 한번도 개인전을 하지 못한 작가들도 있다. 아니, 작가라고 말하기보단 그저 신출내기 미술 애호가 수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미술이 더 진짜 같고 본질에 가까워 보이는 이유는 뭘까?

즐거운 무법자들

매주 목요일이면 노숙자 급식 자원봉사를 하는 슬로바키아 사람 린다는 “하늘은 내 선생님이야. 여기서 이렇게 해가 뜨고 질 무렵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굳이 색채학 같은 건 배우지 않아도 돼.” 라고 말한다. 파베스코는 ‘무조건복종’씨 같은 사랑스런 주인공들로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을 한다. “무조건복종씨는 사람을 아주 편하게 해주는 마음을 가졌어. 그의 마음은 누구나 가져갈 수 있지. …그림을 보면 그의 심장 부분이 가위로 오릴 수 있도록 표시되어 있어. 이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라는 거야.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하지만 그건 각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들리는 진실에 귀 기울이면 쉽게 알 수 있는 문제잖아.”

그렇게 로베르네 집 사람들의 이야기와 작업은 밤을 넘기고, 국경을 넘고, 미술관을 넘어 우리들의 일상으로 성큼 들어온다. 아직 로베르네 집 식구들에게는 복잡한 법적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지만, 새로운 점거 아틀리에들이 자꾸 더 등장하고 예술가 무법자가 늘어나는 마당에 불안감 따위는 대수롭지 않은 게 이들이다. 그보다는 예술을 즐기고 삶을 꿈꾸는 게 중요할 따름이다. 가스파르가 모딜리아니의 말을 인용하여 말했던 것처럼 “네 현실의 숙제는 너의 꿈을 구해내는 것”이니까. 다른 말로 하면 “땅(!)에 매몰된 당신의 진짜 꿈을 구해내는 것”이다.

백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