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겨움과 따뜻함으로 한국적인 그림책을 만드는 이억배

인터뷰_박유신(명덕초등학교 교사) / 사진_박해욱
이억배 선생님의 그림책을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의 그림책은 단지 예쁜 그림이 많은 책이 아니라 그림과 글이 어우러져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노래하고 말을 걸어오는 요술상자와 같다. 그림책 한 바닥에 등장한 수십 명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독자를 향해 말을 걸어온다. 거기에는 과장도 미화도 없다. 우리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그려져 있다. 민족 대이동이라는 추석의 모습을 그린 <솔이의 추석 이야기>나 수탉의 인생살이를 조망하며 기쁨과 인생의 지혜를 이야기하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수탉>을 보면서 나는 그림책의 본질에 대해 생각했다. 먼 옛날부터 우리 생활과 함께했던 그림과 이야기들에 대해서 말이다. 미술이 언제부터 그렇게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미술관 안에 신상처럼 들어앉았는가? 미술관 속에 박제된 많은 옛 그림들도 원래는 감상자와 소통하고 일상생활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이억배 선생님의 그림은 옛 그림의 형식과 닮았을 뿐만 아니라 그 본질에 다가서고 있다. 나는 이 대단한 그림책 작가는 어떤 분일까 항상 궁금했다.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을 찾아 좁은 시골도로를 달리면서 이런저런 상상을 했다. 마침내 작업실에 도착. 그는 옆집 아저씨와도 같은 구수하고 수줍은 웃음으로 나를 반겨주셨다. 그리고 처음에는 어눌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놓으셨다.

원래 조소를 전공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림책 작업을 시작하게 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90년대 초반까지 문화운동을 하다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만두면서 어떤 일을 할까 모색을 하게 됐죠. 그때 우리 큰 아이가 네댓 살이었는데, 그 시기가 그림책을 읽어줄 나이잖아요.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그림책들을 찾아봤죠. 90년대 초반만 해도 수입되거나 창작한 작품들을 막론하고 볼 만한 그림책이 없었어요. 번역된 책들의 경우 그다지 높은 수준의 것이 아닌 대중의 인기에 영합한 것들 위주여서 저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거든요. 그러다 하나의 예술의 경지에 오른 외국의 그림책들을 접하게 됐고, 그림책의 세계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풍부하며 넓고 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선생님의 그림 속에는 우리의 전통 그림들이 독특하게 녹아 있습니다. 우리 그림을 그림책에 도입하는 작업을 하면서 시각문화 전통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시는지요?
우선 제가 우리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 때 민화반 활동을 했기 때문이에요. 제대 후 복학을 했을 때가 85년이었는데, 그 당시는 학생운동이 활발한 상황이었죠. 그런 시대상황 속에서 민화를 접하게 되었고 민화의 매력을 발견하면서 충격을 받았어요. 민화뿐만 아니라 무속화, 풍속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불화 등 전통 시각문화 전반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시기였죠. 서양미술 위주의 시각, 그리는 방법 등에 익숙해져 있다가 그때부터 우리 문화의 매력에 빠지면서 나름대로 옛 그림의 전통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게 되었죠. 그것이 제가 이후의 그림책 작업을 하는 데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준 것 같아요. 그림책의 글과 그림은 이야기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고 특히 어린아이들이 보는 그림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쉬워야 합니다. 민화도 복잡한 관념과 심오한 뜻을 담았다기보다는 그리는 사람 자신이 알고 있는 사물, 느낌들을 굉장히 편안하고 소박하게 드러냈다고 할 수 있죠. 그것이 그림책의 특성과 맞물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풍속화를 보면 인물에 하나하나 말풍선을 넣을 수 있을 정도로 그림 속에 이야기가 많아요. 선생님의 작품에서도 그런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이야기 전개방식을 특별히 고려하고 작업하시는지요?
하하… 글쎄요. 그림을 그릴 때 저는 이야기의 주제와 핵심을 표현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주변을 풍부하게 하는 의미에서 재미와 볼거리를 집어넣는 편입니다. 이런 것들을 계획하는데 어느 정도 의도성도 있어요. 저는 만화적인 요소들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면 한다는 입장인데, 아이들과 소통하는 입장에서 그리고 유용한 표현 방식이라면 가리지 않고 사용합니다. 저는 예술가와 대중의 소통 방식에 있어서 예술이 새롭게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민중미술이 상당히 정치적 구호가 많고 강렬한 표현도 있지만, 대중적인 소통을 위해 예술이 고고한 영역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개념에 대해서는 공감했습니다. 그러한 것이 우리 미술에서는 민화나 풍속화의 방향으로 나타났던 것이죠. 그림책 작업을 하면서 눈높이를 낮추고 어렵지 않은 편안한 소통방식을 고민하다 보니 민화며 풍속화 혹은 만화처럼 대중예술을 통해 검증된 방법론들이 저의 그림책에도 사용된 부분이 있습니다.

<솔이의 추석 이야기>를 읽으며 이 책이야말로 현대의 풍속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 얼굴이나 옷을 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재미있어요. 귀성길 풍경도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인상적이었고요.

<솔이의 추석 이야기>는 제 첫 작품이면서 가장 힘들었던 작품이에요. 그때는 그림책이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열정과 생각만으로 무모하게 작업을 했었지요. 저는 18,19세기에 꽃피었던 풍속화의 전통이 급속히 소멸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직접 그림책 작업을 하다 보니 이것을 현대 풍속화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실 이 귀성길 장면은 하나하나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로 자세하게 관찰해서 그렸어요. 이것들을 제가 다 알지는 못하잖아요. 이를테면 이 아줌마의 옷을 보세요. 이런 컨셉을 만드는 게 저한테는 쉽지가 않았어요. 사진 관찰도 하고, 카탈로그도 많이 보고 제가 볼 수 있는 건 닥치는 대로 다 봤어요. 이건 ○○ 백화점 쇼핑백이고, 이 명품백은 아마 짝퉁일 거예요(웃음). 저는 이걸 리얼리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리얼리즘이라는 용어가 적합할지 모르지만 사실에서 출발해야 거기서 환타지나 추상으로도 갈 수 있죠. 모리스 센닥(Maurice Sendak)이나 존 버닝햄(John Burningham)이 상당히 모던한 것 같지만 거기에는 리얼리즘이 깔려 있어요. 굉장히 파격적으로 해체시킨 형상이지만 그 사람들이 사실에 대해 추구한 부분은 대단합니다. 그런 전통이 외국 그림책에는 있는데, 아직 우리 그림책엔 그게 없어요.
그런데 제가 옛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다 보니까 은연중에 옛날의 보수적인 문화들이 묻어나오더군요. 사실 저는 굉장히 진보적인 가치관을 추구하는데도 제 그림 전반에 묻어 있는 보수문화는 예전부터 누적되고 이어져온 것이죠. 가족문화라던가 이런 것들 말입니다. 가령 <솔이의 추석 이야기>의 고향집 추석 풍경을 두고 왜 남자는 일 안하고 여자만 죽어라고 일하냐 이런 질문도 듣곤 했어요. 그게 핵심은 아니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침소봉대되는 측면들 때문에 굉장히 곤혹스러웠어요. 앞으로 또 작업을 하게 된다면 그런 점도 고려해야겠지요.

그림책 작업을 하시는 데 있어 원칙이 있으시다면?
제가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며 작업을 한 책이 <솔이의 추석 이야기>인데 그때 저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어요.’내 아이에게 보여주어서 부끄럽지 않은 그림을 그리자.’ 라고요. 그림책 작가로서 ‘실력은 안 되어도 적당히 하지는 말자’는 생각을 갖고 있지요.

현재 그림책 분야에 많은 다양한 작품들이 나와 있습니다. 젊은 작가들도 많이 등장하면서 우리 그림책도 성장한 것 같은데요.
요즘 신인들은 아주 다양한 스타일로 실험적이면서 패기만만하게 작업하는데 보기 좋아요. 한국의 그림책이 성장해간다는 느낌을 받아요. 저 자신도 그런 작품들을 보면서 자극도 받고 좋은 느낌을 갖고 있죠. 그렇지만 한국의 그림책 문화가 활성화되고 그림책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 현실로 오면 우울해져요.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에 번역 그림책들이 엄청난 물량과 인터넷 서점의 할인판매를 통해 패키지의 형태가 되었어요. 외연의 확장은 이루어진 것 같지만 국내 창작 그림책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국내 그림책 문화를 살찌게 하기보다는 상업주의가 창작 그림책의 발전에 해가 된 것 같아 우려가 됩니다. 외국 그림책이 얼마나 소개되었는가도 중요하지만 한국의 작가와 그림책 출판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독자가 어떻게 뿌리 내릴 것인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죠. 영화의 경우 90년대의 스크린쿼터제도를 통해 한국영화가 자생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데 그림책 시장에는 제도적 장치도 없고 외부에서는 과다경쟁이 벌어지고 있어요. 이제 막 시작하려는 창작 그림책에 상당히 위협적인 환경이죠.

결국은 상업주의가 문제라는 것이죠?
그렇죠. 사실 그림책이나 동화책만 해도 굳이 그렇게 많은 그림과 올 컬러를 쓰지 않아도 되는데 그림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런 경우는 그림을 줄이고 글을 살려야지 오히려 많은 그림들이 글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 같아요. 그것은 동화책에도 그림을 많이 넣으면 상업적으로 잘 될 것이라는 출판사의 전략 때문인 것 같은데 바람직하지는 않지요.

보통 그림책의 그림은 글을 보조하기 위한 것 정도로 생각을 하죠. 그런데 선생님의 작품들을 보면 그림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설명하거든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그림책에서의 글과 그림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동화책의 이야기를 보조하는 것이 삽화의 역할이라면 그림책의 경우 글과 그림이 대등하거나 그림이 더 주도하는 측면이 있어요. 저는 그림책에서의 글은 마치 시어처럼 여백이 많은 글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화책은 글이 다 묘사하고 설명하잖아요. 그림책의 경우 글은 아주 핵심적인 역할만 하고 그림은 글이 함축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는 역할을 담당해 글과 그림이 분담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대개 그림책의 글들이 그렇듯이 그림이 해야 될 모든 것들을 다 설명한다면 그림은 그걸 반복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되면 장면의 긴장도 떨어지고 지루해지죠.

그림책을 보는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할 부분이네요?
독자들이 어떤 그림책이 좋다고 이야기할 때 우린 아직 글을 중심으로 놓고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아직은 그림책을 동화책의 확장 정도로 보는 태도가 있다고 할까요? 그림책은 동화책과는 또 다른 영역인데 아직까지 우리의 독서 태도에는 그림책을 동화책의 확대판이나 또 다른 버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림책은 그림책으로 봐야 하는데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의 신간 <개구쟁이 ㄱㄴㄷ>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영어권의 abc북은 많이 봤는데 ㄱㄴㄷ책은 처음이거든요.

그렇죠. 하지만 꼭 영어의 abc북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에요. ㄱㄴㄷ책은 학습지 회사에서 그야말로 정보를 가르치기 위해 만들곤 했는데 아직 단행본은 없었죠. 그래서 새로 도전해보고 싶은 영역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한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기도 했고요. 아이들이 꼭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한글을 늦게 배울 수가 있잖아요? 늦게 한글을 깨친 아이들한테 즐길 수 있는 하나의 책으로 생각을 한 거예요. 초등학교에서 1, 2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한번 다양한 실험을 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아이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해요. 간단한 반응이라도 전해 듣고 싶네요.

선생님께서 추구하시는 이상적인 그림책의 모습과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당분간은 옛 이야기 그림책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고 한편으로는 글 없는 그림책처럼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이야기가 되고 그 안에 볼거리가 많은 그림책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지금 같은 스타일이 아닌, 다양한 그림책을 가능하다면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이억배가 그린 것 맞냐는 얘기가 나올 수 있는 그런 그림책 말입니다. 그림책 작업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내가 하기 싫을 때까지 하겠단 생각이에요. 외국의 그림책을 보면서 부러웠던 것이 영국이나 미국의 작가들을 보면 굉장히 경쾌한 그림을 그리는데 나이를 보면 60~70대 작가들이 많아요. 그림책은 작가가 나이를 먹고 예술적으로도 원숙하고 인생에 있어서 충분히 무르익을수록 더더욱 꽃이 피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도 이젠 작가들이 늦게까지 살아남아서 젊은 작품을 했으면 하는 그런 바람이 있죠.

선생님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저는 요새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그림책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형식적인 책읽기가 아니라 프로그램 속에서 폭넓게 활용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림책은 다양한 요리가 가능한 재료입니다. 수업 시간에 그림책으로 다양하고 맛있는 요리를 드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원료를 제공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제 작품이 지역사회, 도서관, 교실 등 다양한 현장에서 활용되기를 바라거든요. 그런데 실물화상기로 확대한다든가 슬라이드로 보여주는 것 보다는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직접 읽어주길 바래요. 동그랗게 둘러앉아 체온을 나누면서 읽는 그런 방식 말입니다. 인간적인 유대감을 만들 수 있는 방법들을 취해야 하는데 그건 방법적으로 낙후됐다는 평가를 받아서 그런지 잘 되지 않는 것 같아요.
근본적으로 목소리나 접촉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뭔가를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것들이 활성화된다면 그림책을 학교나 가정의 독서문화를 뛰어넘는 새로운 문화가 될 것이라 생각해요. 저는 이 사회가 이렇게 강퍅해지고, 자기만 먹고 살려고 혈안이 된 것이 이러한 저변문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봐요. 그런 측면에서 따뜻하게 보듬고 나누는 그림책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중요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학교와 가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겠지요.

이억배 선생님의 소탈한 모습 속에는 열정적이고 신념이 확고한 예술가인 동시에 문화운동가의 모습이 숨어 있었다. 그의 그림책들은 처음에 볼 때는 그저 재미있고 다정하지만, 자세히 보면 볼수록 인간과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가득하고 어느 하나 소홀한 곳이 없다. 그의 그림들은 그 어떤 미술관의 예술작품보다도 묵직하게 가슴을 조여 온다. 그림책과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해 누구보다도 심사숙고한 결과가 아닐까. 나는 처음에 옛 그림과 그의 그림이 그림체뿐만 아니라 형식조차도 그토록 닮아 있는 것이 ‘연구’의 결과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눈 뒤, 그것은 어쩌면 이억배 선생님이 이야기꾼의 본질에 그만큼 가까이 접근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을 뒤로하고 그의 작업실을 나섰다.

박유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