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9가의 두물다리 앞, 도심 한 가운데를 흐르는 청계천변의 풍경들 속에 이제 명물이 되다시피 한 건물 하나가 눈에 띈다. 공사 중인 건물 전면에, 알록달록 고운 색동 빛깔 가림막이 예사롭지 않다. 건물 양 옆쪽 가림막은 오래전 교실 뒤편에 걸리곤 했던 정겨운 그림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형형색색 애틋하고 재미난 그림들 사이로 “C-9 생생 프로젝트”라는 글자가 보인다. 청계천 9가를 뜻하는 C-9, 생생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이곳은 옛 성북수도사업소 건물이다. 2004년에 설립된 서울문화재단이 성북수도사업소가 떠나고 난 자리의 이 오래된 건물을 단장하고 있다.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있는 것을 손질해야 한다”고 여러 군데 인터뷰에서 말하던 사람, 그리고 그 말대로 정말 이 오래된 건물을 고치고 손질해 다시 선뵈려 하는 사람. 서울문화재단의 유인촌 대표이사를 만나기 위해 공사 중인 건물 4층 서울문화재단 사무실을 찾았다.
배우 유인촌에서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이런 일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나는 배우고, 무대에 서야 하는 사람이지, 행정적으로 무슨 장(長)을 하고 하는 게 체질적으로 안 맞잖아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역대 최고의 햄릿 중 하나로 꼽히는 연극배우. 십년이 넘은 극단의 대표이자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교수. 이십년 넘게 안방에서 매주 만날 수 있었던 연기자. 메밀꽃 피는 봉평의 폐교를 인수해 예술인촌으로 탈바꿈시키는 사람. 이름 앞에 붙여야 할 수식어구가 너무 많은 그 사람, 유인촌은 지금 서울문화재단의 대표이사로 있다.
재단의 설립과 함께 초대 대표이사직을 맡은 그에게 지난 2년 2개월의 소감을 묻자 그는 “무대에 서야 하는” “체질”을 가진 배우로서의 소회를 먼저 털어놓는다. 망설임 끝에 결국 배우 유인촌을 서울문화재단의 대표이사로 만든 건, 이 재단을 통해 생겨날 수 있을지 모를 어떤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예술계가 처해있는 환경이 이 재단을 통해 조금이라도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를 이 길로 이끈 것이다. 그리고 2년 2개월, 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이렇게 말한다. “맡고 나서는, 개인적으로 최선을 다했어요, 진짜 온몸을 바쳐서.”
사실 소감을 말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쉼표가 필요한 법. 소감을 말하기에는, 잠시 서서 뒤를 돌아보기에는, 그는 여전히 한가운데서 힘차게 달리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온몸을 바쳐서” 지내왔던 지난 2년 2개월, 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절에 이 재단이 만들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곱지 않게 봤죠, 여기를. 시민단체들이나 문화예술계에 있는 분들도 시장의 개인적인 사조직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고, 반대도 많이 했어요. 처음 시작할 때 굉장히 고통을 많이 겪었죠.”
무대에 설 땐 “열 많고 다혈질인” 그가, 이 재단의 대표이사를 맡으면서는 “끈질기게 그리고 끈기 있게” 대화에 나섰다. “태생이 잘못됐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일단 어떻게 커 가는지 지켜봐 달라, 이렇게, 민예총, 문화연대, 기타 많은 예술단체, 공무원들… 2년 반을 설득하면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처음 3-4개월 정도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좋지 않은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시민단체들과는 일단 어느 정도 잘 풀었다고 생각을 해요.”
재단 설립과 대표이사 취임 초기에 불거졌던 여러 비판들은 어쩌면 오히려 이런 ‘소통’의 노력으로 결실을 거두었는지 모른다. “예술가들도 고집쟁이들이고, 시민들도 요즘은 다 다양하잖아, 목소리가. 그걸 조율해내는 것, 그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을 극복하는 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런데 일단 보여주자. 몸으로 때워주자, 그렇게 해서 나름대로 어느 정도 소통이 됐다고 생각해요. 2년 반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는데, 2년 반이란 짧은 시간이고 또 신생조직인데도, 밖에서 이야기하는 재단의 위상이라든지 믿음도 이제 많이 쌓였고. 또 절대 정치적으로 이 재단을 움직이지 않았어요. 이러한 것들이, 이신전심으로 통하게 된 것 같아요, 이제.”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문화예술교육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곧잘 농담처럼 “결국은 사람이 핵심”이라는 결론을 내리곤 한다. 그것이 어디 문화예술교육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겠는가. 열정을 가진 한 사람이 있으면 많은 것이 변한다. 배우, 연출자, 교수, 재단 대표이사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하는 그 역시 그 전형이 되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기본적으로 항상, 어떤 것이 됐든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고. “정책의 경우에도 결국은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우선 행복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것이어야죠. 그게 아니고는 의미가 없어요.”
자동차 중심으로 설계된 도로 얘기를 꺼내며 그는 사람과 시대에 대해 말한다. 개발의 시대는 우리에게, 사람을 배제한 자동차 중심의 도로들을 남겼다. 사람이 걸을 수 없는 거리를 걷고 싶은 거리로 만드는 것, 그 자체가 이전 시대가 남긴 도시의 형상을 거꾸로 가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단지 시계추를 되돌리는 일만이 아니다. 청계천에 물이 흐르게 된 것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당장 모르지만 5년 10년이 가면, 서울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할 거예요. 왜냐면 걸으니까. 도심을 걷고 있거든. 그만큼 느려진다는 거거든요. 느려진다는 것은 얘기한다는 것, 옆 사람과 걸으며 얘기한다는 것이죠. 서울 사는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거야. 뭔가를 바꾸겠다고 해서 바뀌는 게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환경이 바뀌면서 생각도 바뀌게 되는 건데.”
개발에 밀려 지워진 자취들
차선을 줄이고, 사람이 걷는 도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는, 육백년 된 대도시 서울에서 무엇을 느낄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인구의 사분의 일 가량이 모여 사는 서울이라는 곳에서 어떤 특색 있는 도시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서울문화재단의 대표이사로서 그는 이 도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사실 그 숙제가 제일 큰 숙제예요. 그런 것을 잘 구상하고 잘 만들어야 ‘서울답다’는 말이 나올 것 같은데. 서울은 무엇보다 육백 년이 된 오래된 도시죠. 어쩔 수 없이, 아무리 행정수도를 옮기고 공공기관들을 지방으로 옮겨도, 서울이 갖고 있는 상징성이나 중심성은 이미 움직이기 힘들어요. 그만큼 오래된 도시기 때문이죠. 역사와 전통을 분명히 가지고 있잖아요, 서울이. 그런데 현재적으로, 그걸 느끼고 찾아볼 수 있는 건 남아있지 않아요. 다 없어지고, 개발에 다 쓸려나가고, 새로 다 짓고 이랬기 때문이죠. 그러나 어쨌든 역사와 전통을 떼어놓고 서울을 얘기하긴 어려워, 그런데 도시는 이미 대단히 현대적이 되었단 말이죠.”
육백 년 된, 그러나 그 육백 년의 자취는 개발에 밀려 다 쓸려나간 이 도시에서 그는 고민한다. 역사 혹은 전통을 지워버릴 수 없되 이미 지워진 도시. “지금 비원, 덕수궁, 경복궁 빼면 육백년이란 흔적은 아무 데도 없어요. 우리가 옛날에, 전쟁 이후에, 혹은 해방 이후에 정말 뛰어난 지도자를 만났다면 사대문 안은 절대 이렇게 안했을 거야. 로마에도 신로마가 있고 구로마가 있죠. 빠리도 옛날 그 동네는 그대로 있잖아요. 강남에야 백층짜리 건물 지으면 어때요. 그런데 강북에, 이 사대문 안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더라도 다시 옛날처럼 복원을 했었더라면, 그랬으면 서울은 정말 특색 있는 도시가 되었겠죠. 사대문 안에 들어오면 차도 안다니고, 옛날처럼 전차 하나 다니는 식의. 그런데 우리는 그런 생각을 못한 거지.”
그래서 그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전통과 역사를 복원해내야겠다, 그런데 없어진 걸 다시 짓고, 옛날 조선시대로 건물을 만드는 건 지금 거의 불가능하죠. 그렇다면 결국 그것들이 있었던 흔적, 그 당시에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 습관, 그런 것들을 되살려내야 한다, 말하자면.” 그리하여 그는 올해 서울문화재단이 기획한 올해 하이서울 축제에서 도성 밟기와 도성 밝히기 같은 의식을 벌였다. 남대문, 동대문에서 도로로 끊어져버린 성벽을 잇고 조상들의 혼을 불러내는 제의들.
축제를 상상하다
언젠가, 어느 인터뷰에선가, 서울문화재단 퇴임 전에 반드시 축제 전담 부서를 만들겠다고 그가 말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축제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느껴진 대목이었다. 하이서울 축제 이야기가 나온 마당에, 축제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듣고 싶어졌다. 사람들이 많이 참여할 수 있는 축제를 만들고 싶어 했던 그는, 그 성대한 축제를 마치고 나서 이제 배가 부를까.
“아직 내가 원하는 축제의 삼분의 일도 안 돼요. 원래 대도시 축제는 굉장히 힘들어요. 참 하기가 어려운 건데, 외국 같은 경우에도 축제들이 다 조그만 동네에서 이루어지잖아요. 에딘버러도 골목 같은 도로 하나 막아놓고 하는 건데, 우리는 세종로 한복판을 막아놓고 시청 앞에다, (웃음) 그러니까 사실은 굉장히 어려운 축제를 하는 거지.”
전국에서 500개의 축제가 이루어지는데도 왠지 축제라는 게 생소하기만 한 한국에서, 그는 에딘버러나 아비뇽 같은 공연축제를 떠올리고 있었다. 혹은 토마토 축제처럼, 하나의 주제를 충실하게 살리는 축제를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그가 상상하는 축제에는, 먹고 마시는 놀이만이 아니라 ‘의미’가 담겨있다.
“내가 하고 싶은 축제는 이런 거예요. 원래 축제를 한다는 것은, 그 마을이면 마을, 도시면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거죠. 추수가 끝나고 난 다음에 어떤 의례를 가지는 것처럼. 지금은 사라졌지만 우리 전통 축제들이 있잖아요. 보름달에 깡통에 불 돌리는 것처럼, 자기가 속한 공동체나 사람들의 건강이라든지 마을의 안녕 같은, 여러 가지의 의미를 담아서 비는 의식을 해요. 의식을 하려니까 술, 고기, 떡을 장만해야 하잖아. 의식이 끝나고 난 후에 그 음식을 나눠먹으면서 하는 게 축제가 되는 거죠. 근데 그 앞의 것들은 싹없어지고, 먹고 노는 것만 남게 된 거예요. 난 의식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그런 걸 할 땐 경건해져요. 서울에도 많아. 남산에도 목멱산제라는 게 있어요. 남산이 목멱산이예요, 목멱산 산신령에게 제를 지내는 거거든. 그게 왜 지내는 거겠어요. 우리를 병 안 걸리게 해주고 남산을 잘 지켜주시고, 이런 기원과 소망을 담는 거죠. 그런데 이제 무당들만 와서 해. 옛날엔 다 민중들이 와서 했던 거거든.”
소통하는 도시, 소통하는 예술
목멱산제에서 이젠 찾아볼 수 없게 된, 사라져버린 주인공들을 떠올리는 사람. 2년 2개월, 서울문화재단의 대표이사로 있는 동안 가장 주력했던 점도 가장 힘들었던 점도 ‘소통’의 문제였다고 말하는 그에게, 소통이야말로 아마 가장 큰 꿈인 것 같다. 서울에 대해 그가 꿈꾸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소통하는 도시. 동시에, 세계의 다른 여러 도시들과 소통하는 도시. 그리하여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해 전통과 역사를 이야기하는 말미에,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런 것들을 만들어내면서도, 국제적으로 소통이 되어야 해요. 왜냐면 서울은 어차피 국제도시거든.”
전통과 역사, 동시에 국제적인 소통을 강조하는 것은 말로는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소통’이라는 단어 자체가 수사학으로는 가장 안전하고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의 말에서는, 말로는 어렵지 않은 그것을 결국은 어렵게 현실로 만들어내기 위한 상상의 힘과 즐거운 의지가 읽힌다. 문화예술 관련 지원사업에 있어서도, ‘선택과 집중’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결국 고수해낸 그였다. 축제 전담부서를 만들겠다던 인터뷰가 언제였던가 싶게, 서울문화재단에는 이미 축제 전담부서가 구성되어 활동 중이다.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있는 것을 손질해야 한다”는 말을 지키기 위해, 옛 성북수도사업소의 건물을 고치고 있는 그다.
“이 건물, 싹 쓸어버리고 새로 짓는 게 돈 덜 들어요. 훨씬 더 우리를 복잡하게 하고, 피곤하게 하고, 사실은 그러면서 돈도 더 많이 드는 일을 하고 있는 거죠. 그러면서도 이 짓을 하고 있는 건, 청계천이 복원은 됐잖아, 그런데 양옆에 건물들은 옛날 그대로 있지 달라진 게 없단 말이에요. 큰 규모의 아파트 짓는 거나 나오겠지, 이제. 보나마나. 그런데 난, 청계천변에 건물을 고치거나 다시 지을 때, 샘플을 한번 만들어 보여주고 싶었어요. 와봐라, 청계천이 있는데, 그 청계천변에 이런 건물이 있으니 얼마나 좋냐. 근데 이거 새 건물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지. 이것도 소통하는 건물을 만드는 거거든. 앞뒤 다 뚫려 있잖아. 사람들 막 지나다닐 수 있게 말이에요. 사무실로 쓰게 될 4층과 5층 말고는 벽도 없어요. 길 건너편에서도 사람 걸어 다니는 게 다 보일 거야.”
소통하는 도시와 소통하는 예술을 꿈꾸는 그는, 건물 하나를 단장하면서도 소통하는 건물을 꿈꾼다. 완성품으로서의 건축물만이 아니다. 리모델링 공사 과정에서, 동네 사람들이 와서 공사 가림막에 그림을 그리는 판을 만들었다. 건물 주변의 주민들이 모여들어 그린 그림이 형형색색의 가림막으로 전시물처럼 내걸렸다. “그러다보니 민원도 적어요. 안 그랬으면 공사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평일엔 우리가 업무를 하기 때문에, 토요일이랑 일요일, 주말에 계속 공사를 했거든. 강남 같으면 어림도 없어. 평일 다섯 시 이후로는 공사 못해요. 그런데, 동네사람들이 직접 와서 다 그린 그림이고, 처음부터 다 같이 했기 때문에 애착이 강해요. 그게 소통이거든. 이거 끝나는 날 동네잔치 한번 해야 돼. 다 오시라고 해서 떡이랑 막걸리랑 대접해야죠.”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생각
“극장을 크게 짓자, 예술가를 키우자, 이런 얘기가 굉장히 많이 있었죠. 그렇지만 지금은 오히려 가장 원초적인 기본으로 돌아가야 해요. 말하자면 기본이 바로선 도시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가 말하는, 기본이 바로선 도시란 이렇다. “말하자면, 이웃을 배려할 수 있는 도시를 만들자는 거예요. 대도시라는 게 어느 나라를 가도 시끄럽고, 공해 많고, 지저분하고, 그렇잖아요. 그런 대도시의 속성을 다 버릴 순 없겠죠. 하지만 적어도, 공부를 많이 안했어도, 대학을 안 나왔어도, 뭔가 떳떳하게 같이 살 수 있는 도시를 만들어보자. 돈이 없어도 문화예술을 어디에서든지 즐길 수 있게 만들자, 그게 재단이 할 일이라는 거죠, 말하자면. 예술의전당에 가서 십만 원짜리, 이십만 원, 오십만 원짜리 표를 사서,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겠어요. 극소수지, 그건. 그게 아니어도, 싼값에 양질의 예술을 누릴 수 있는 도시를 만들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인가. 서울문화재단은 동네마다 들어선 어린이 놀이터를 다양하게 새로 꾸미는 ‘문화가 있는 놀이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도봉구 창동에는 텐트극장을 짓고, 중고등학생들과 탈학교 청소년들이 철학과 인문학을 공부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거리의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책 읽는 서울’ 사업을 벌인다. 규모로 압도하는 거창한 사업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눈을 깜빡이고 숨을 쉬듯이 익숙하게 접하는, 공기와 숨결 같은 그 무언가를 바꿔나가기 위해 고심한 흔적을 느껴볼 수 있다.
서울문화재단이 작년부터 문화예술교육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의 하나로 인문학 세미나를 열고 있는 것도 색다르다. “내가 보면 우리 분야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잘해보려고 해보니까 교육에서 항상 부딪히거든. 우리의 사회의 모든 구조를 바꾸는데 가장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게 바로 교육이에요. 근본적으로 교육의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꿀 수가 없어요.” 문화예술교육을 생각할 때, 십년 이상을 보고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람들이 자꾸만 “새끼를 치고”, 그렇게 사람들이 바뀌고 사회가 바뀔 거라고 말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극에 반응을 하고, 그 반응을 통해서 새로운 걸 얻어가요. 그런 자극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문화예술교육에 참여하시는 분들이. 너무 가르치려고 하는 것보다는, 열개를 다 안 주고, 한개만 줘서, 그걸 받은 사람들이 열개를 터득하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아요. 눈에 보이는 거 들리는 거 다 해주면 안 돼요. 그렇게, 교육을 ‘받는’ 사람은 재미가 없어요. 문화예술교육 하는 사람들은, 항상 어떻게든 사람들이 감동 받을 수 있도록 접근을 해야죠.” 이어 문화예술교육의 매개자들에게, 그는 이 한마디를 덧붙인다. “절대 지치면 안 돼.”
무대 밖에 선 배우
“지치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대표님은 안 지치세요?” 이렇게 물으니 그는 웃으며 답한다. “지쳤어요, 이제.” 2년 2개월 동안 정신없이 좌충우돌 했다며 웃는 그는, 그러나 아직 지쳐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마라톤 출발선을 막 내딛은 사람처럼 보인다. 처음 인사를 나누고 마주 앉았을 때, 옷걸이에 걸려있는 운동복을 가리키며 인상적이라고 말하니 매일 아침 자전거로 출근하고 사무실에 와서 옷을 갈아입는다고 말해주던 그는, 운동을 워낙 좋아하는 데다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운동한다며 웃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골골거리면 안되잖아요”라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움직여야 한다”고 덧붙인다. 죽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움직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 마지막으로 그에게 무대에 설 계획을 물었다.
“올해는 못할 것 같아요. 작년에 십이월에 했거든. 일 년에 한편씩은 해야 되는데, 내가 거의 안한 적이 없는데 말이에요. 옛날 구십 년대에 노조위원장을 삼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딱 공연 못했고, 재단에 와서 처음 2년을 못했지.”
그러고 보니 그가 연예인노조 초대위원장을 지냈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그 시절에도 사무실에 간이침대를 두고, 중요한 일이 있으면 사무실에서 숙식을 하며 지냈다는 기사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그리하여, 무대에 설 계획을 묻고 나서 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무대 바깥에서도, 카메라 렌즈의 화각을 벗어나서도, 그 열정을 식히지 않는 배우. 그리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배역을 가장 충실하고 열렬하게 살아내는 사람. 배우다운 열정 앞에, 무대 아닌 곳이 어디 있으랴.
글/ 조은주, 사진/ 박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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