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다양성이 불편해야 할 이유

<여는글> 문화다양성이 불편해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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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해, 농촌지역에서 결혼한 한국 남성들의 열 명 중 네 명은 국적이 다른 여성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부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이민 온 외국 여성들의 수가 어느덧 정부 통계상으로도 7만 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필리핀, 베트남, 중국에서 온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들도 점점 더 늘어나게 되겠지요. 5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는 이주노동자의 규모까지 감안해본다면, 단일민족의 문화동질성을 내세워왔던 한국도 이제 다민족, 다문화사회로 진입해가는 듯합니다.

변화의 기미는 인구통계학적인 사실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백인혼혈의 매력적인 배우들이 TV드라마에서 시선을 끄는가하면,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스포츠의 전국리그 MVP가 한국인 혼혈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지난 몇 달간 한국 사회에서 갑작스레 혼혈에 대한 논의가 뜨거웠습니다. “부끄러운 것은 혼혈이 아니라 혼혈에 대한 차별”이라는 하인스 워드의 칼날 같은 한 마디가 우리 사회 한 구석에 정말 그 날카로운 칼집 자국을 선명히 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언론과 정치권이 부산스럽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사실입니다.

문화다양성이라는 말이 언젠가부터 우리 시대의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스크린쿼터 축소가 뜨거운 논쟁거리로 불거지면서, 스크린쿼터라는 제도가 문화다양성과 어떻게 연관되는지의 문제가 중대한 이슈로 다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유네스코가 문화다양성을 위한 협약을 채택했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국제결혼의 비율은 점점 더 높아져가고, 혼혈이나 이주노동자들의 존재는 그 존재 자체로 문화다양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세대 간의 문화 역시 더욱 더 분화되고 있으니, 누가 뭐라고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아무튼 바야흐로 문화다양성의 시대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지요.

그런데 문화다양성이라는 가치와 개념이 너무 당연한 것으로 손쉽게 회자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문화다양성을 반대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을 리야 없겠지요. 하지만 민족이나 성별 같은 존재론적 차원에서든 취향과 선택의 차원에서든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그렇게 쉽고 편안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로 그 ‘다양성’이야말로 역사적으로 무수한 갈등과 분열과 전쟁과 폭력과 대립의 근원으로 작용해왔으니까요. 그러니 문화다양성을 너무 편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위험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의 의미를 비어있는 것으로 만드는 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개편을 맞이한 이번호 커버스토리에서 아르떼진은 바로 이 문화다양성의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어쩌면 이 문화다양성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문화예술교육을 사고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일지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체 문화다양성이란 무엇인가요? 문화다양성을 화두로 삼은 편집회의에서는 문화’다양성’ 개념의 ‘다양한’ 측면들이 자꾸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긴 문화다양성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하나로 규정할 수가 있을까요. 그리하여 이번호 아르떼진은 문화’다양성’으로 가는 ‘다양한’ 갈림길들을 열어서 보여드립니다.

김창선의 글은 남양주 종합촬영소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참여로 이루어진 세 개의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를 들여다봄으로써 기존의 문화를 어떻게 다르게 이해하게 되는지, 간혹 코끝 찡한 사연들을 있는 그대로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문화다양성을 잡다한 것들의 공존과 대화로 보는 이현정의 글은 여성영화제에서 만난 십대 소녀들의 신호를 해독해보려는 시도이며 제안입니다. 다양한 주변성들이 만나고 대화함으로써 경계를 허물어가는 과정을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고민해보았으면 합니다. 엄기호의 칼럼은 문화다양성을 단지 ‘인식’의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라고, 이것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고민해보자고 제안합니다. 콩글리쉬에 대한 긍정적 태도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서 고민하면 할수록 문화다양성은 쉽지 않고 편치 않은 개념이 될 듯합니다.

단일민족의 순혈주의와 문화적 동질성의 신화를 유지해 온 한국사회는 이제 문화다양성과 다문화 이해를 지향하는 문화예술교육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지금의 추세로 국제결혼이 이루어진다면 한국어를 서툴게 하는 어머니의 아이들이 곧 농촌지역 아이들의 사분의 일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겠다, 는 식의 “우리”의 편안한 문화다양성 개념은 이제 가장 단순하고 유해한 이분법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새롭게 구성해내는 창조적인 시도들이 문화예술교육의 새롭고 유쾌한 시각과 접근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때입니다.

문화다양성에 대한 토론과 교육, 사유의 과정은, 그러므로 어쩌면 가장 불편하고 어려운 것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인스 워드가 한국에서 자라났어도 행복한 성장기를 보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으려면, 문화다양성에 관해서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불편해져야 할 듯합니다. 너무 편안해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들리는 말로는, 어린 하인스 워드에게 진실해질 수 없을 것 같으니까요. 문화다양성을 조금은 더 불편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습니다. 그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더 조각나 흩어져야 하겠습니다. 더 조각나 흩어져서, 한층 더 넓어져야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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