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나여훈(남성초등학교 교사) / 사진_박해욱
어린이 연극 전문 극단의 예술감독 인터뷰기사를 쓰겠느냐는 청탁에 응한 순간부터 사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불안이 싹터왔다. 고백컨대, 나는 교사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어린이 연극을 관람해본 적이 별로 없다. 대부분 현장학습을 통해서였고 그나마 기회도 적었다. 게다가 문화예술 공연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즐기는 편도 아니라, 인터뷰에 응해주시는 분께 예의도 아니지 않은가 하는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한 불안함과 미안함을 가슴에 담은 채 극단 ‘사다리’의 연습실을 찾아갔다.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 그동안 사다리에서 공연한 작품 세 편을 비디오자료로 봤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그것들을 보는 동안 나를 맴돌던 예의 그 우려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새로운 경험으로 나는 가슴 떨림과 끓어오르는 호기심, 그리고 친근함을 느꼈다. 어느새 머리 속과 가슴 속은 온통 다음날 있을 인터뷰로 가득 채워졌다.
그동안 나는 어린이 연극이 상당히 유치하고 화려하며 그저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극단 사다리의 연극은 유치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으며, 아이들과 놀아준다기보다는 배우들이 놀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관객이 그 놀이에 빠져들게 했다. 연극에 빠져들고 있는 나를 느끼는 순간 내 머리 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아이들이 이 연극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느낄 수 있을까, 어른들의 동심을 자극하는 연극에 불과한건 아닐까… 이러한 의구심들이 끝없이 떠올랐다.
인터뷰 당일, 비가 내렸다. 연습실 바깥으로 토닥토닥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인터뷰가 시작됐다. 항상 예술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던 가장 궁금했던 질문으로 서두를 열었다.
사실 생활인으로서 밥벌이는 중요한 문제일 텐데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생활 때문에 꿈꾸던 바를 포기하기도 하잖아요.
공부라는 것을 그다지 잘하지는 못해서 4년제 대학은 다 떨어지고 서울예전에 들어가게 됐죠.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이라는 곳에 처음 갔을 때, 지도교수님이 우리를 모아놓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비록 국어, 수학은 제대로 못했을 테지만, 이 곳에 왔을 때는 연극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하고 고민했을 것이고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람이 한 번 시작한 일에 10년은 미쳐봐야 한다. 그래야 무엇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이 바로 제 연극인생의 씨앗이 되었고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것 같아요.
극단 사다리의 역사가 17년이나 됐다고 들었습니다. 아동극을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지요?
대학시절에 무대에 올린 연극 가운데 잘된 연극은 아동관객까지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공부를 하는 동안 우연히 아동연극에 대해 조사했는데, 어린이 연극이 참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 때 막연히 내가 유명한 사람이 되면 어린이 연극을 발전시켜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졸업을 하고 7-8년 연극을 해오면서 사다리를 결성하기 전까지 어린이 연극을 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뜻’맞는 사람들과 인연으로 같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교육연극 분야와 인형극 분야 등 다양한 곳에서 자기 일을 해오던 사람들이 뭉쳐서 ‘교육극단 사다리’를 결성하게 된 거죠.
아동극을 한다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은 없었는지?
물론 있었지만 그런 점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만화를 열심히 봤었는데, 그 때 얻은 교훈이 바로 주인공은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위인전을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에게는 ‘연극’이 그런 힘을 주었습니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산만하고, 주의력 부족이라는 얘기를 많이 듣곤 했는데 생각해보면 이런 저의 성향이 종합예술인 연극을 하는 것에 오히려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연극이라는 틀 안에서는 한 가지만을 고집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극단 사다리의 가장 중요한 전제이자 출발점이 ‘놀이로서의 연극’이라고 하는데요, 놀이란 과연 무엇인가요?
영어로 연극이 play이고, 또 놀이도 play이잖아요. 놀이는 사실 공연예술의 귀결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연극에 대해서 조금만 공부를 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죠. 인간의 삶 속에서 노동과 함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놀이입니다. 인간은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삶이 바로 놀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 점에서 저는 연극이 놀이를 공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보니 이것은 ‘허구’다, ‘놀이’다 라는 것을 일부러 더 보여주는 것 같던데요?
맞습니다. 놀이라는 것을 일부러 더 보여줍니다. 인형극도 숨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형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이 그런 것을 통해 꼭 무언가를 느끼거나 교훈을 얻어야 할 필요는 없죠. 그것은 어른들의 생각일 뿐이에요. 우리들은 아이들을 몰라요. 사실 아이들은 너무 잘하고 있는데 말이죠. 전 사다리가 일종의 놀이터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연극을 보고 어른들도 참 좋아하시는 걸 봐도 그렇고, 어른의 동심과 어린이의 동심을 이어주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측면도 있고요.
사다리의 인형극은 정말 배우가 인형을 들고 나와서 함께 움직였다. 그것이 매우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도 어릴 때 저렇게 인형을 들고 인형놀이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도 분명히 그러한 친근함을 느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의 천은 단순한 천 조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결이 되었다 이불이 되기도 하고, 끈이 되기도 하면서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극단 사다리에서 추구하는 감성과 창의성은 이러한 것들에서부터 일깨워지는 것이리라. 우리 주변의 사물에는 얼마나 많은 다양한 모습이 숨겨져 있는 것인가! 연극은, 그리고 우리 삶은 이 얼마나 디자인적인 것인가! 연극을 보면서 의구심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연극을 제작하실 때 어떠한 교육적 요소를 생각하시는지요?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서양적인 것이 중심이 되어버렸고 우리의 사회체제나 교육체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발전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부정적 영향을 끼친 것도 많죠.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인 것, 한국적인 것들로 순화시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우리의 놀이들도 찾아보게 됐죠. 전래동요나 놀이에서 예능으로 발전한 것이 없는지, 사회성을 갖고 있는 놀이들은 어떤 것인지… 그러다가 “단동치기 십계훈”이라는 것을 발견했지요.
단동치기 십계훈이라는 것은 단군 왕검이 내린 어린이를 위한 10가지 가르침을 말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온 우리 고유의 유아 교육 프로그램이죠. 우리가 어려서부터 배워왔던 ‘짝짜궁’, ‘잼잼’, ‘도리도리’, ‘곤지곤지’ 등등이 모두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 때 깨달았죠. 아, 우리 것이 이런 것이었구나. 내가 우리 것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구나. 그러면서 저는 당시 고민하던 외국유학을 포기하고 우리 것을 더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서양의 것과 우리의 것을 접목시키고자 노력했고요. 이러한 점이 극단 사다리의 연극을 다양하게, 또 균형감 있게 만들어가는 거겠죠. 그래서 저는 앞으로 계속해서 더욱 본질적인 것, 바로 ‘놀이’에 대해서 좀더 깊이 탐구해나가려 합니다. 본질적인 것을 탐구하고 이해하고 해석하여 그것을 전달해주는 것이 바로 교육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연극은 충분히 교육적인 활동이죠.
아이들에게 그런 것을 전달해주는 것이 교육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궁금합니다.
아이가 ‘엄마’라는 말을 하기까지 엄마가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지 아세요? 수백, 수천 번을 ‘엄마’라고 반복하여 되뇌며 가르칩니다. 본질을 교육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깨달을 수 있는 힘이 되죠. 아이들이 지금 잘하지 못한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지금 잘 못할 뿐, 앞으로 잘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정 짓지 말고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죠. 사실 이러한 교육의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잖아요. 그런 면에서 극단 사다리도 더 많은 아이들, 기회가 좀처럼 없는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노력이 더욱 필요하지요.
교육의 현장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사다리의 교육연극을 풀어 가시는지요?
학교는 사실 들어갈 생각도 못했고, 처음엔 유치원부터 들어갔습니다. 교육현장을 우리가 직접 찾아가자는 생각으로 2년 동안 한 달에 2~3회 공연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유치원의 열악한 현실을 그 때 알았어요. 몇몇 곳을 제외하곤 공연을 보여줄 공간조차 없더군요. 그러다 결국 극장공연 중심으로 전환을 했고, 워크숍 형태로 아이들과 만나거나 아동병동을 찾아가는 식으로 꾸준히 아이들과의 접촉을 시도해오고 있습니다.
사다리에서 연극놀이 연구소를 운영하는 것도 교육의 현장과 소통하기 위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죠. 초기엔 연구소에서 초등교사 모임인 ‘꼬마야 꼬마야’를 지원하면서 아이들과 할 수 있는 몸짓놀이, 교과서 속의 연극적 요소 찾기 작업에 주력했어요. ‘꼬마야 꼬마야’와는 지금도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저희와 함께 교과서를 연구하는 교사모임을 만들 계획이에요. 구체적으로 교과서를 가지고 연극적인 부분들을 개발해내고,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이어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어린이책 출판사에 책을 기증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해요. 저희가 많이 읽어보고, 또 좋은 책은 좋은 작품으로 만들기도 하죠. <이중섭>(최석태 지음, 길벗출판사)같은 작품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저는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여 함께 풀어 놓는 것이 곧 연극이라고 생각해요. 교육자는 교육자대로, 배우는 배우대로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자기 분야를 열심히 연구하여 함께(!) 풀어놓는다면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좋은 연극을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언젠가 대학로에서 거리 마임 공연을 하던 때였습니다. 풍선을 건네주는 마임동작을 어떤 아이에게 해봤죠. 그런데 그 아이가 한 손으로는 아빠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풍선을 잡은 채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있지도 않은 풍선을 말입니다. 그 순간을 저는 평생 잊을 수 없어요.
진정 그럴 것이다. 교실에서 아이들과 나눈 한 순간의 감동이 나를 평생 이끌고 가듯이, 배우에게는 그와 같은 배우로서의 감동이 그를 평생 그 길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사실 더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가 “꿈”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어떠한 나아갈 바를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으며,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새삼 물어볼 필요가 있으랴!
십년을 미쳐본 후 속았다라는 걸 깨달았지만 계속 미칠 수 있는 정열! 그것이 있는데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내가 다른 무엇을 하겠습니까? 내가 추구하던 본질적인 것들, 놀이와 마임, 그리고 교육성… 이러한 것들이 변질된다면 저는 과감히 그만둘 것입니다.”
극단 사다리의 공연센터가 문을 열었단다. 이번에는 꼭 사다리의 연극을 현장에서 관람할 것이다. 아이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직접 그 속에서 느껴보고 싶고, 나 또한 그 동심의 세계로, 아니 내 안에 있는 동심을 일깨우고 싶다. 그렇게 하면 나의 아이들과 나 사이에도 사다리가 놓이게 되지 않을까?
단동치기 십계훈 (檀童治基 十戒訓)에서 나온 동작들과 그 뜻
작자궁 작구궁(짝짜궁) : 너 스스로 만들어라. 우리 몸에 9개의 구멍이 있다. 손뼉을 치면서 그 구멍의 혈을 자극하여 감각을 열어준다.
지엄지엄(잼잼) : 바위처럼 굳건히 자라나고 엄하게 다스려라. 스스로가 우주의 주인이다.
곤지곤지 : 우주의 중심에 서서 스스로를 깨달아라.
도리도리 : 주변을 두루두루 살펴서 깨달아라.
어화둥둥 : 어화는 평화를, 둥둥은 심장을 튼튼히 한다는 의미이다
자장자장 : 잠을 자듯 편안하게 자라고 튼튼하게 자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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