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듀이의 <경험으로서의 예술>

글_ 이광준(시민문화네트워크 티팟 기획연구팀장)

** 존 듀이의 Art as Experience (Penguin Putnam, 1980)을 토대로 리뷰를 하면서 세권의 책을 참조하였다. 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 (책세상, 2003), 존 듀이 철학 입문(예전사, 1995), 존 듀이의 경험과 교육(원미사, 2001)

<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책세상, 2003)은 존 듀이의(1934) 1, 2, 3장을 발췌하여 옮기고, 이재언이 해제를 단 책이다.

[1] 들어가며
학교 교육, 평생 교육, 문화예술교육(이하 문화교육)으로 변화해가는 정책의 변화 과정의 밑바탕에는 어떤 철학이 내재되어 있다. 그 철학은 교육장에서 굳어져왔던 전통적인 훈육으로서의 학습, 완성을 향한 성장, 이와 연관된 학교 조직과 커뮤니케이션 과정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사상가인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는 교육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빛을 만든 중요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프래그머티즘(이하 실용주의)을 일구었고, 이에 기반하여 진보적 교육철학을 제시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문화교육과 연관해서 듀이의 저작은 문화와 예술의 분리, 경험과 지식의 분리, 일상과 교양의 분리를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참조이자 예술에 대해서 새로운 이해를 갖게 하는 중요한 원천이다. 그의 사유는 문화교육에서 나타나는 여러 문제 사태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어떤 해결 방안을 찾는 데 있어서 매우 유효한 개념들을 담고 있다. 그래서 듀이의 <경험으로서의 예술Art as Experience> 책읽기에서는 교육 철학과 관련한 민감한 논쟁 부분은 뒤로 미루고 문화교육과 연관해서, 통합적인 교육, 미적 교육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2] 경험으로서 예술의 흐름
R. J. 번스타인은 <경험으로서의 예술>이 듀이의 경험의 전개 과정에 대한 후기 철학사상의 3부작 <경험과 자연>(1925), <경험으로서의 예술>(1934), <논리학;탐구이론>(1938) 중에서 경험의 사회적이고 실천적인 면에 대한 탐구를 넘어서 예술적인 국면과 미적인 국면까지 확장하고 통합한 저작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초기 저작에서 나타난 그의 실용주의는

수단, 방법, 도구성과 연관해서 사회적이고 실천적인 측면과 연관된 주제에 대해 많은 주목을 하였다. 그것은 과학 철학을 통해서 철저히 계승되었고 다양한 흐름으로 발전해 왔다. 한편 듀이의 철학에 있어서 경험, 미적 경험, 목적, 미적 향유 등에 대한 사유는 60년대 이후 새롭게 조명되었다.
재해석되어 부각된 <경험으로서의 예술>에서 우리는 공통성, 삶의 충만성, 모든 경험의 수렴적 완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경험의 유기체적 성격에 대해서 밝히면서, 일상적인 삶에서 얻는 경험과 미적 경험의 연속성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또한 <경험으로서의 예술>에서는 근대 미학과 현대 예술론의 곳곳에 있는 미적 관조, 예술과 일상의 분리에 대한 비판을 볼 수 있고, 생동하는 예술이라는 재구성된 개념과 예술과 철학의 관계, 예술의 기여, 비평의 역할에 대해서도 만날 수 있다.

[3] 경험의 의미
다윈의 영향을 받은 듀이는 연속성과 유기적 통합성에 주목한다. 경험은 인간이 하나의 유기체로서 환경의 자극에 반응하고 적응하면서, 환경을 문화로 재구성하는 과정이 된다. 인간이 유기체로서 환경과 세계에 적응해가면서 얻는 모든 과정이 경험이다. 경험에 대한 듀이의 사고는 주관성에서 나아가 간주관성에 도달하는 구성주의의 사유와 실험에 맥이 닿는다. 경험은 유기체적 성격을 갖지만 최고의 경험, 또는 체험은 자아와 대상의 상호침투가 이루어졌을 때, 내밀한 상호작용이 일어났을 때 가능하다. 미적 경험에서 연속적으로 나아가 예술 작품의 창조에 이르는 것은 많은 일상적 경험들이 적절히 구성되고 일정한 지향에서 통합될 때 이루어진다. 한 개인의 집합적 경험에서 나온 충동과 정서가 표현될 때 예술 작품으로 나타난다.

[4] 미적 경험
<경험으로서의 예술>에서 일상적 경험에 대한 분석은 미적 경험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진다. 유기체의 경험에 대한 서술, 일상적인 경험과 미적 경험과의 유사성과 통합성에 대한 기술을 통해서 경험과 분리된 예술을 비판하면서 예술의 의미를 재구성하고 있다. 생산적이면서도 동시에 미적이고, 도구적이면서도 통합된 모든 활동은 예술이다. 미적 경험이 일반적인 다른 경험과 달리 독자적인 영역을 갖게 하는 것은 상상력이다. “예술이란 일종의 경험함이며, 생명체는 경험 속에서 상상적으로 매체를 사용함으로서 색, 빛, 선, 음 등의 모든 자원을 구성한다. 그 과정에서 생명체는 활기를 얻고 그 활기는 형식을 통해 생동감 있는 질서를 부여받는다.” 관람자는 자신의 일상과 연결되어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통해서 이처럼 통합된 질서를 갖는 예술 작품을 이해하게 되며, 이것은 경이로운 것으로까지 상승한다. 인간이 상호작용을 통해 자연을 경험하고, 다른 인간을 이해하듯이 예술작품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다른 무엇보다 직접성을 갖는 예술은 연속성 위에서 자율적인 영역을 갖는데, 이것은 철학 또는 체계적 사상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 된다. 이것을 지각할 때 모든 것을 자연과 경험 혹은 예술과 과학으로 나누거나, 경험을 실천과 이론으로 또는 예술을 실용 예술과 순수예술, 천한 예술과 자유로운 예술로 나누는 구분을 넘어설 수 있다.

[5] 예술 개념의 재구성
듀이는 경험을 예술의 하위 개념으로 놓는 생각, 감성을 이성의 하위로 놓는 분리적 사유에 대해 부정적이다. 역사적으로 오래된 뿌리를 갖는 이분법적 분리의 사고는 고대 희랍의 이론과 실천의 분리, 근대의 이성의 우위 관념, 육체와 정신의 분리 등에서 이어내려 온다. 그것의 결과로 형성된, 현대의 삶과 분리된 지식과 예술과 과학에 대해 듀이는 부정적이다. 일상에서 연속적으로 뻗어나오는 예술과 과학에는 서로 상호 침투하는 어떤 계기가 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지식이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목적을 위한 도구인 것처럼 예술과 과학 또한 인간의 목적을 위한 도구여야 한다.

“미적인 것과 지적인 것의 차이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그것을 둘러싼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나타내는 연속적인 리듬에서 일어나는 강조점에 따른 차이이다. 경험에서 두 가지 강조의 궁극적 문제는 그 둘의 일반적 형식에서도 동일하다. 예술가는 생각하지 않고 과학적 탐구자는 생각만 한다는 오랜 관념은 템포나 강조의 차이를 다른 종류의 차이로 전환시킨 결과에서 나온다. 생각하는 사람이 그의 관념을 단순한 생각에 그치지 않고 대상과 통합된 의미가 되게 할 때에는 미적 계기를 지닌다. 예술가도 작업을 할 때 문제에 대해 사고를 한다. 그러나 예술가의 사고는 사물에 더욱 직접적으로 구체화된다. 그의 목적과 비교적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에 과학자는 상징, 언어, 수학적 기호들을 사용한다. 예술가는 아주 질적인 매체 안에서 생각을 하고 창작을 한다. 그리고 예술가의 언어들은 그가 창조하고 있는 사물에 아주 밀접하기에 그것 속으로 직접 융합된다.”
(Penguin Putnam, 1980) p.15(<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책세상, 2003) 36쪽)

‘도구’라는 말은 그동안 많은 오해를 낳고 있는 용어 중 하나인데, 이는 주로 실용주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듀이가 말하는 의미는 지식, 예술, 과학이 우리가 살면서 부딪치는 다양한 문제 사태들과 연속적으로 연결되어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지적인 것이 순수한 책에 들어 있고, 미적인 것이 순수한 예술품에만 존재한다면 일상에서 문제 사태를 접하는 인간에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현대의 ‘예술’ 개념에 대한 여러 결론처럼 듀이는 예술 작품에는 어떤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의의 문제가 있을 뿐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또한 예술은 그 자체로 순수하고,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다른 요소들, 철학, 윤리학, 종교, 과학, 정치 등등과 상호작용하면서 통합되었을 때 삶과 연결된 예술로 존재할 수 있다. 미적 경험에 다른 경험들의 소재가 가미되는 것은 예술의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6] 삶의 연속성으로서 문화교육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모셔두고 높은 좌대에 앉혀 놓은 예술에 대한 듀이의 비판은 20세기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 일군에서 끊임없이 지적해온 바와 상통한다. 20세기 중후반의 여러 흐름과는 사뭇 다르게 우리 사회의 예술장에서 칸트적 주관주의의 미적 관조나 순수주의는 여전히 뿌리 깊다. 예술을 위한 교육으로서 예술교육은 확대를 요구하고 있고, 예술을 통한 교육에서 확장된 통합적 교육 예술은 교육 현장에서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 더군다나 문화적 환경을 조직하고 새로운 경험을 생성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문화교육이나 생활예술은 편견과 몰이해 속에 있다. “살아있는 생명체와 그것을 둘러싼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나타내는 연속적 리듬”에서 나온 예술이 인간 본성을 자극하고, 인간 경험을 풍부하게 하고 활발하게 하려면 일상의 리듬과 연속적으로 이어져야 하지만 현실은 답보 상태이다.

듀이의 철학에서는 더 이상 순수와 응용을 나누는 이분법은 없고, 기초와 순수가 먼저라는 우선의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유기체로서 인간이 자기 필요에 따른 에너지의 조직화 속에서 연속성으로 이어지는 일상의 예술이 될 때 예술은 진정한 자기 빛을 발하고, 삶에서 향유되고 일상을 풍부하게 할 것이다. 교육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듀이가 말하는 경험의 재구성 활동은 어린 아이, 성인, 학생, 전문가, 예술가, 소수자 누구든 간에 동등한 교육적 가치를 향유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교육적인 가치의 체험은 언제나 계속되어야 한다. 이러한 연속성과 유기적 통합성 안에서 일상적 경험과 경험의 재구성, 그리고 표현활동은 문화와 교육과 예술로 구분될 수는 있지만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강조하는 바가 다른 활동들이 서로 연결이 될 때 듀이가 말하는 의미대로 교육은 꽃을 피울 수 있고, 예술 또한 향유되고 그때 민주주의는 실현될 것이다.

<경험으로서의 예술>은 경험을 매개로 해서 예술과 자연을 이어줄 뿐만 아니라 교육학과 미학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다. 교육이 경험의 재구성이라고 한다면, 경험은 근본적으로 지식이나 사유에 한정될 수 없다. 경험은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상황이 만드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제 사태들로부터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문제 사태들 속에서 개인의 집합적 경험이 표현, 상상력과 결합되어 생성되고, 그러한 경험에 예술적 활동이 융합되어 예술작품이 나온다. 이렇게 경험을 통해서 교육과 미학은 서로 연결된다. 여기서 우리는 새롭게 가야하는 문화교육의 지평에 대해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기술이나 테크닉 교육, 리터러시가 빠진 놀이교육, 예술을 위한 교육에 대해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이다. <경험으로서의 예술>은 문화교육이 지식, 기술, 예술품을 중시하는 기존의 질서 안에 덧붙여지고 축소되는 것에 대해 우려를 가지고 있는 많은 교사, 매개자, 기획자들이 꼭 읽어봐야 하는 문화교육의 텍스트이다.

[7] 나오며
끝으로 문화교육과 연관된 텍스트로 어떤 것들을 찾아야 할지 가늠해 보려고 한다. 짐작하건대 문화교육에 관한 이론은 여러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과 현장에 대한 인식이 결합되어서 나오기 때문에 실천적인 성격을 띨 가능성이 많다. 이미 존재하는 이론과 이미 존재하는 현장의 고민이 결합을 이룬 간학문적인 연구를 통해서 새로운 이론이 생성되는 과정이다. 왜냐하면 분과 학문에서 나오는 개별 이론만으로는 포괄할 수도 없고 제대로 된 진단을 내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학제 간 연구나 현장 통합적 성격은 근대를 넘어서려는 다양한 기획에서 나온 여러 연구가 띠고 있는 공통된 요소이다. 문화연구, 과학철학, 미디어연구, 인지과학 등은 일찍이 간학문성(inter-disciplinary)을 띠고 다양하게 전개되어 가고 있고 지금도 새로운 영역들이 자라나고 있다.
‘문화예술교육’ 연구는 더 들어가 문제 지향적 간학문성을 지닌다. 문화교육은 지식 교육이나 기능 교육이나 놀이 교육을 넘어선 곳에 있다. 문화교육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이 항상 접하는 학습의 문제, 존재의 문제, 정서와 표현의 문제, 사회적 정치적 지각의 문제 등, 듀이가 말하는 문제 사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듀이의 관점에서 보자면 문화교육은 문제 사태를 풀어가는 과정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의 텍스트는 현대적이다.

이광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