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은 끈질긴 헌신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선물

 

나이를 먹을수록, 영화를 많이 볼수록, ‘내 인생의 영화’든 ‘나를 움직인 영화’든 감동적인 영화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웬만하면 감정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더 이상 영화에 대해 궁금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삶에 대해 자꾸 심드렁해지기 때문이다. 인도영화 <블랙>도, 솔직히 말하면, 새로울 것이 없는 영화다. 시작부터 헬렌 켈러 재단에 대한 헌사를 담고 있을 정도로 영화는 익숙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게다가 볼리우드産 인도영화라니. 그렇다면 여기서도 ‘무뚜의 춤’이 나온다는 얘기일까?(1년에 약 400편이 제작되는 인도영화는 대부분 클라이맥스나 엔딩 부분에 출연진들 다수가 나와 춤을 추는 몹신(mob scene)을 선보인다. 무뚜는 그 같은 인도영화의 대표격인 <춤추는 무뚜>의 주인공 이름. 영국 대니 보일 감독도 이를 의식해 인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엔딩 장면을 같은 방식으로 담았다.) 그렇지는 않다고 하지만 지금껏 우리가 흔히 봐왔던 할리우드型 휴먼 드라마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 보면, 헬렌 켈러만큼 인간승리의 이야기가 또 어디 있겠는가.

 

청각과 시각 장애아 제자와 알츠하이머에 걸린 스승의 소통

 

미셸(아예사 카푸르)은 태어나면서부터 청각과 시각을 모두 잃은 장애아다. 8살이 다될 때까지 세상의 빛과 소리를 모두 차단당한 채 오로지 동물적 욕구만으로 살아가던 아이는 이제 보호시설로 보내는 것 외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태다. 아이의 엄마가 절망 끝에 마지막으로 선택한 방법은 특수교육 전문가라는 사하이 선생(아미타브 밧찬)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 모두가 포기한 채, ‘짐승’처럼 ‘사육’되던 미셸은 사하이 선생의 손에 의해 점차 ‘인간’으로 ‘양육’되기 시작해 결국 여인 미셸(라니 무커르지)로 성장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영화는 정말 진부하고 심심해서 불편함이 느껴지기까지 할 것이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물론 그렇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상당한 리듬감을 보여준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고 사하이와 미셸의 첫 만남에서 서로가 소통하기까지 갖가지 에피소드를 씨줄날줄로 엮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미셸을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인도하는 사하이가 자신은 점차 빛의 세계에서 어둠의 세계로 빠져 들게 된다는 설정이다. 사하이는 미셸을 대학에서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치명적인 알츠하이머에 걸리게 되고 기억과 의식을 완전히 상실하기 전에 스스로 미셸을 떠나게 된다. 미셸과 사하이. 잃었던 자와 얻었던 자. 그래서 다시 얻은 자와 잃은 자. 아무리 극단적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이더라도 사실은 그게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 오감을 모두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 때에 따라서는 아무 것도 보고 듣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과 의미상 큰 차이가 없음을 역설한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이 영화는, 미셸이 헬렌 켈러처럼 자신만의 언어 감각을 찾아가는 과정보다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이미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가 버린 사하이를 향해 미셸이 어떻게든 소통하고자 애쓰는 모습이 더 인상적이다. 영화는 오히려 이 부분을 더 늘렸어야 옳았다. 그래야 훨씬 더 차별적이고 새로운 작품이 됐을 것이다.

 

어둡지만 밝고, 차갑지만 따뜻한 영화

 

어쨌든, 아무리 언어능력을 갖추게 됐다고 하지만 수화에 의존해야 하는 청각과 시각 장애자가 치매에 걸린 노인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그건 정말 기적이 필요한 일이 아닐까. 어릴 적, 미셸에게 특수학교 선생을 데려오게 해달라는 미셸 엄마의 부탁에 아빠는 날카롭게 일침을 가한다. “그 애에게 필요한 사람은 선생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는 마술사일 거요!”

 

하지만 세상은 기적이 아니라 노력으로 진행된다. 사람이든 세상이든 ‘마술사’의 눈속임이 아니라 ‘선생’같은 사람들의 끈덕진 참을성과 반복되는 학습에 의해 길러진다. 미셸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한 사람의 끈질긴 헌신에 따른 것임을 확신한다. 그래서 자신 역시 같은 길을 걸으려 한다. 자신이 처음으로 배운 말이 ‘워터’였듯이 미셸은 사하이의 텅 빈 머리에 ‘워터’를 채워주려 애쓴다.

 

영화 <블랙>은 어둡지만 밝고, 낯설지만 익숙하며, 차갑지만 따뜻한 영화다. 무엇보다 장애인들, 취약자들, 소수자들,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일반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마음들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사하이는 발버둥치는 아이를 무조건 안아 달래기보다는 야단치고, 막고, 혼내고, 짜증내고, 그래서 종종 지쳐한다. 아이를 결국 어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불안해한다. 이런 류의 영화가 빠지기 쉬운, 성자(聖者)연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점이야말로 <블랙>의 가장 큰 장점이다.

 

하지만 거슬릴 만큼 아쉬운 점도 눈에 띈다. 인도가 아무리 계급사회라 하더라도 미셸을 꼭 초절정 부호의 딸로 그려야 했을까 싶다. 아이가 만약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그래서 손쉽게 1인 교사를 채용할 수 없을 정도의 환경이었다면 어땠을까. 공적 기관에서 아이가 ‘기적처럼’ 오감을 되찾는 얘기였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되면 혹시 그림이 ‘구질구질’해진다고 생각했을까. 오히려 초호화 저택이 나오는 미셸의 집이 오히려 살짝 거부감이 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잘사는 장애인의 인간승리 얘기보다 어려운 환경의 장애인이 삶을 극복해 가는 드라마가 훨씬 더 감동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