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한 만큼 비판하고 꾸짖은 만큼 희망주기

글_신정수(시민문화네트워크티팟)

사람들은 선량한 걱정을 가지고, 세계를 위해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한다

2005년 8월 19일에서 20일로 넘어가는 하룻밤에 있었던 일이다. 밤새 더위가 푹 숨이 죽어 아침 기온은 섭씨 19도. 갑자기 썰렁해진 새벽 출근길에 감기를 얻은 사람이 제법 많을 것이다. 버스 정류장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라디오에서도 사람들은 모두 날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제까진 한국이 아열대 기후로 변해, 종로에 사과나무가 아닌 바나나 나무를 심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다가, 혹시 계절이 한 달씩 앞으로 당겨진 것은 아닌지 의심도 해본다. 이런 갑작스런 날씨 변화가 지구환경이 처한 위기의 징후는 아닐까? 엘니뇨같이 지구가 통증을 호소하며 크게 몸을 뒤척이는 병에 걸린 것은 아닌가? 관계성을 깨닫고 사는 사람들 중에는 주변을 염려하고 보살피는 선량한 걱정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허나 이런 지구적인 징후에는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에서 실천하라(Think Globally, Act Locally) ’라는 강령이 아직도 유효한 것일까 의문이 들 정도로 작은 실천이 무모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어니 젤린스키의 <모르고 사는 즐거움>이라는 책에는 걱정에 관해 이러한 충고가 있다. “걱정의 40퍼센트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는다. 걱정의 30퍼센트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다. 22퍼센트는 사소한 고민이고 4퍼센트는 우리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한 것이다. 걱정의 4퍼센트만이 우리가 바꿔놓을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4퍼센트라는 것은 행성을 구하는 문제도, 주변의 삶의 위기를 구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수치적인 힌트일지 모르겠다. 우리는 선량한 걱정에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모색한다. 사람들은 세계를 위해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한다. 세계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주변의 세계부터 촘촘히 변화를 조직해가야 한다. 걱정은 변화를 일으키는 시작의 감정이다.

이런 고민을 가지고 매일이 복날같이 더웠던 때에, 지역문화네트워크의 김기봉 상임대표, 공공문화개발센터 유알아트(URART)의 김영현 대표, 시민문화네트워크 티팟의 전효관 대표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역, 지역 문화예술교육, 지역 통신원. 이 세 개의 키워드를 퍼즐처럼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추며, 나, 우리의 세계를 위한 걱정을 키워드로 이야기를 엮어 보았다.

경제 성장통, 지역 문화 디스크의 치료법을 찾아서

일간지에 여성 특집섹션이 나왔다. 그 중에 6-70년대에 ‘일당 70원, 한 달 월급 3000원. 허연 깍두기에 간장, 눈물밥 먹어가며’ 일을 했던 여공과 버스안내양에 관한 기사가 눈에 띈다. ‘대부분이 농촌 출신의 상경 소녀’였던 이들은 집안을 위해 괴물같은 공장 기계 소리를 참으며, 인권을 모독하는 몸수색을 참아가며 일을 한다.(중앙일보, 2005년 8월 18일자. “우리는 산업역군, 여공과 버스 안내양”) 이들이 산업역군으로 일하며 한국경제는 빠른 속도로 압축 성장했지만, 한국의 지역 경제와 문화는 ‘지역 간의 문화/경제 불균형’이라는 디스크에 걸리게 된다.

김기봉 상임대표에 따르면 지역 간의 문화 불균형 현상은 단순히 문화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경제가 압축성장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낸 성장통의 부정적 결과이다. 한국의 인구 분포가 ‘도시<농촌’에서, ‘도시>농촌’으로 급속하게 재편되는 과정에서, 일부 사람들은 도시로 이주하여 성공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주변인으로 전락하면서 한국 사회는 지도상으로, 도로교통상으로, 정신상으로 서울, 도시, 중심 지향성을 갖게 되었다. “지역공동체를 상징하던 문화들은 ‘미신’이나, ‘구닥다리’의 누명을 쓰고, 고물상에 팔려가거나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TV와 라디오를 타고 대중문화가 대치되었습니다. 지역 내에서는 단시간 내에 급속한 문화적 단절을 경험했기 때문에, 지역 문화를 어떻게 복구, 복원할 것인가는 많은 고민이 필요한 과제이지요. 지역문화 활동가들은 지역 공동체의 자연스러운 문화적 질서와 특질을 회복하여 균질적인 문화적 삶이 이루어지도록, 함께 일할 사람을 찾고, 정책적 뒷받침이 이루어지도록 호소하고, 인프라를 확보하는 등 일인다역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 문화는 여기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 단계에 있고요.”

문화예술교육은 지역에서의 삶을 재구성하는 ‘매개’가 되어야 한다.

밀머리 미술학교의 프로젝트들이 떠오른다. 프로젝트들은 지역(공동체) 내의 문제를 ‘진단’하고, ‘소통’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 중심의 문화예술교육이다. 농촌 지역 환경 내에서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교우관계, 진로, 진학, 창작적 욕구 등의 고민을 프로젝트를 통해 하나하나 자연스럽게 이야깃거리로 삼는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아이들은 이 과정에서 지역의 현실을 파악하고 인정해 자신의 삶의 소망과 화해시키며 ‘그래서 어떻게 하지?’를 고민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문화예술교육을 통한 지역의 소통과 현상을 진단하는 일은 지역 문화의 새로운 시작점에서 ‘단단한 기초공사’ 역할을 기대해볼 수 있다. 급속히 중심이 무너진 지역 문화와 소통 체계를 회복하는 가장 바른 길은 천천히, 단단히, 과정을 중시하며 가는 길이다.

지역 문화예술교육이 부지런히 기초공사를 하는 동안, 지역통신원들은 이러한 문화예술교육의 과정을 꼼꼼하고 면밀하게 ‘자료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기존의 사례들을 모니터링하면서, 좋은 사례들의 중요한 포인트를 짚어내고, 주변 환경과의 작용을 분석하면서 다음의 프로그램을 설계할 때 도움이 되도록 하는 역할이다. 지역의 현실에 대한 걱정은 한편에서는 문화예술교육을 통한 문제 해결을 위한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지역통신원과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관계로 이어진다.

“지역의 삶을 재구성하는 매개”

전효관 대표는 지역에서 문화예술교육은 ‘목적’이 아니라, 지역에서의 삶을 재구성하는 ‘매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역 내에서는 통합적인 사회적 학습망을 구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현실에서 사회적, 문화적 빈곤상태가 사람들의 자기 발견과 자기표현을 억제하고 있고, 나아가 정서적인 충전과 재생산에 위기를 초래하고 있기 때문에 개개인의 움직임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이죠. 특히 경제력의 격차에 의해 빚어진 문화, 교육적 환경의 문제는 공공적인 영역에서 새로운 과제를 지시하고 있습니다. 지역의 현실을 살펴보면, 지역에서 통합적인 문제 해결망을 짜는 일을 수행할 단위는 지역의 공부방, 문화관련 시설, 혹은 생협같은 조직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의 자발성을 통해 새로운 체계를 짜 나가는 것이에요. 이러한 흐름을 해치지 않고 지원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책은 무엇일까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상호학습과 상호 관계의 체계를 만들기 위한 기획과 자발적 흐름을 통해 새로운 마을을 구성하는 과제를 잘 엮어내는 것이 아주 중요할 것입니다.

유알아트의 김영현 대표와의 대화에서는 문화적으로 열악한 지역에서 왜 문화예술교육이 더 필요한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유알아트는 서울 대학로 뒤편에 있는 낙산공원을 올라가는 사람들과 함께 오색 돌맹이 쌓기를 하는 등 사람들이 행위를 통해 예술적 체험을 하고, 창조자가 되면서 문화의 주체가 되는 과정을 경험하는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단체이다. 문화예술교육은 문화 생산과 향유 행위와 거리가 있던 사람들이 스스로 문화에 접근하는 자기 방식을 찾으면서, 지역에서는 문화적 가능성을 만들어 가는 존재가 되도록 한다. 지역에서 이러한 프로그램이 설계될 때는, 지역민이 문화 주체가 되는 과정을 설계하고 여기서 얻어진 경험이 지역 내에서 일상적으로 유지되고, 발전되도록 어떤 것들을 담보해낼 것인가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김대표는 지역에서의 문화예술교육은 자생적인 것들을 우선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자생성이라는 것은 지역민에 기반하고 있고, 지역에서의 문화예술교육은 지역민에게 어떤 문화적 욕구가 있는지를 수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역민의 문화적 욕구를 수렴하는 것은 기초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일이지만, 까다로운 작업입니다. 그래서 지역 현장에서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동안 사람들이 문화예술교육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가, 스스로 활동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면서 참여하고 있는가 하는 ‘참가자 피드백’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하지요. 이는 문화예술교육이 지역에서의 일상적 문화행위와는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문화예술교육적인가’하는 점을 정리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저는 종종 지역의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들이 ‘무엇으로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하는 문화예술교육 매뉴얼과 철학들이 정립되지 않아서 고민하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고, 스스로 자기 반성을 통해 대안만들기를 하는 과정도 보았습니다. 많은 단체들이 지역에서 하던 자기 영역의 활동들을 ‘문화예술교육’과 만나게 하고, 내용과 틀을 전환시키고, 발전시키는 데에는 굉장히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지요. 많은 곳에서 문화예술교육으로 눈을 돌리는 것은 일면 긍정적이지만, 그 과정에 단지 ‘기획서 상의 전환’이라든가, ‘제목만 문화예술교육’의 함정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 결과는 오늘 내일 판단할 수 있을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김대표와 나는 지금은 많은 이들이 막 이제 그 영역 속으로 발을 내딛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무슨 일이든 ‘2년차’에서는, 초보의 티를 벗고 ‘시행착오’를 줄이고 ‘대안’을 항상 마련해 두는 것을 염두에 두며 일을 하는 단계에 이른다. ‘문화예술교육 정책사업 원년의 해’였던 지난해에는 문화예술교육의 의미를 사회적으로 확산하는데 주력하는 사업들을 중심으로 했고, 올해에는 지역에서의 문화예술교육, 학교 문화예술교육, 사회 문화예술교육, 문예회관을 통한 문화예술교육 등 문화예술교육 지원 시스템들이 양적으로 팽창하면서 구축되고 있다. 2년차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 때 나타나는 문제점을 예측하고 대안을 마련하며, 자기 성장을 모색해야 한다. 이때는 적절한 칭찬도 중요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쓴소리가 성장에는 더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문화예술교육을 통한 지역의 소통과 현상을 진단하는 일은
지역 문화의 새로운 시작점에서 단단한 기초 공사 역할을 기대하게 한다.

어린아이에게는 균형잡힌 이유식, 문화예술교육에는 균형있는 쓴소리와 단소리

앞서서 지역문화예술교육과 지역통신원은 악어와 악어새같은 공존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적었다. 이는 현장의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의미 있는 모니터링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에만 그 관계가 성립될 것이다. 생각해보자. 혹시 동물원에서 너무 많은 사탕을 던져서 이를 썩게 하는 관객 같은 관계는 아니었는지. 아니면 ‘왕비님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십니다!’라고 말하는 백설공주에 나오는 거울같은 관계는 아니었는지. 정확하게 대상을 바라보는 것은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를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초록색이라고 선을 긋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무지개에 대해서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무지개의 생성 이유, 무지개가 생기는 조건과 환경, 무지개에 대한 사람들의 선망과 해석하는 의미 등을 파악해야 한다.

김영현 대표는 지역통신원이 문화예술교육 현장에 관해서 글을 쓰기 위해서는 모니터로서의 역할과 현장의 깊이를 이해하는 평가자, 비평가의 역할을 구분해달라고 부탁한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을 자기 시야로 재단해서 섣불리 평론적인 글을 쓰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취재 대상마다 통신원이 가지고 있는 이해도가 다를 것이고, 그에 따라 어느 수위의 글을 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테지요. 진행자의 관점에서 프로그램을 고민하고, 현장을 이해하지 않으면 그들을 뛰어넘는 평가할 시각이 나오지 않습니다. 프로그램의 단계적 목표, 준비과정, 진행과정, 정리과정을 쭉 이해해지 않고 단면으로 평가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현장에서 자신들의 활동을 소개한 기사를 보았을 때, ‘아! 그렇구나!’하고 시사하는 문제 지적이 가능하려면 진행과정, 참여자들의 반응을 보여주는 거울 역할에 충실하거나, 현장에 아주 깊게 들어가야 합니다.” 문화인류학에서는 현장에 깊이 들어가서, 그들처럼 행동하면서, 그들의 문화의 맥락과 의미를 파악하는 참여관찰법을 훈련시킨다. 이때에는 그들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그들이 되지 않아서도 안 되는 시선의 ‘거리두기’ 문제가 있다. 하지만 완전히 그들이 되어본 이후에 그들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을 갖게 된다. 그래서 김영현 대표는 지역통신원의 역할을 모니터링하는 것과 비평가의 역할을 적절히 구분하고, 1차적 목표는 모니터링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객관적 사실 전달을 글의 중심에 놓고, 판단은 독자들의 몫으로 놓도록 당부하는 이유는 문화예술교육이 우리 사회 전반에서 ‘시도’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에는 문화예술교육의 내용과 시스템을 성급히 평가하고 결론내기 보다는 성과와 잠재적 효과를 주목하고, 격려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고 말한다. 필자가 현장을 바라본 감상과 평가보다 현장의 구체적인 노하우를 ‘정보화’하는 글에 충실할 경우, 독자들이 반응하거나 개입할 여지가 많아져 지역통신원 기사에 리플이 더욱 활발히 달리지 않겠냐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에 김기봉 대표는 아르떼 지역통신원 기사에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동적입니다’라는 말 외에 내용에 대한 지적이 적은 이유는 쟁점을 만들어 ‘쌈박질’을 시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의견을 내민다. 문화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나눌수록 더 커지도록 하는 디지털적 속성을 지닌 것인데, 독자 없는 문학, 관객 없는 공연, 관람자 없는 전시회, 주민 없는 축제를 생각할 수 없듯이 지역통신원 기사도 이야기거리를 계속 소통시키는 글이어야 한다고 한다. 김대표는 그런 점에서 지역통신원은 작가나 예술가, 관객, 기획자, 평론가의 입장을 넘나들어야 한다고 보며, 그것을 ‘전방위적이고 입체적인 관점’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말한다.

지역통신원들은 현장의 울림과 떨림을 오롯이 담아내는 동시에 좋은 사례들의
중요한 포인트를 짚어내면서 지역 문화예술교육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두 마리의 토끼 사이에서

이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은 어렵다. 두 분의 상반된 의견을 들으면서, 경기문화재단에서 실시하고 있는 문화예술 모니터링 제도를 떠올리게 되었다. 2년이 넘어서면서 제도적으로도, 생산되는 내용도 안정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이 모니터링 제도는 ‘문예비평’과 ‘시민모니터링’으로 나뉜다. 시민들은 향유자의 입장에 충실해서 문화예술교육, 공연 프로그램 등을 비평하고, 문예비평을 담당한 사람들은 깊이 있는 전문적인 시각으로 프로그램들에 대해 발언한다. 아르떼 지역통신원도 각 통신원이 자기 입장에서 충실한 이야기를 할 때 결국 더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방향으로 입장별로 발언의 위치를 구분해보거나, 과도기적으로 지역통신원들이 상호 모니터링하거나, 이들의 글에 의견을 주는 코멘터리 그룹을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역통신원제가 지역의 움직임과 어떻게 연관이 되면서 긍정적인 작용을 만들어 낼 것인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먼저 필요할 것이다. 이에 대해 전효관 대표는 지역통신원제가 어떤 지향으로 수렴되는지 읽히지 않는다고 꼬집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아름다운 문화예술교육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 현실의 문제를 읽고 고민을 드러내어 주체를 만들어 가는 실천이라며, 개별 통신원의 분발이 제 효과를 발휘하도록 아르떼 자체에서 지역통신원제의 역할과 방향을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지역과 사람, 주변에 대한 걱정으로 부지런한 움직임

지역통신원들은 취재를 하는 동안, 지역의 문화예술교육의 흐름을 꿰고 있는 걸어다니는 네트워커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벌이 이 꽃과 저 꽃의 결합을 돕듯이 지역통신원도 지역의 정보를 유통시키고 있다. 지역통신원은 사람들의 반응과 의미를 충실히 읽어주고 그것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칭찬한 만큼 비판하기, 꾸짖은 만큼 희망을 주기’를 균형있게 해야 한다. 이것이 진행 중인 문화예술교육의 대안 만들기를 위한 한 과정일 것이다. 지역에서 변형, 진화하는 문화예술교육들의 차이점과 방향성을 현상으로 짚어주는 것, 체크하고 이야기해주는 것, 이것이 열악한 문화예술교육의 저변을 확충해나가는 과정에 꼭 필요한 일이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 둘은 비슷한 질문으로 보이지만, 미세하게 다르다. 앞의 것은 목적을 질문하는 것에 가깝고, 뒤의 것은 과정상의 의미를 질문하는 것에 가깝다. 사람들은 돈과 경제를 삶의 고민으로 안고 있기도 하지만, 더러는 나의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문화예술교육은 문화적 권리이자, 당연한 학습권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그 당연함을 비웃는 장애물과 극복해야할 과제가 많다. 선량한 걱정이 많은 사람들, 그리고 크고 작은 에너지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 내는 4퍼센트의 변화, 달팽이처럼 천천히 꼼꼼히 가지만, 후에는 빛보다 빛날 것이다.

신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