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문화재단과 중앙방송이 공동 제작한 “이것이 미래 교육이다” 시리즈 중 올 초 우연한 기회에 ‘영국 슈타이너 학교’와 ‘톨스토이 학교’편을 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쉽사리 자극도 감동도 얻기 힘들어진 관성화된 일상 속에서, 기존 교육 패러다임을 바꾸는 철학적 기반 그리고 이 철학을 몸으로 구체화하는, 영성 넘치는 교사들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던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12월 4일부터 3주 동안 매주 토요일 “이것이 미래 교육이다” 시리즈를 매개로 경기문화재단이 토요문화사랑방의 이야기상을 차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해외 대안 교육사례를 담은 영상들을 관련 이야기 손님들과 함께 보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방의 첫 이야기 주제는 ‘사랑과 치유의 교육 공동체-태국 ’무반텍‘학교-’ 이야기였다. 아침부터 강풍을 동반한 빗줄기를 뚫고 사랑방에 모여든 사람들은 지금의 황폐화된 한국 교육 현장에서 대안의 작은 싹들을 찾아보고 되돌아보려는 대안학교 교사들과 학부모들. 수원에 거주하는 한 학부모는 사실 자신의 아이가 반장에게 몇 십대씩 손바닥을 맞고 돌아와도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는 무기력한 한국 상황에서 해외 잘나가는(?) 학교 사례가 무슨 울림이 있을까 의구심이 들어 계속 망설이다 결국 발걸음을 디뎠다고도 하신다. 어쩌면 한편의 깔끔하게 만들어진 영상보다는 이것을 매개로 우리의 현재를 재구성해보는 이야기 과정이 더 중요하겠다는 생각으로 영상을 주시해 본다.
새로운 생명력으로 버림받은 밭을 갈다
영상은 태국 칸차나부리 지역을 흐르는 콰이강의 진녹색 물결, 그 물결 위의 선로를 미끌어지듯 달리는 기차의 느린 움직임에서 시작한다. 태국과 미얀마 국경 지대를 흐르는 콰이강변. 힘겨운 삶 속으로 버려진 난민 아이들이 사랑과 치유의 공동체 자치를 이루며 살고 있는 무반덱 학교가 둥지를 튼 곳이다. 가정에서 학대받거나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던 아이, 몸과 마음에 장애를 가진 태국 사회 최하층 빈민 출신의 아이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스스로의 힘으로 미래의 삶을 엮어나가는 일상들이 화면 가득 담긴다.
4-6세 아이들 140여명이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 무반덱의 아침은 맨발로 흙을 밟으며 놀이처럼 이루어지는 농장 일로 시작한다. 원래 이곳의 땅은 농경지로서 생명이 다하여 버림받은 땅이라 하는데, 역설적으로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에 의해 새로운 생명의 땅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한다. 직접 땅을 밟는 행위 외에도 한국식으로 치자면 원두막 같은 곳에서 시원한 대나무 자리 위에 눈을 감고 아이들은 땅과 호흡하는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부모와 사회로부터 버림받으면서 생긴 내면의 상처는 자주 공격적인 행위 등으로 표출되는데, 아이들은 자연과 함께 하는 명상 시간들을 통해 스스로를 다스리고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자기 치유능력을 키워나간다.
상처를 치유하며 삶을 설계한다
무반덱에서는 이렇게 자기 치유능력을 키우는 것과 함께 미래의 자기 삶을 설계하고 조직하는 데 필요한 것들도 함께 익힌다. 오전에 진행되는 기초수업들(영어, 태국어, 수학 등)은 최대한 아이들의 수업 참여의 자율성을 보장한다. 화면 속에서 한 아이는 기초수업 시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린다. 영어수업이 지겹고 학습동기를 느끼지 못하는 이 아이는 바깥으로 슬며시 사라져 주변의 무대 설치를 만지고 배우는 작업에서 자기 가능성을 다르게 찾아간다. 교사들은 교실의 환경과 아이의 관심을 살피며 거리를 두고 주시하면서 아이가 스스로 동기를 찾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그의 선택을 존중한다.
오후에는 근처의 약초를 채집하며 효능을 익히는 생활의학 수업을 하거나 직조공예나 농장 수업 등을 통해 사회적응 능력을 길러간다. 특히 예술수업들은 치유적 능력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작업에 집중하기까지 2년이 걸리는 아이들이지만 미술수업에서 자신에게 잠재된 능력을 서서히 자각하면서 치유과정을 느끼기도 하고, 1:1 밀도 있는 도제식 수업으로 진행되는 전통악기 수업을 통해 정서적 안정을 찾고 내면의 창조성을 끌어낸다.
내게는 여러 다양한 수업 장면들 못지않게 오후 물놀이 장면이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언뜻 보면 교육이랄 것도 없을 것 같지만, 모든 근심을 잊고 물 속에 첨벙첨벙 뛰어드는 아이들에게, 흐르는 물은 버림받고 학대받으며 생긴 상처들과 불안한 정서를 씻어주는 나아가 자연의 생물체를 이해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함께 이끌어주는 아주 훌륭한 교육의 장이다. 무반덱이 굳이 강변에 보금자리를 튼 것도 자연과 사랑의 놀라운 치유력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교육개혁의 흐름에서 탄생한 무반덱, 서구와 동양사상을 융합하다
무반덱 공동체의 탄생은 1979년 교육개혁의 흐름에서 얘기할 수 있다. 권위주의 교육의 성격이 강한 태국 사회에서, 교육운동의 경험을 함께 한 돈챠이 부부가 소외계층 아이들의 교육 공동체 무반덱의 산파 역할을 했다. 이 곳이 해외 대안교육 관계자들에게서 특히 주목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서구사상과 동양 전통의 불교사상을 융합한 철학적 배경과 실천에 있다. 애초 영국의 A.S 니일에 의해 만들어진 자유로운 학교 ‘썸머힐’을 모델로 하다가, 5년 정도의 시행착오 끝에 서구 사상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을 지양하고 태국 전통의 불교사상을 융합하여 자기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한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환경 요인의 결정성, 과거로부터 연결되어 있는 현재의 문제들, 성장 환경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통해 인간의 선한 면을 저해하는 악한 환경을 개선해 나가려 한다.
무반덱의 아이들은 스스로의 자율에 기반한 자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개인의 자유가 충돌하며 발생하는 갈등을 상호존중과 민주적 합의 과정으로 해결하는 법을 배운다. 매달 한번씩 열리는 “학교 평의회” 모습도 영상을 통해 슬쩍 보게 되었는데, 동등한 구성체로 서로 간에 의견을 맞춰가는 과정이 꽤 진지하게 펼쳐진다. 예를 들어 폭행사건이 발생했던 경우, 폭행이 아니라 장난친 것이라 주장하는 가해자와 폭행을 입었다는 피해자의 의견을 함께 듣고 누군가 벌칙으로 제안한 ‘과자 후식 5일 정지’와 ‘장난이었다는데 한번 봐주자’라는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뉘어지다가 결국 ‘과자 후식 5일 정지’ 벌칙이 다수결로 정해졌다. 다수결이긴 하되, 소수의 의견을 묵살하지 않고 반영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140여명의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다 보니, 일종의 선후배 관계처럼 연령을 반영한 위계구조가 있을 것이고 갈등은 항상 잠복해 있겠지만, 개인의 자유를 공동체의 가치와 조율해 나가는 자치능력 키우기 교육은 무반덱 생활공동체 학교에서 매우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함께 밥먹고 움직이고 토론하고 배움을 나누는 길고도 느린 하루를 마감하며 교감선생님은 아이들의 성장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아이들에 맞게 서로 다른 학습계획서를 파일로 정성껏 마련한다. 미학과 윤리학이 조화롭게 결합된 상태에 이르기 위해 교사는 수업을 준비하면서 명상에 잠겨 고요히 눈을 감는다. 아이들과 정신적 교감을 이루기 위한 교사의 섬세함은 태국의 자연과 기후를 닮아 천천히 흐르는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덕목이다.
국경지대에 피는 사랑과 치유의 공동체 꽃, 무반덱 학교는 독립성과 자치를 유지하기 위해 태국 정부로부터의 재정 지원은 전혀 받지 않고 농장일, 공예품 제작 판매, 게스트 하우스 운영 등 자체 운영수익과 해외 지원을 통해 운영되고 있다. 사회교육개혁의 중심점으로서 어린이 마을학교 무반덱의 힘은 또 다른 대안교육, 대안 커뮤니티의 씨앗과 싹들이 퍼져나가 자라도록 자극하는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무반덱에서 갈라져 나온 반토판은 ‘꿈을 직조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30여명이 함께 이룬 작은 가족 공동체이다. 생태에 기반하여 생활디자인 프로그램을 꿈꾸는 네트워크 센터로서 위스프링씨드의 모색도 이러한 움직임의 연속선에서 볼 수 있다.
영상이 끝나고 하자 글로벌 프로젝트로 무반덱을 다녀왔던 양상(양선미)과 하야시(김태준)의 짤막한 이야기들과 질의응답이 이어진다. 오고가는 이야기와 연결되면서 내 머리 속에는 오버랩되는 장면들이 들어찬다. 동남아시아 극빈층의 소외받고 버려지고 학대받는 아이들이 예전에는 버려졌던 땅을 일구며 새로운 공동체 삶을 짜나가면서 내면의 상처를 자연과 함께 치유하며 내일의 아침을 맞는 동안, 한국의 아이들은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집-학교-학원을 반복적으로 오가며 내면의 상처를 키워가고 있는 상황들…
스스로의 상처를 자기 치유하고 미래의 삶을 함께 풍요롭게 설계해 나가는 교육의 가치와 힘을 나누기 위해, 아시아 그 여윈 그러나 단단한 손을 잡는 건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 사진 제공 :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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