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사회문화예술교육의 현장을 가다②> 새터민 청소년을 위한 문화예술교육 – ‘셋넷학교’를 가다

1995년 12월에 처음 문을 연 셋넷 학교는의 지난 이야기와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본다.

학교라는 이름이 조금 무색하게도, <셋넷학교>는 다세대 주택 7층에 자리 잡고 있다. 조그만 방이 네 개, 화장실과 부엌이 붙은 거실이 하나. 전형적인 한국의 가족이 살고 있을 법한 이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18명의 ‘새터민’ 학생들과 네 명의 상주교사, 그리고 60여명의 자원봉사 교사들이다. 사실, 드나드는 사람 수에 비해서 공간은 턱없이 비좁지만, 이나마도 학교 교장의 지인이 빌려준 돈으로 어렵사리 만든 공간이다.

셋넷 학교는 1995년 12월에 처음 문을 열었다. 잘나가는 증권회사의, 유능한 직원이었던 이 학교의 교장 박상영씨. 그가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사회 부적응 청소년을 위한 주말문화학교인 <따또학교>를 만든 것이 셋넷학교의 개교를 위한 첫 걸음이었다. 이 문화학교는 <난나학교> 라는 이름의 비인가 문화대안학교로 발전하였고, 2002년에 이르러서는 처음으로 탈북청소년을 위한 문화적응주말학교 <셋넷교실>이 열렸다. 이어 교회의 지원으로 출발한 <똘배학교>를 거쳐 지금의 <셋넷학교>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즉,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관심으로 출발한 여러 학교들이 변형과 진화를 거쳐 현재의 탈북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공동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명상의 시간. 박상영 교장 선생이 음악을 틀어놓고 책을 읽어주고 있다.

<셋넷학교>의 젊은 교장선생인 박상영씨는 점심시간이 지나고 수업시간이 되자, 아이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열다섯 명의 학생들은 하나 둘 모이더니, 거실에 편하게 자리를 잡는다. 학생들의 얼굴에서 ‘지겨운 수업’에 대한 거부반응이나 피곤함은 찾을 수가 없었다. 대게 입시교육에 지친 한국 학생들의 교실 풍경을 생각해 보았을 때, 유달리 쾌활하고 즐거워 보이는 학생들의 모습은, 그들이 조금은 소심하고 폐쇄적일 것이라는 나의 선입견을 보기 좋게 깨뜨려 주었다.

박상영 교장은 ‘여느 선생님처럼 권위 있게’ 혹은 ‘폼 좀 나게’ 혹은 ‘그럴싸하게’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어찌 보면 오해를 살 수 있을 정도로, 거침없는 입담을 가진 사람이었다. “작년하고 올해 변산이랑 강원도에 가서 신나게 놀았잖아? 그럼, 돈이 들었을 거 아니야?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왔을 것 같아? 저기 있는 분들이 소속된 단체에서 지원해 준거거든. 니네 똑바로 가르치고 있는지 ‘확인’할 겸 취재 온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돼. 알겠지? 다, 디비져!” 말이 끝나자, 학생들은 꺄르르 웃더니, 거실에 대자로 ‘디비지기’ 시작했다. 정말 편안하게. 박상영씨는 카세트 라디오를 통해, 안치환의 ‘당당하게’를 튼다. 그리고는 명상집을 읽기 시작했다. 약 5분간의 명상의 시간, 이 짧은 시간 동안 학생들은 식후의 노곤함을 달콤하게 푸는 듯 했다. 그리고 힘차게 오후의 수업을 시작했다.

이 학교에서 진행한 오후의 수업은, 일반적인 정규교과 위주의 수업을 받으며 자랐던 나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다. <라디오 프로그램 직접 만들기>와 <도예 실습>. 일반적인 남한의 청소년들이 받는 수업교과는 차이가 분명히 있다. 왜 그들은 이런 수업을 받는 것일까?

새터민 청소년들의 <기나긴 여정>

이 학교의 학생 중 열아홉 살의 한 여학생은 <기나긴 여정>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자신의 탈북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영화의 연출자이자 주인공인 양 미 양은 열 두 살의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간 부모와 생이별을 경험한다. 부모는 ‘살아남기 위해’ 중국에서 불법 체류자가 되고, 양 미 양은 어린 나이에 고향에 홀로 남겨진다. 그녀의 고백에 의하면, 그것은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단다. 지인의 도움으로 부모를 찾아 혼자 두만강을 넘은 그녀는, 두만강의 국경도시인 훈춘시, 양돈장 우사의 골방에서 고생에 절어 있는 부모를 만나게 된다. 어린 소녀는 사람들 눈을 피해 낮에는 골방에 틀어박히고, 밤에는 곤한 부모의 사랑을 갈구 한다. 부모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는 것이 그녀의 고백이다. 하지만, 불법체류 탈북자에게 평화로운 삶이란 지난한 것이다. 그들의 가족은 중국의 공안과 북한 경찰에 의해 네 번이나 체포되는 수난을 겪는다. 체포되고, 뇌물을 주고, 풀려나는 쳇바퀴의 반복이다. 계속되는 은신과 붙잡힘 그리고 석방. 그 때마다 가족 모두가 생이별을 겪고, 그 때 마다 거처를 옮겨야했던 기막힌 사연들이 28분의 짧은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도예실습 중인 학생들. 저마다 각자 집중하고 있는 모습들이 재미있다.

몇 년의 험난한 인생살이 끝에, 남한으로 오는 티켓을 살 수 있는 돈을 마련한 그녀의 가족은, 이번에는 목숨을 건 남한 입국을 시도한다. 여기서 성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그녀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2002년, 그녀의 가족은 남한 입국에 성공한다. 하지만, 열다섯 살의 나이로 남한에 오게 되기까지 그녀에게는 교육도, 친구도, 안락한 가정도 없었다. 매일 하루하루를 불안 속에서, 가난 속에서, 외로움 속에서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이 사연은 그녀만의 특별한 것일까? 놀랍게도 이 사연은 학교 교실(집의 거실)에 모여 있는 다른 학생들에게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오후 수업을 참관하는 동안, 연신 웃는 그들의 밝은 얼굴에 묘한 감상에 젖었다.

다시 찾은 <셋넷학교> – 박상영 교장 인터뷰

4일 후, 나는 다시 학교에 찾아갔다. 내 얼굴을 알아보고 제법 많은 학생들이 인사를 건네고, 어떤 학생은 녹차를 가져다주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첫날 보았던 피상적인 인상에 대해 교장인 박상영씨에게 보다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고자 교무실로 향했다. 그를 통해 듣는 여러 이야기가 새터민 청소년의 어제, 오늘, 내일을 이해하는 데에 좋은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고, 또한 새터민 청소년들에게 문화예술교육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도 보다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그날 진행된 박상영씨와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아르떼진:  탈북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동기에 대해서 듣고 싶은데요?

박상영:  제가 처음부터 특별히 통일 운동이나 새터민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니던 증권회사를 그만두고 92년부터 N.G.O.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일을 먼저 시작했어요. 93년에 들어서자 대안교육에 대한 논의가 사회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때 뜻한 바가 생겨, <따로 또 학교>라는 주말문화학교를 열었죠. 화두는 커뮤니케이션이었어요. 제도와 사회에 소통을 잘 하지 못하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었죠. 탈북청소년들을 처음 접한 것은 2002년이었어요. 탈북학교의 초청을 받아 새터민 청소년들을 접하게 됐는데, 그 때 느낀 것이 많았죠. 이 학생들에게는 남한이 처음에는 파라다이스거든요. 근데 실제로 지내보니 그게 아닌 거예요. 뭔가 풍족해지긴 했는데, 완전히 다른 ‘외국’에서 적응하고 사는 것이 불행하더라 이거죠. 글쎄, 뭐랄까 특별한 이유라기보다는,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고, 기회가 생겨서 <똘배학교>라는 탈북자 청소년 대상의 학교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탈북학생들에게 선생님들의 가치관을 일방적으로 주입시킬까봐 굉장히 조심했어요. 제가 생각한 학교의 참모습은 학생들 스스로 자치할 수 있는 능력을 교육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지원을 받은 <똘배학교>를 운영하면서 고민이 많았어요. 아무래도, 기독교적인 사상을 자꾸 요구하니까 그런 점들이 일방적인 교육의 방식이 되는 것 같아서 고민이 많았죠. 결국은 종교를 배제한 지금의 <셋넷학교>를 2004년에 개교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뷰 중인 박상영 교장

아르떼진: 보통의 중 고등 교과과정을 가르치는 타 새터민 청소년 학교에 비해서 다른 점이 많다고 알고 있는데, 이 학교의 특징이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박상영:  일단 가장 큰 차이점은 문화예술교육을 중시한다는 것에 있겠죠. 말씀하셨듯이 다른 학교들은 한국의 정규 교육 과정을 가르치는 학교가 대부분이예요. 그 학교의 학생들은 학습수준이 낮은 남한의 다른 학생들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되죠. 이곳도 마찬가지인데, 모든 탈북 청소년 학교들은 학생들을 검정고시에서 통과시키기 위한 정규교육 수업을 진행합니다. 검정고시에 합격하면, 일반 대학에 특별전형으로 입학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희 학교는 학생들에게 정작 중요한 것이 그런 입시를 위한 교육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들에게는 탈북과 남한 사회의 정착 과정에서 입은 내면의 개인적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감을 회복해서 스스로의 결정 능력과 사람과의 관계를 소통하는 훈련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이 국어, 수학은 아니잖아요? 인간관계를 맺는 법, 다양한 가치들을 체험하고 느끼는 것, 그리고 스스로의 인생을 설계하고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그런 점에서 문화예술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많은 커리큘럼을 예술교육이나 체험학습에 배치했습니다. 그래서 이 학교가 ‘노는 학교’ 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죠.

아르떼진:  문화예술교육의 의미나 성과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신다면?

박상영: 보통 새터민 청소년들은 (양 미 학생의 영화를 통해서도 보셨겠지만) 보통 10대 초반에 이미 고향땅을 떠나 중국에 가거나 동남아 등지를 떠돌게 됩니다. 이미 어린 나이에 일반적인 학교 교육은 못 받게 되는 거죠. 그리고 북한에 있을 때도 공부에만 몰두한 아이들은 거의 없어요. 학교에 가면 공부보다는 노동을 시킨다고 해요. 그야말로 먹고 살기 위해서요. 그게 참, 현실입니다. 여하튼, 탈북을 하여도, 이곳에 와서 정착하기까지, 대게 5~6년을 교육의 진공상태에서 보내게 됩니다. 거의 백지 상태에서 교육을 시작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한국의 검정고시를 감당할 능력이 훈련이 안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 아이들을 데려다가 교실에 모아놓고 억지로 주입을 시킨다고 효과가 있겠습니까? 절대 아니거든요. 일단 제일 중요한 건, 아까도 말했지만, 그 몇 년간 위험과 가난 속에서 얻었던 내적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감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리고 남한에 왔을 때도 엄청난 중압감을 받거든요. 그냥 딱 봐도, 남한의 아이들은 자기보다 덩치도 훨씬 크고 생각 자체도 다르죠. 거의 외계인 수준일 거예요. 여하튼, 이런 학생들에게는 많이 느끼고 체험하게 하는 것이 국어, 영어, 수학을 가르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학습능력은 스스로 뭔가를 참여하고 해결하는 것에서 나오니까요. 다른 학교가 10시간 공부시키면, 우리 학교는 다섯 시간은 놀게 합니다. 그래도, 검정고시를 보면 결과가 우리 학교가 더 낫죠. 거의 다 붙으니까요. 문화예술교육은 학생들에게 다양한 놀이거리를 제공하고 체험하게 합니다. 탈춤을 추면서 한국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하고,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게도 하고, 신문을 만들거나, 영화를 찍게도 해요. 보신 것처럼 도예를 체험한다거나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하죠. 이런 모든 과정들은 그들 스스로에게 자치할 수 있는 능력과 학습 효과를 주게 됩니다. 영어 수학 공부는 그런 것을 하지 못하죠.

아르떼진: 지금 셋넷 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는 프로그램 중 사회취약계층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으로 선정된 프로그램에 대해서 좀 소개해 주시겠어요?

박상영: 일단, 그런 프로그램을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학교처럼 문화예술교육을 중시하는 곳으로서는 굉장히 힘이 되는 지원사업입니다. 지원받은 프로그램은 문화 수용자에서 문화 생산자로서의 새터민 청소년을 키우기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즉, 학생들은 문화예술교육 수업을 통해 여러 가지 훈련을 받아요. 탈춤을 배우기도 하고, 도예를 배우기도 하고, 영상 프로그램이나, 연극을 만들기도 하죠. 그것을 수용자의 입장에서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또 다른 새터민 청소년을 대상으로 공연이나 캠프를 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학교에서의 몇 가지의 수업들과 방학을 이용한 공연이나 캠프에 지원 예산이 사용됩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수동적인 학생들은 적극적인 문화 전파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학생들이 그 공연이나 캠프를 너무나 즐겁게 준비하고 기다리죠. 학기동안에 배운 문화예술교육의 결산 놀이랄까… 학생들에게는 무척 의미 있는 시간들입니다.

아르떼진:  말씀을 들으니까, 교육사업을 진행하는데 있어 필요한 주체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협업을 해왔는지 궁금한데요?

박상영: 개인적으로는 회사를 그만둔 후, 교육운동과 문화운동을 했었어요. 대학로에서 뮤지컬이나 연극 연출을 했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대학로의 인맥이 생겼죠. 일단 협업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 즉 좋은 교육을 줄 수 있는 교사들이예요. 연극하는 사람, 춤추는 사람, 인형극, 마임이나, 영상 일을 하는 사람들… 등등 그 때의 인맥들이 또 다른 인맥을 형성해서 우리의 교육을 도와줍니다. 물론, 문화예술교육 뿐만 아니라 정규 교육과목의 선생님들 또한 모두가 무보수로 일하는 자원봉사자들이죠. 그들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협업의 대상이자 교육의 주체들이죠. 그리고 다른 중요한 주체들이라면, 이 학교를 지원해주는 고마우신 분들이 있어요. 이 학교는 다른 학교들과는 달리 종교단체나 큰 스폰서가 없기 때문에 운영이 불안정하죠. 하지만, 십시일반으로 조금씩 지원해 주시는 개미군단들이 있어요. 약 150여명의 후원회원들이 한달에 1~3만원씩 도와주시는 걸로 학교를 운영합니다. 정말 고마우신 분들이죠. 그 분들 또한 매우 중요한 분들이고요. 마지막으로는 진흥원이나 문화부와 같은 공공기관들이 중요한 파트너라고 할 수 있죠. 진흥원처럼 프로젝트를 지원해주는 단체들이 이 학교의 교육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공적인 지원은 안정성이 덜하다는 겁니다. 올해 제출한 기획안이 통과되어 지원을 받게 되면, 여건은 좋아지지만, 그 다음해는 보장 받을 수 없게 되죠. 그럼 오히려 살림의 규모를 키웠다가 나중에 타격을 받을 수 있어요. 커리큘럼이 축소되어서 바뀌어야 하죠. 교육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아르떼진:   학교를 운영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크게 보람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부분일까요?

박상영: (웃음) 이런 질문은 참 많이 받는데… 예를 들어 설명해 드리죠. 아이들이랑 바닷가로 MT를 갔어요. 그곳에서 운동회를 하면서 즐겁게 놀았죠. 그 날 밤에 민박집에 와서 저녁을 먹는데, 재밌었냐고 물어봤더니, 한 녀석이 말하길, 태어나서 제일 행복했어, 너무 행복해서 북한에 있는 동생이 생각났어, 그러면서 우는 겁니다. 그런 순간들이 있죠. 사실,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평범한 것인데, 이 학생들에게는 남다른 행복이 된다는 것, 그럴 때 자부심과 함께 오는 무거운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죠. 청소년 때 타지에서 타인의 부정적인 시선을 받았던 이 아이들은 굉장히 폐쇄적이고 의심이 많고, 상처 받은 상태로 이곳에 오게 됩니다. 우리의 임무는 행복한 기억, 인연, 즐거운 순간들을 만들어주는 것으로도 충분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도 있죠.


                     쉬는 시간. 인터넷을 하고 있는 학생들. 20여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기에는 비좁은 공간이다.

아르떼진: 끝으로, 앞으로 이 학교를 운영하는 데에 있어서 큰 계획이나 철학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박상영: 지금 주력하고 있는 것은 대안교과서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새터민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는 대안교과서를 만드는 것이죠. 예를 들어, 영어 공부를 하는 방식은 선생님에 따라서 다 틀려져요. 사실 남한의 교재들이 이 학생들이 보기에는 낯설고 어려운 방식이기도 하고요. 정규교육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어서 학생들이 남한의 교재를 따라오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교재를 만드는 것을 진행하고 있어요. 이 작업은 교수나 박사 등의 교육 전문가들이 자원으로 도와주고 계세요. 좋은 교육을 한다고 말만 떠드는 게 아니라, 행동을 하는 훌륭하신 분들이죠. 두 번째는 현실적인 고민인데, 학교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좁은 공간도 산타클로스가 1억이란 돈을 무이자로 빌려줘서 확보한 공간이예요. 다세대 건물이다 보니까 지금 여기서도 시끄럽다고 건물주와 갈등이 있는 상태예요. 이건 참 사실 난감한 문제죠. 시급하긴 한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은 없어. 또 다른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수밖엔 없죠. (웃음)

아르떼진: 저도, 이 학교를 둘러보면서 공간의 문제가 시급하다고 생각했는데요, 잘 해결이 되면 좋겠네요.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