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기 위한 잡종찬양론

 

사회, 외눈박이 괴물

 

주로 학교를 통한 제도적인 교육 체제가 오늘날 교육의 기초임은 분명하다. 정확하게 어떤 의미에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한국 교육을 강조하면서 본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하는 모양이다. 한국의 제도 교육이라고 하면, 단번에 ‘입시 위주의 사교육 과잉 팽창’을 떠올리면서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라고 다들 아우성이지 않은가. 오바마의 언명이 얼떨떨한 이유다. 혹시 오바마는 미국의 패권이 쇠퇴 일로를 걷는 가운데 그 대항마로서 동아시아가 급부상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동아시아 중에서도 반세기 전만 해도 열악하기 이를 데 없었던 한국이 오늘날 주목할 만한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한 원동력을 한국의 교육에서 찾은 것은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이공계 출신에 대한 홀대가 사회적인 문제가 될 정도인데도, 사실 한국이 일구어 놓은 첨단 고도과학기술의 성과는 놀랍다. 잘 알려진 대로 정보 산업의 최강국의 대열에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있고, 생명공학에서 물의를 일으킬 정도의 세계적인 성과, 세계 3위의 로봇 공학기술의 발달, 나노기술의 핵심인 탄소나노튜브의 개발에서 일구어낸 세계 최고의 성과 등만 해도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모든 성과가 한국 교육의 위업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은 왜 한국 교육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하는 걸까? 비단 최근에 크게 노출되면서 모두를 망연자실하게 만드는 학교 폭력의 문화 때문만은 아니리라. 다음 몇 가지 물음들이 모두의 뇌리를 적시고 있는 것 아닌가 한다. 설사 ‘과학기술 입국’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첨단 과학기술 분야에서 성과를 내고 경제 성장의 축을 강력하게 세워나간다 할지라도, 근본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 때문에 인간다운 삶이 사라지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또한 사회공동체적인 삶에서 주어지는 삶의 의미와 가치가 도외시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만약 세계 경제의 파국적인 흐름에 의해 한국의 경제가 나락에 빠지기라도 하면 그 열악한 상황을 버텨낼 수 있는 내면적‧정신적인 위력을 전혀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등의 회의에 찬 물음들이 뇌리를 적시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물음들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삶의 의미와 가치가 과연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성립하는가, 현실을 감안해 볼 때 그러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교육이 그저 학교나 학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욱 강력한 교육은 사회로부터 암암리에 몸 전체로 파고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교육이다. 좁게는 가정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가장 이른 교육에서부터, 넓게는 신문, 티브이, 인터넷, SNS 등의 매체들뿐만 아니라 도심의 거리나 교통 기관들에서 직접 주어지는 여러 자극에 의한 정치•경제적인 사회 교육에 이르기까지, 몸 깊숙이 파고드는 교육은 그야말로 교육의 바탕이다.

최대한 밀집된 도심에서는 무한경쟁의 톱니바퀴 속에서 엄청난 스트레스와 더불어 불안과 공포가 생활 감정의 기조를 이루고, 젊은 사람들을 찾기 어려운 ‘휑한’ 농촌에서는 전체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탈락한 삶이 아닌가 하는 소외와 절망이 생활 감정의 기조를 이룬다. 그 와중에 피라미드 위계에 의한 몇몇 소수의 성취감마저 그 바탕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없다. 자신과 타인의 삶의 근본을 무의식에서부터 망각해버리고 오로지 부와 권력을 향한 질주, 그야말로 시인 이상의, “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오.(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라는 <오감도>의 시구를 여지없이 입증해 주는 것 같다.
일컫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부와 권력을 순수한 본질적인 이상으로 삼는 ‘외눈박이 괴물’인 셈이다. 이 괴물이 버티고 서 있는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하이브리드, 잡종인 인간

 

하나의 대안으로 잡종으로서의 인간을 제시할 수 있다. ‘하이브리드 교육’ 즉 잡종을 길러 내는 교육이 요구되는 것이다.
‘잡종으로서의 인간’이라니, 오히려 인간의 본래의 의미와 가치를 포기한 끝에 생각해내 낸 개념인 것 같다. 잡종은 순수함의 대를 이어 온 순종과 대립한다. 순수함은 항상 본질적인 이상(理想)을 기준으로 삼는다. 화폐 중심의 자본주의의 지배력 속에서 이제 본질적인 이상은 부와 권력으로 전환했다. 잡종은 이러한 순수한 본질적인 이상을 아예 인정치 않는다. 말하자면, 잡종으로서의 인간은 그 어떤 기준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잡종은 여러 카드를 손에 쥐고 있다. 필요에 따라 때로는 부의 카드 혹은 권력의 카드를 내밀 수도 있고, 때로는 낭비의 카드 혹은 탈(脫)권력의 카드를 내밀 수도 있다. 혹은 심지어 때로는 희열의 카드를 내밀 수도 있고 냉소의 카드를 내밀 수도 있는가 하면, 순응의 카드를 내밀 수도 있고 저항의 카드를 내밀 수도 있다. 잡종은 그저 잡종일 뿐이라는 점에서 위력을 가진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함부로 파악할 수 없고 포획할 수는 더더욱 없는 것이 잡종이다. 언제든지 외부로부터 주어진 가치를 인수할 수도 있고 부정할 수도 있다. 잡종은 모든 가치를 역이용한다. 그런 까닭에, 남들이 보기에 잡종은 현명하게 보일 수도 있고 영악해 보일 수도 있다. 잡종은 항상 가로지른다. 잡종은 사회에서 덮어씌우는 위계의 틀을 역이용함으로써 구멍을 내고, 구멍을 냄으로써 역이용한다. 말하자면, 사회적 코드를 받아들여 역이용함으로써 탈사회적 코드를 만들어내고, 탈사회적 코드를 통해 사회적 코드를 역이용한다. 그래서 잡종은 위선을 통해 위악을, 위악을 통해 위선을 역이용한다.

 

잡종이 지닌 다채널적인 삶의 방식은 필연적인 본질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우연에 따른 것이다. 잡종은 자신 속에 언뜻 보기에는 철저히 모순적인 채널들을 구비하고 있다. 잡종은 ‘멀티 플리(multi-pli)’하다. 자신 속에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주름(pli)들을 한껏 지니고서도 자신 속에서 모순을 느끼지 않는, 분열되어 있으면서도 그 분열을 통해 통일을 역이용하는 것이 잡종이다. 그렇기에 주어진 환경에서 서로 결합할 수 없어 보이는 것들을 예사로 결합하고, 분리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것을 예사로 분리한다. 그러면서 잡종은 항상 주어진 환경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잡종도 하나의 괴물이다. 외눈박이 거대한 괴물이 버티고 서 있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마련해야 하는 또 하나의 괴물이 바로 잡종이다. 잡종을 길러 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수없이 많은 이종교배를 해야 한다. 선과 악을, 진리와 허위를, 미와 추를, 성과 속을, 마침내 순수함과 불순함을 다 보여주고 체험하게 해야 한다. 그것들 모두가 지니고 있는 위력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서 그 위력들을 체득하도록 해야 한다. 과연 가능한가? 현실에서는 이미 외눈박이 괴물성을 실현하고 있지 않은가. 불가능을 미리 염두에 두지 말고, 우리 역시 외눈박이 괴물성을 돌파할 수 있는 잡종으로서의 괴물성을 키워나가야 한다.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내면에서부터 괴물을 미리 두려워하지 않는 일이다.

 

필자 소개

 

1955년생. 서울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 2000년 3월 <철학아카데미> 설립, 현재 운영위원. <인간을 넘어선 영화예술>(동녘, 2000), <미술 속, 발기하는 사물들>(안티쿠스, 2007), <의식의 85가지 얼굴>(글항아리, 2008),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사전>(생각정원, 2012) 외에 여러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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